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죽음 이후로 살림에 어려움을 느끼던 연주(김혜수)는 자신의 2층집에 세입자를 구하지만 좀처럼 방을 구하는 이가 없다. 그런 속도 모르고 딸 성아(지우)는 엄마에게 성형수술을 해달라며 조르기만 하니 엄마 속은 더욱 타 들어가고 매일 같이 잠 못 이루는 밤의 연속이다. 어느 날, 방을 보고 싶다는 남자가 찾아오고 연주는 남자의 정체가 궁금하면서도 당장 집세를 지불하겠다는 그의 태도가 반갑기만 하다. 하지만 그 남자 창인(한석규)에게는 모종의 꿍꿍이가 있고, 그는 줄곧 연주를 통해 무언가를 알아내고자 안간힘을 쓴다.
<이층의 악당>은 ‘적과의 동침’이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발전하다 결국 ‘가족의 탄생’으로 종착하는 기이한 로맨스 코미디다. 제목만으로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이층의 악당>은 한석규와 김혜수의 조합만으로 눈길을 끌지만 그에 앞서서 <달콤, 살벌한 연인>이라는 재기발랄한 범죄 로맨스를 연출한 바 있는 손재곤 감독의 4년 만의 차기작이란 점에서 보다 선명한 물음표를 쥐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층’이라는 구조와 ‘악당’이라는 캐릭터가 부각된 제목처럼 <이층의 악당>은 공간의 활용범위가 탁월하고 캐릭터를 매만지는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마치 캐릭터를 방아쇠로 당겨 스토리의 곳곳에 매복시킨 뇌관을 폭발시키는 것과 같다. 1층과 2층을 경계로 한 지붕 아래서 거주하게 된 창인과 연주의 관계는 그 자체로부터 새어 나오는 긴장감은 서서히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고, 관계의 전환을 통해 흥미를 지속시키며 그 관계를 통해 불거지는 갈등이나 예기치 못한 감정의 발화를 통해 폭발적인 유머를 발생시킨다.
무엇보다도 <이층의 악당>은 창인과 연주의 심리적 거리가 서로 공유하게 되는 동선의 확대와 함께 점차 묘한 심리적 연대로 변모해나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감정적 설득력을 통해 감상을 지배해나간다. 특별한 목적을 지닌 채 연주에게 접근해 나가던 창인이 연주와 특별한 관계로 거듭나는 과정은 비슷한 부류의 로맨스물에서 곧잘 발견되는 특성이기는 하나 <이층의 악당>은 그런 관계의 변화를 물리적으로 묘사할 뿐, 화학적인 감정적 반응을 이야기 안에 구겨 넣지 않는다. 상황의 변화 속에서도 냉정하게 자신의 목적을 관철시키려는 인물과 다소 백치미스러운 오해를 동반하면서도 그의 목적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인물 간의 줄다리기는 효과적인 유머의 기반으로서 손색이 없다.
정말 웃긴데 뭐라 설명할 길이 없는 ‘지하실 시퀀스’와 같이 <이층의 악당>은 두 인물 사이에 놓인 비밀과 접근성을 통해 얻어지는 예측 밖의 상황들을 연출해냄으로써 폭발력 있는 서스펜스와 유머를 찰나에 묶어둔 채 관객이 얻을 수 있는 순수한 재미를 끊임없이 개발해 나간다. 시종일관 편차 없이 적정한 수준을 유지하는 스토리텔링은 시작과 끝이 깔끔하며 의뭉스럽게 시선을 잡아 끄는 캐릭터들은 예측 불허의 긴장과 유머를 들이밀지만 저마다 쓰임새가 적절하다. 물론 소모적인 캐릭터가 일부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층의 악당>은 전반적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안정적인 재미가 더부살이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올해의 물건이라 장담할만한 코미디의 발견이다. 한석규와 김혜수의 앙상블도 흥미롭지만 그에 앞서서 <이층의 악당>은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발견한 손재곤 감독의 검증을 이룬 작품이란 점에서 보다 확실한 의미를 짚게 만든다.
