가끔은 잘 만들어줘서 고마운 영화가 있습니다. <소원>이 그렇습니다. <소원>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그것도 끔찍한 실화이지요. 비극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기획된 영화들은 그 현실을 담보로 삼아서 관객의 공분을 이끌어내고 소비하기 쉬운 형태로 기획되곤 합니다. 영화가 사건을 묘사하는 방식과 그 사건에 대한 인물들의 분노를 발화시켜서 관객들의 마음을 들끓게 만드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당사자들의 통증에 대한 공감은 쉽게 무마됩니다. 아마 당신은 그런 영화들 앞에서 여러 번 끓어올랐을 겁니다. 하지만 끓는 점을 지나면 증발하게 되는 법이지요. 그런 종류의 분노는 상영관을 나와서 쉽게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그 분노는 당사자들을 위한 위로보단 영화적 소비를 권장하는 전략에 가깝기도 합니다. 일종의 스포츠 경기에서 비롯되는 흥분과도 유사합니다.
<소원>은 주인공인 소원이가 참담한 사건을 겪게 되는 과정의 전후를 살핍니다. 소원이만큼이나 그 주변인들이 어떻게 슬픔을 공유하고 아픔에 공감하며 비극을 견뎌내고 삶을 회복해나가는지 담담하게 지켜봅니다. 당사자들의 분노나 고난 자체에 감정을 이입하는데 집중하며 객석을 달구는 그 비극을 딛고 살아가고자 손을 맞잡은 이들의 표정에 온기를 담아내고자 노력합니다. <소원>이 끊임없이 눈물샘을 자극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기 때문이죠. 덕분에 비극적인 상황이 더욱 명확하게 다가오니까요. <소원>이 좋은 영화라고 장담하는 건 그래서입니다.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감을 좁히는, 그 통증이 당신 주변의 누군가의 것임을 깨닫게 만드니까요. 그 통증과 슬픔을 공유할 수 있도록 창을 열어줍니다. 그리고 깨닫게 만듭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한다는 것이야말로 그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아갑니다. 서로의 손을 맞잡고 생을 다짐하는 개개인이 만들어낸 온기를 차갑게 식히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약자들을 보호해야 할 법정주의의 안이한 공정성이라는 것임을 목격하게 만듭니다. 아동성범죄에 대한 취약한 진짜 사회를 환기시킵니다.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합니다. 당신이 그 방향을 목격하고 기억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우리 이야기니까요.
<친정엄마와의 2박 3일>은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반영한 방송 작가의 소설을 동명 그대로 극화한 연극이다. 중요한 건 이 결과물이 말 그대로 ‘자전적 경험을 반영한 소설’이란 점이다. 자신을 반영한 주인공일 뿐, 작가와 주인공은 같은 사람이 아니다. 실제 자신의 경험을 투영했을 뿐, 소설이 묘사하는 주인공의 경험은 (그 원작을 본 누구라도 알 수 있듯이) 현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두고 있을 뿐, 다른 형태로 변주된 결과다. <친정엄마와의 2박 3일>은 각색이란 형태로서 실제를 허구로 창작해낸, 경험의 조작에 의한 산물이다. 목적은 분명하다. 당신을 울리는 것. <친정엄마와의 2박 3일>은 어머니와 가난이라는 페이소스의 이중주를 통해 당신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신파다. 그 의도는 스크린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친정엄마> 역시 신파다.
사실 (대한민국 안에서) 모정이라는 소재를 중심에 둔 과거지향적인 영화들은 대부분 신파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모정이라는 소재가 끊임없이 복기될 수 있는 건 그 소재를 관통하는 감정이 관객 대부분에게 경험적인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까닭이다. 때때로 그 범위는 가족 전반으로 확장되기도 하지만 페이소스를 폭발시키는 뇌관은 대부분 엄마의 몫이다. 엄마란 전통적인 가족의 구조 안에서 피해자의 형태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 실제로도 그러했으며, (혹은 여전히 그런 경우가 다반사이기도 하고,) 그와 유사한 환경에서 자라난 관객들의 지난 경험을 환기시키고 이를 통해 해묵은 감정을 발효시킨다. 가난과 모정이 결합된 실존적 체제의 신파가 그와 유사한 경험을 지닌, 혹은 그와 유사하게 여겨지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 관객에게 공감대를 부여한다.