한석규와 김혜수의 조합만으로도 궁금증이 도질 것 같지만 <이층의 악당>은 <살콤, 살벌한 연인>이라는 제목만큼이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손재곤 감독의 4년만의 차기작이다. 빤한 듯 물음표를 잡아 끄는 스토리는 시작과 끝이 깔끔하고, 캐릭터들은 의뭉스러운 척 선명하게 시선을 잡아 끌며 가늠할 수 없는 지점에서 유머가 찌르고 들어오고 결과적으로 따뜻하다. 캐릭터의 쓰임새들은 저마다 적절하고, 공간의 활용이 탁월하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안정적인 재미가 더부살이하는, 단연 올해의 물건으로 꼽힐 만한 코미디가 등장했다. 손재곤이란 이름을 기억해둘 것.
<모던보이>개봉이 늦어졌다. 개봉이 늦어질수록 배우는 결과물이 더더욱 궁금해질 것 같다. 다른 사정에 대해서 난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후반 작업이 중요했으니까 결과적으로 큰 힘이 된 거 같다. CG는 시간과 공력이잖아.
간담회 때 영화를 본 소감을 말하는데 울 거 같더라. 진짜로 난 울다 갔다. 우리 배우 셋이서 손 꽉 잡고 영화를 봤는데 셋 다 울었지. 만약 옆에 해일 씨 스타일리스트 분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상태 많이 안 좋았을 거다. 특히 난 화장도 했으니까, 휴지로 눈가를 꾹꾹 눌러가면서 울었지. 물론 내가 내 연기하는 거 보면서 울고 그런 건 아니다. 이유는 여러 가진데 그냥 그때 다들 개인적인 감정들이 생각났을 거다. 나도 그 때 당시 내 마음이 너무 생각났는데, 그러니까 진짜 눈물 나더라. 그래서 사실 영화가 끝난 다음에 간담회를 할 감정이 안 돼서 집에 가고 싶었다. 안 하면 안 되는 거 알긴 아는데 혼자서 있고 싶었지.
캐릭터에 대한 몰입이 깊은 까닭일 수도 있지만 현장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바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촬영장분위기는 일할 때 내 개인적 감정과 아무 상관이 없다. 촬영장이 어수선하다고 내가 해야 될 걸 못하진 않으니까. 내가 못해서 못한다면 모를까, 촬영장분위기가 진지하고 조용하다고 내가 의기소침해지거나 이렇지도 않고. 내가 진지해야 할 무대에 있을 땐 개인적인 문제건, 일 때문이건 상관없다. 물론 촬영장분위기가 어수선하면 좋진 않지. 그렇다고 그게 치명적인 방해가 되는 건 아니다. 일 끝나고 촬영이 종료되면 그냥 자연스럽게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다만 <얼굴 없는 미녀>가 안 그랬던 것 같다. <얼굴 없는 미녀>를 통해서 거친 여러 가지 감정의 여운들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많이 남아있었으니까. 이번에도 좀 그랬다. 조난실이란 캐릭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게 아니라 조난실이란 캐릭터를 통해 이 작품을 만나고 이를 통해 겪은 과정에서 얻어진 감정들이 다시 상기됐다. 사실 작품 끝내고 오래 전에 쉬었던 만큼 쉬는 동안은 괜찮았다. 편안했지. 그런데 영화를 보고 그때 그 감정들이 떠오르는 것 같더라.
영화를 직접 보고 난 느낌은 어떤가? 일단 원작과 많이 달라진 부분이 있다는 건 원작을 보셨으면 아실 테고. 다만 그게 우연히 그리 된 게 아니라 애초에 그렇게 정해져서 된 거니까. 난 개인적으로 영화가 전체적으로 맘에 든다. 이게 완벽하게 뛰어나서라기 보단 개인적으로 그 자체가 그냥 맘에 든다. 분야마다 개개인들이 전반적으로 많은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고. 물론 마음 속으로 고통을 겪어가면서 심혈을 기울였다 해도 그런 과정은 대부분 작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흔적들이 나타나는 것 같아서 좋다. 그리고 저마다 다른 여운들이 남을 것 같은 영화라서, 난 그 지점들이 좋다.
원작을 먼저 본 건가? 아니면, 시나리오를 먼저 보고 원작을 봤다.
원작을 먼저 접해서 그 내용을 맘에 들어 했다면 시나리오에 납득하긴 힘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럴 수도 있지. 성격이 너무 다르니까. 재기발랄함과 발칙함, 그리고 감히 우리가 범접할 수 없을 만한 그 시대의 어떤 기운, 원작엔 그런 기운이 충만하잖아. 영화는 원작과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지. 사실 내가 했던 영화 중에 원작의 느낌을 잘 살린 작품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정도 아닌가? <타짜>도 전혀 다르고, 시대가 달랐고 개개인도 다르고 정마담조차 아예 다른 캐릭터였고. 그런 변화를 대중들이 얼마나 많이 공감하느냐의 문제겠지. 하지만 일단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했고 이에 배우들도 동의했고, 애초에 우리가 본 시나리오가 원래 그랬으니까. 이미 그렇게 결정된 엔딩에서 시작한 시나리오니까 그 핵심적인 기운은 원작과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지.
조난실 캐릭터도 원작보다 가미된 점이 많다. 엔딩이 그렇게 되려면 조난실 캐릭터가 달라져야만 했으니까. 그런데 난 원작도 재미있게 봤다. 사실 시나리오와 전혀 다른 느낌이지. 교육을 통해서 엄격한 강요처럼 받아들여지던 시대를 어떤 인물들을 통해 다른 시각으로 그려나갔다는 것. 사실 이해명이란 인물에겐 현실감이 없지만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나 정서, 그리고 행위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기막히더라. 그런 게 재미있었다. 사실 지금도 이해명의 감정이 다 생각난다. 조난실이 어땠는지 기억 안 나도 이해명의 감정은 지금도 다 생각난다.
스스로의 말처럼 결말을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영화에서는 원작과 달리 조난실의 내면적 갈등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모호한 느낌을 가진 원작의 캐릭터보다 그렇게 직시된 감정선을 노출하는 캐릭터가 연기적으로 더 편하지 않았을까? 원래 편한 건 하나도 없다. 뭘 해도 다 불편하고 어렵다. 만약 그게 쉽다면 배우들은 일부로라도 어려운 걸 찾아서 쓸 때 없어 보이는 몰두를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실은 그게 결코 쓸 때 없는 건 아니다.
캐릭터를 파악하는 것도 관건이었을 것 같다. 조난실은 항상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여자다. 연기하는 스스로도 캐릭터와 어느 정도 거리감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을 것 같다. 원작에서의 조난실은 그 자체가 묘연해도 되는 여자인 거 같다. 하지만 영화에서의 조난실은 묘연한 매력이 있는 여자가 아니라 묘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 수 밖에 없는 여자인 거지. 필요에 의해서 묘연해지는, 선택적인 팔색조랄까. 그렇다고 감정이 절대 분명한 건 아니다. 왜냐면 해명이 이미 이 여자의 진심을 알았다 하더라도 조난실은 끝까지 해명에게 가리는 부분이 있으니까. 관객이 눈치채는 순간보다 해명이 늦게 눈치채는 거다. 난 조난실의 감정은 관객을 이해시키기보다 궁극적으로 해명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지 원작과 다른 건 조난실의 진정이 더 담겼다는 거지.
조난실이란 캐릭터는 스스로를 위장한다. 그건 일종의 연기적 행위처럼 보인다. 연기라기 보단 상황에 맞게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캐릭터니까, 어쩌면 해명 앞에서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연기를 했을 수도 있지. 처음에 해명은 감정이 앞서서 이 여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사랑했지만 조난실은 팀의 일원을 망가지게 한 분노와 총독부에 다니는 남자에게 알아내고 싶은 정보가 있었을 거다. 결국 해명의 기구를 갖다 팔아서 자기 조직의 자금으로 쓰기도 하니까. 하지만 단지 이런 목적을 위해 아틀란티스라는 카페에서 키스를 하고 이 남자의 집에서 잠시나마 함께 살았을까? 어느 정도 호감도 있었을 거다. 그러니 얼마나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은 또 얼마나 심란했겠어. 그 순간엔 필요와 목적에 의해서 연기했겠지만 감정을 절대 숨기지 못하는 순간도 있었겠지.