가난과 모정의 결합은 그 경험적 공감대를 품고 있을 관객들에게 일종의 노스텔지어로 작동되기 마련이다. <친정엄마>에서의 엄마 또한 마찬가지다. 모정은 가난에 등을 맞댄 채 등돌린 자식을 향하고, 가부장제의 폭력 안에서 버틴다. 다 자란 자식은 뒤늦게 이를 회상한다. 그리고 관객은 본다. 지난 시절의 경험이 환기된다. 통증이 밀려온다. 현재시제에서 출발하던 영화는 한 차례 긴 호흡의 플래쉬백을 거쳐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소설이건, 연극이건, 원작을 접한 관객에게 유효하지 않지만 그 플래쉬백은 모종의 의도를 감추고 있다. 물론 그것이 딱히 놀랄만한 반전적 비밀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은 감정을 응축시키기 위한 일종의 도움닫기 구실을 한다. 경험의 환기를 통해 감정을 축적한 뒤, 이성의 둑을 무너뜨리고 감정을 폭발시킨다.
<친정엄마>에서 중요한 건 서사보다도 인물이다. 사실상 원작 소설이나 희곡이 그랬던 것처럼, <친정엄마>의 시나리오에서 어떤 비범한 형태를 찾아보기란 어렵다. 그저 모정과 가난이 뒤섞인 신파라는 구별점 외에 특이점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무대 위에 올려진 연극이 유효할 수 있었던 건 이를 연기해내는 배우의 역량에 있었다. 희곡에서 반복적으로 활용하는 플래쉬백은 배우에게 있어서 끊임없는 감정의 널뛰기를 요구하고 감정적 몰입의 단절을 꾀한다는 점에서 좋은 희곡의 형태로 완성됐다고 평하기 어렵다. 그만큼 배우의 역량에 따라서 무대의 완성도는 질적으로 달라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강부자의 연기는 그것을 가능케 한다. 결과적으로 희곡이 온전히 배우의 연기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영화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강부자의 그것만큼이나 김해숙의 연기는 <친정엄마>가 보유한 뚜렷한 자원이다. 김해숙의 연기는 신파의 요소들을 수집해 일방적으로 공급하듯 재단한 서사의 너비 안에 찰기를 불어넣는다. 박진희는 차분하고 또렷하게, 자신이 머금고 뱉어내야 할 감정의 공급과 수용에 능하다. 하지만 때때로 그 감정적 교류 속에서는 과잉의 흔적이 발견된다. 이는 시나리오와 디렉션의 문제다. 사실 <친정엄마>가 묘사하는 모성애는 그것이 지나치게 극화된 양식 안에서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다는 인식을 부여한다. 엄마의 희생을 부각시키면서도 그 희생이 이루는 공적인 감정적 환기만 이룰 뿐, 당사자의 내면을 살피지 않는다. 이는 결과적으로 원작 자체가 당사자의 심정보다도 외부적인 관찰자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1인칭 시점의 감상적 결과물에 불과한 까닭일지도 모른다. 배우들의 연기는 이런 단점들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들지만 완벽하게 메워지지 않는다. 보다 단명해진 서사의 흐름이나 관계의 변주는 눈여겨볼만하지만 그 감정의 쓰임새까지 인상적인 것은 아니다.
<친정엄마>는 흘러간 옛 노래처럼 낡은 영화다. 하지만 모성은 낡기 보단 깊게 우러나는 것이다. 누구나 엄마의 자식일 수 밖에 없는 만큼 각자 형태는 다를지라도, 서로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감정적 부채를 뒤늦게 깨닫고 마음에 지운 채 살 수 밖에 없다. <친정엄마>를 통해서 눈물샘의 자극을 느끼는 관객이라면 그건 자신의 마음에 얹혀진 부채의 너비를 뒤늦게 발견한 탓일 게다. ‘엄마 때문에 못 살겠다’는 대사만으로도 그 마음에 박아넣었던 경험들이 환기된다. 결국 그런 감정이 돌아와 개인의 마음을 찌른다. 결과적으로 <친정엄마>는 모성의 위력을 빌려 개개인의 감수성을 착취하지만 그 마음에 박힌 상처까지 들여다 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작품이다. 어쩌면 애초에 자식의 눈으로 재구성한 엄마의 드라마란 점에서 한계는 명확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식은 결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니까.