난투극을 벌이고 나서 함께 만취한 상태로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애틋함이 전해졌다. 취기 어린 몸짓으로 이해명의 귓가에 대고 조난실이 노래를 들려주는 게 난실이의 진심인 거 같다. 이 철없는 남자를 자꾸 좋아하게 되는 거, 난 사실 이런 남자를 좋아하면 안 되는 입장인데도 웬만큼 독한 마음 먹지 않고서야 마음이 흔들리는 건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거지. 이해명이란 사람이 맹목적으로 이 여자를 사랑하는 만큼 그 상대도 그 순수한 진심을 느끼게 되면 달라질 수 밖에 없거든. 난실이 해명에게 해주고 싶었던 얘기는 어쩌면, 난 이런 염원을 하는 사람이야, 이걸 제발 알아줬으면 좋겠어, 이런 게 아니었을까. 난 그래서 그 씬이 개인적으로 좋다. 조난실의 진심이 가장 잘 드러난 느낌이니까. 정말 사랑하는 남자까진 아닐지라도 좋아하는 남자한테 내 진심을 들려주는 것이기도 하고. 어쩌면 절대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제발 알아주길 바라는 간절함도 느껴지고.
지금도 스스로도 울컥하는 듯한 느낌이 전해진다. 이건 우리 해명 씨가, 아니 해일 씨가 어떤 인터뷰에서 얘기해서 벌써 기사화 됐으니까 하는 얘기인데, 사실 그게 술에 만취한 상태이기 때문에 상호 동의 하에 두 사람 다 술을 조금씩 먹고 했다. 난 술을 잘 안 먹기 때문에 얼마나 취해야 되는지 잘 몰라서 조심스러웠는데, 해일 씨는 좀 많이 먹었지. 취기를 가지고 연기한 건 처음이었고 내가 취해본 적이 없어서 나도 모르게 취해서 캐릭터를 잊고 실수하거나 촬영에 누가 되는 상황이 올까 봐 두려웠는데 그렇겐 안되더라. 그런데 조금 취한 상태였을까. ‘왜 그 실력으로 무대 뒤에서 노래를 해!’라고 해일 씨가 말할 때, ‘일본 말로 노래하기 싫어서’라고 대답하면서 정말 가슴에서 울컥하던데!(웃음) 신기한 경험이었다.
<모던보이>는 시대적 고증이 잘 된 느낌이다. 시사회에 오셨던 여러 전문가분들도 그러시더라. 그 시대를 연구하는 박사 분들이 여럿 오셨는데 다들 완벽에 가까운 재현이라고 놀라시더라.
올해 초에 ‘인사이트 비쥬얼’이라는 VFX스튜디오에 취재차 들렸다가 <모던보이>CG작업 과정을 본 적이 있다. 경성을 완성하는데 CG의 공헌도가 상당한 걸로 안다. 사실 실제로 배우들이 연기하면서 본 풍경과 영화 상의 경성은 많이 다를 거다. 아무래도 배우들도 영화를 보면서 새로운 감흥을 느꼈을 것 같다. 깜짝 놀랐지. 조선총독부의 복도 천장, 복도 깊이, 하다못해 해명이 일하는 곳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해명과 신스케가 얘기할 때 살짝 보일 듯 말 듯 일렁거리는 초록빛, 사실 내가 본 건 파란 벽이었을 뿐인데 도대체 실사 조명을 어떻게 했을까? 그리고 도시락 들고 해명이 총독부로 막 들어갈 때 창문에서 신스케가 ‘이해명!’을 외치면서 손 흔들잖아. 난 그거 어디서 찍은 지 알거든. 그건 또 어떻게 한 거야!(웃음) 사실 난 펼쳐진 공간보다 실내공간에서 많이 나오니까, 오픈 세트라 하더라도 블루매트가 멀리 있어서 큰 불편함은 없었다. 그런데 공간에 대해서 감이 안 잡혀서 난감했던 적이 한번 있었지. 미츠코시 백화점 옥상의 호화로운 오픈 레스토랑을 찍을 때, 작은 세트장을 레스토랑이라면서 실제 바닥보다 좀 높여놨더라. 그리고 그 위에 있는 건 테이블과 의자들, 그리고 보조 출연하시는 분들. 그 주변으로 경성 시가지가 보인대. 좀 이상했지. 그런데 CG로 완성된 장면을 보니까 그때 내가 느꼈던 어색함조차 상쇄시켜줄 정도로 놀라운 배경으로 완성됐더라.
그런 상황에서 연기를 하면 분명 어색함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거다. 그만큼 연기를 하면서도 뭔가 미완성의 기분을 느꼈을 테고. 꼭 그런 상황이 아니라도 불편한 상황은 많지. 잘 하려고 기를 쓰는데도, 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난 왜 이걸 진짜처럼 보지 못할까, 싶을 때가 너무 많으니까. 그럴 땐 정말 미치겠다. 그런데 사실 배우는 영화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움직이고, 노는 거지. 실상 그 공간을 더 힘들어 하는 사람은 연출자고. 그래서 결국 어떤 연출자가 어떻게 운용했느냐에 따라서 배우의 개인적인 완성도와 다르게 또 다른 완성도가 생기는 것 같다. 사실 그래서 배우가 더 초라해 보일 때도 있지. 후진 영화에서 배우가 열연하는 것처럼 가엾어 보이는 것도 없는 것처럼. 그 배우는 얼마나 열성을 다해서 했겠어.
조난실은 결국 대의를 위해서 자신의 진심을 위장하는 바가 있었을 거다. 때때로 배우이기 때문에 종종 영화를 위해서 캐릭터를 자신을 위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은 없나? 위장까지는 아니지만 그럴 때는 있었지. 항상 최선을 다해서 하지만 정말 내가 이 난관을 극복하지 못할 때는 편리하게 해왔던 대로, 아주 전형적인 방식으로 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안 해. 내가 재능이 부족해서, 혹은 아직까지 무언가가 부족해서 할 수 없는 지점이 분명히 있지만 어떤 순간이건 내 감정이 서지 않거나, 감정적이건 논리적이건 어떤 식으로도 납득되지 않는 순간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억지로 연기해선 안 된다는 게 내 입장이다. 그럼 지금까지 모두 다 완벽하게 납득했냐, 라고 묻는다면 물론 그렇진 않지. 그렇지만 그런 근거가 없으면 하지 말아야 하는 거 같다. 그리고 그걸 억지로 시키는 연출자는 결코 좋은 연출가도 아니고.
노래도 잘 하더라. 실제 실력인가, 아니면 시스템 기기를 활용한 건가? 본래 난 성량이 안 좋다. 그런데도 일부로 기계적인 거 별로 안 넣고, 심지어 에코도 안 넣었다. 왜냐면 노래에 조난실의 진심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물론 일부 불안한 음정은 잡아주셨겠지. 처음 무대에서 부르는 곡은 원래 노래가 되게 어렵다. 그런데 그 노래의 목소리 톤이나 태도가 조난실과 너무 잘 매치돼서 나나 감독님이나 음악감독님이 무리인 걸 알면서도 욕심을 내서 최대한 해보고 안되면 다른 곡으로 하자고 합의했다. 시간이 얼마든지 있어서 가능한 것이기도 했고. 그런데 성량이 안되니까 ‘웅산’이라는 재즈 싱어에게 기본적인 것들을 트레이닝 받았다. 그렇지만 디테일하게 개입하진 않더라. 조난실의 감정이 중요하고 그 감정으로 그 노래를 해석하는 게 중요했지, 내가 재즈 가수로서 테크니컬한 기술을 뽐낼 건 아니었으니까. 대신 기본적인 음률이나 음폭을 잡아주는 건 중요했다. 조난실은 그런 재능이 있는 여자이기 때문에 김혜수도 최소한 그 정도의 재능은 갖춰야 되는 거니까.