환자를 앞에 둔 신부는 기도를 거듭할 뿐이다. 기도는 환자는 살리지 못한다. 그저 무기력한 언어로서 환자를 배웅할 뿐이다. 신부는 환자를 살리고 싶다. 하지만 신부는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의 몸을 제단에 바친다. 백신개발실험에 참여해 자신의 육체를 바이러스의 볼모로 삼는다. 하지만 그 결과 신부는 뱀파이어가 된다. 죽음에 직면했던 신부는 뱀파이어의 피를 수혈 받고 살아난다. 스스로의 말처럼 ‘그저 좋은 일을 하려 했을 뿐’인데 운명은 가혹하다. 뱀파이어가 된 신부의 아이러니로부터 <박쥐>는 시작된다.
<박쥐>는 ‘뱀파이어가 된 신부’와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이라는 두 개의 바퀴를 통해 굴러간다. 박찬욱 감독이 택한 두 장의 카드는 박찬욱이라는 네임밸류 안에서 적절해 보인다. 특히 <박쥐>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건 일면 타당한 느낌이다. 식물적인 삶에 길들여져 있던 여인이 건장하고 본능에 충실한 남자를 만나 정욕을 깨닫고, 이는 흉악한 치정극을 성립시켜 살인의 공모에 다다르게 한 뒤, 질환적인 죄의식에 시달리며 피폐하게 말라가던 공모자들이 결국 성스러운 공멸을 선택하게 된다는 소설의 흐름은 박찬욱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던 관념과 의식들과 적나라하게 연관돼있다. 이는 온전히 개인의 취향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박찬욱 감독의 취향 그 자체로 채워진 사적인 유희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박쥐>는 개인 취향의 수집품에 가깝다.
통제된 연출 속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과장된 표정과 격양된 몸짓을 통해 저마다 인공적인 양식에 철저히 복무한다. 공간을 구성하는 잡다한 소품부터 거창한 미장센까지 하나 같이 기능적인 의미에 종속된 인테리어적 구실에 여념이 없다. 모든 상황이 인공적이다. 연출적인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때때로 배우들은 본연의 인상을 무의식적으로 노출하며 부조리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상당히 과장된 연기를 펼치는 가운데 아주 간혹 제 얼굴을 드러낸다. 본래 각인된 이미지가 강할수록 그 찰나는 자주 반복된다. 이는 연기적 문제에 대한 지적이 아니다. 말 그대로 이 영화가 얼마나 배우의 자의적 해석이 불가능한 영화인가를 드러내는 지점이라 흥미로울 따름이다.
‘뱀파이어’는 부조리를 드러내기 위한 직접적 수단이 되어 흉악하게 응용되고 때때로 빈틈을 찾아 웃음을 삽입하는 소품처럼 활용되기도 한다. 뱀파이어가 <박쥐>의 날개라면 ‘테레즈 라캥’은 몸통이다. 날개와 몸통은 어떤 비중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저 역할의 배분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극적 묘사에 판본 그대로 활용되거나 변주된 이미지로서 모티브의 흔적을 강렬하게 자각시키는 ‘테레즈 라캥’은 <박쥐>를 구현하기 위한 몸통 그 자체다. 특히 <박쥐>에서 인상적인 이미지를 확보했다고 말할만한 시퀀스의 대부분은 테레즈 라캥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에 가깝다. 하지만 때때로 시퀀스를 연결하는 매듭이 헐겁다. 구조적으로 불친절한 형태로 시퀀스가 이어짐을 지각하게 된다. 소설을 미리 접한 자는 분명 결핍을 느낄 것이다. 반대로 소설로부터 동떨어진 이는 의문을 느낄 것이다. 게다가 ‘뱀파이어’와 ‘테레즈 라캥’은 서로 잘 달라붙지 못하는 인상이다. 연상 자체는 기발하지만 효과적인 연동을 보여주지 못하는 느낌이다.