영화를 찍으면서 레코딩도 함께 한 건가? 음악감독님이 처음 미팅 때 내 음색만 체크하셨다. 아무 노래나 불러달라 하시곤, 됐습니다, 하시더니 ‘개여울’이라는 곡을 나중에 가져오시더라. 가사가 김소월의 시였기 때문에 우리 민족 정서와 맞아 떨어지고 조난실의 내면과도 맞닿는 게 있었다. 그래서 그 노래 들었을 때 마음이 일렁거리는 게 있는 것도 같았다. 연기하다 보면 그게 더 느껴지기도 하고. 사실 연기하기 전에 레코딩을 다 끝냈는데 나중에 다시 한번 하자고 부탁 드렸다. 실제로 영화에 들어가는 ‘개여울’은 다 끝낸 다음에 한 거다. 그래서 트레이닝 후로 몇 개월 지난 목소리라 가다듬어 지지 않고 거칠지. 사실 개인적으론 처음 부른 노래가 훨씬 매끈하고 기술적인 완성도가 좋다고 생각한다. 그 때는 음폭에 대한 훈련도 잘 된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조난실을 연기하면서 내가 예상했던 조난실의 감정과 달라진 폭을 느꼈고 감독님도 나중에 부른 노래에 그런 감정이 담겨서 나중에 부른 걸 쓰신 거 같다.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나?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지만 받는 게 있겠지? 실은 조난실 준비하면서도 여러 가지 공부도 했고, 작업을 거치는 와중에 영향을 얻은 것도 있고.
어려서부터 연기를 지속한 만큼 개인적으로 갈등도 많았을 거다. 요즘 어린 친구들은 성숙하잖아.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빨리 캐치하고 그 꿈을 향해 구체적인 실천들을 하는 것 같다. 우리 땐 그렇게 못했지. 나도 우연히 광고모델 하다가 영화를 찍었고. 성인 영화였지. 그런 성인 영화 말고 성인 등급의 영화. 그때 내가 만 열 다섯 살이었는데 그 때 했던 역할은 십팔 세 밤무대 여가수였지. 원래 김진아 언니가 내정돼있었는데 언니가 미국에 갈 일이 있어서 그 역할을 수행할 신인을 급하게 찾던 중에 영화사에서 내가 출연한 광고 사진을 본거다. 내가 최소한 대학생은 되는 줄 알았다나. 광고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의뢰가 왔다.
첫 광고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태권도복 입고 나오던. 그러니까, 그거! 그 광고 찍고 그 회사에서 또 뭘 해달라 그래서 내가 ‘암바사’ 사진광고도 찍었다. 지금 보면 애 같은데 그땐 좀 성숙하게 보였나 봐. 화장을 해서 그랬나.
어린 나이였는데 어떻게 허락하게 됐나? 혼자서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을 텐데. 사실 나야 애니까 모르는 거지. 부모님이 안 된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고. 아버지께서 심각하게 반대하셨지. 그땐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훔친 사과가 더 맛있다> 이런 포스터들이 걸려있던 시대라 영화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 전혀 다르기도 했고. 그런데 미성년자 딸에게 그런 제의가 왔으니.(웃음) 그런데 감독님이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사무실에 열심히 찾아가셨고, 그 과정에서 시나리오도 좀 바꿨고, 종래엔 학교에도 오셨다. 선생님들도 허락 안 했으니까. 감독에겐 그런 치사한 과정이 있었던 거지. 결국 우여곡절 끝에 하게 됐지만 내가 뭘 알아? 모르지. 광고는 하란 대로만 하면 되지만, 웃어요, 하면 빵긋 웃고.(웃음) 나 진짜 그 때 가관이었다.
박중훈 씨도 그 작품으로 함께 데뷔했다. 중훈 오빠는 배우로서의 욕망이 진짜 있었던 사람이다. <깜보>한다고 처음 합동영화사 갔을 때 장두이 아저씨는 미국에서 아직 안 오셨고, 상대역이라고 중훈 오빠가 왔는데 물빠진 빽바지에다가 청자켓을 입은 모습이 너무 불량해 보이더라.(웃음) 나중에 들어보니까 오빠는 나한테 잘 보이려고 웃었대. 난 웃는 모습조차 너무 불량해 보였고.(웃음) 그런데 실제로 연기할 때 욕심이 대단했고, 적응력도 대단하고, 내가 볼 땐 그 때 이미 처음부터 연기도 잘 했던 거 같다. 머리도 비상했고. 그에 반해 난 너무 평범한 애였지. 조감독님 허리띠 잡고 다니면서 눈 오면 조감독님이 업고 다니기도 했고, 촬영하다 자고.(웃음) 밤을 새본 적이 없었거든. 그 때는 15시간, 16시간이 보통이었으니까. 카메라가 앞에서 돌아가거나 말거나 촬영하다가 졸리면 옷 뒤집어 쓰고 자고 있었다. 그렇게 애가 대충 깨워도 안 일어날 정도로 자니까 어른들 마음이 좀 그랬는지 그날 촬영은 접고. 내가 그렇게 자랐지.