결과적으로 대단히 숭고한 파괴의 절정으로 치닫는 <박쥐>를 마주한 관객들은 두 번 시험에 들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 유희적 취향을 존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건널 수 있다면, 이차적으로 그 유희를 지지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에 빠질 것이다. 이는 결국 신앙의 차이다. 영화의 결과물 자체가 박찬욱의 완벽한 의도 안에서 이뤄진 산물이라 믿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감상을 설계할 수 있는 관객은 <박쥐>를 성스러운 복음이라 믿고 따르며 기꺼이 자신의 해석을 바칠 것이다. 그러나 지독한 결핍과 인공적 내음을 자각하고 지나친 과잉과 자만의 산물이라 판단하는 이에게 <박쥐>는 그저 지독한 악취미로 치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박쥐>는 분명 존중할만한 취향이다. 비록 개인적인 영역 안에서 어떤 소통의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제한할만한 작품이지만 분명 그 안에 담긴 예술적 성취 자체를 마냥 질시할 수 있는 그릇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중적인 지지와 작품의 고유한 가치 사이의 함수를 따질만한 셈이 동원될 것이다. <박쥐>는 마치 욕탕의 수면처럼 뜨거운 작품이다. 그 표면의 뜨거움을 참아내는 관객은 누구보다 깊게 잠수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참지 못한다면 그저 발 한번 담가보지 못하고 외면당할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박쥐>는 영화보다도 영화를 둘러싼 말의 형태가 더욱 흥미로운 영화가 될 공산이 크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건 그리 놀랍지 않다. 식물적인 삶에 길들여져 있던 여인과 본능에 충실하던 남자가 만나 정욕을 깨닫고 흉악한 치정극을 거쳐 살인을 공모한 뒤, 질환적인 죄의식에 시달리며 피폐하게 말라가다 결국 성스러운 공멸을 선택하게 된다는 소설의 흐름은 박찬욱의 영화를 관통하던 관념들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박쥐>는 온전히 박찬욱 감독의 취향으로 채워진 사적인 유희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개인 취향의 수집품에 가깝다. 관객은 두 번 시험에 들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 유희적 취향을 존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건넌다면, 이차적으로 그 유희를 지지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 뒤따른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과장된 표정을 띠고 격양된 연기를 펼치며, 공간을 구성하는 잡다한 소품들은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기능적인 인테리어의 속성에 얽매여있다. 대단히 인공적인 형태로 모든 상황이 연출적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배우들의 연기는 그 통제에 얽매여 있다가도 종종 배우 본연의 얼굴을 숨기지 못해서 이질감을 발생시키기도한다. ‘뱀파이어’는 부조리를 묘사하기 위한 수단처럼 흉악하게 응용되거나 때때로 유머러스한 소품이 되기도 하지만 끝에 다다를수록 숭고해진다. 다만 대부분의 극적 묘사에 판본 그대로 활용되거나 모티브로서 변주된 ‘테레즈 라캥’의 흔적들이 굴러가는 풍경은 시퀀스 자체의 성취를 보여주는 반면 구조적인 불친절을 지각하게 만든다. 소설을 숙지한 자라면 결핍을 발견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의문에 빠질 것이다. ‘테레즈 라캥’과 ‘뱀파이어’의 연동은 기운의 결탁자체로서 기발하지만 두 콘텐츠가 잘 달라붙어 연동되지 못하고 틈을 벌린 채 굴러간다는 인상을 남기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신앙의 문제다. 영화의 결과물 자체가 박찬욱의 완벽한 의도라고 믿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감상을 설계할 수 있는 관객에게 <박쥐>는 성스러운 복음이 될 것이다. 반면 결핍과 인공성이 지나친 과잉과 자만이라고 판단하는 이에게 <박쥐>는 그저 악취미라 불쾌한 것이 될 뿐이다. 그 취향을 존중할 필요는 있다. 지지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아이러니하지만 <박쥐>는 영화보다도 영화를 둘러싼 말의 형태가 더욱 재미있는 영화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