그 나이엔 특별한 경험이었을 거다. 배우라는 개념이 생기기엔 정신적으로 많이 어린 나이였지만 좋았던 건 어른들 틈에 있었다는 거? 학교에 가면 그 또래들만 봤을 텐데, 어른들이 다 유별나잖아. 머리 긴 아저씨도 있고, 희한한 옷도 입고 다니고, 특이한 얘기도 많이 하고. 영화 얘기, 음악 얘기, 이런 걸 보고 들으면서 이런 게 예술가들인가, 싶었지. 머리만 길어도 저 아저씬 뭔가 심오한 게 있나 봐, 그랬고.(웃음) 다들 예술가의 기운이 있었으니까. 그런 게 신기해서 사람들을 구경하는데 몰두했다. 그런 게 꽤 오래갔지. 그런데 정작 감독님이 말하는 건 하나도 못 알아들었고. 감독님도 날 애기 다루듯이 했다. 이게 이해가 되니? 감독님이 물으면 예, 라고 하지만 뭘 알았겠어. 그렇게 영화 하면서 철도 들었지. 그런데 내가 너무 어릴 때부터 시작해서 그런지 어느 순간 내가 일해야 하는 분들과 개인적인 소통이 안 되더라. 날 애기 때부터 만 봐왔고, 난 늘 그 팀에서 애기였고, 그러다 보니 내가 이제 성인이 되도, 혜수는 애기니까 몰라, 이렇게 생각했는지 아무도 나랑 얘기를 안 해. 그런데 난 이제 나이가 들고 성인이 되면서 이 일에 내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만큼 이 일에 대해서 고민을 하기 시작했지. 내가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만큼 일에 대한 어떤 의지나 방향, 내가 원하는 것, 그런 고민이 생기잖아. 근데 그게 좌절이랄 것도 없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듯한 상황이 늘 연출되는 거다. 근데 그것도 괜찮았다. 늘 그랬으니까 그런가 보다 그랬지. 그런데 어느 순간 못 참게 되는 순간이 생기면서 괴로워졌다. 이십 대를 그렇게 보냈지.
배우로서의 능동성을 고민하기 시작한 걸까? 능동성? 글쎄, 사실 그런 고민들은 20대부터 있었으니까. 개인적인 방황이나 좌절 같은 거, 물론 그땐 방송도 많이 하고 1년에 한편 꼴로 영화도 했지만 주로 밝은 드라마만 하면서 항상 웃기만 하고, 누가 봐도 지나치게 밝은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른 척 하고 싶지만 절대 모른 척 할 수 없는 고민들이 자꾸 생기잖아. 왜냐면 내가 실제 생활하는 시간의 대부분이 거기 있었으니까. 그러다 내가 진심으로 이게 정말 쉽지 않구나, 라고 좌절했던 건 우리나라영화계가 다른 단계로, 다른 진화를 겪을 때였다. 영화계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세대가 좀 달라졌지. 세대 교체를 겪었다고 할까. 그때 나에 대한 시선은 여전히 늘 그런 거였지. 김혜수는 항상 하이톤에 건강미 넘치는 밝은 웃음만 보여주는, 영화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단면적이거나 이면적인 인간미를 찾아보기 너무 힘든 사람이 됐다는 걸 깨달았지. 어느 순간 내가 이지경이 됐구나, 그렇구나. 이런 좌절이 컸다.
스스로에게 가장 큰 변화를 제공한 건 <쓰리>가 아닐까 싶다. 조난실이 이해명을 만나 격변을 겪듯 본인도 <쓰리>를 만나서 어떤 변화를 경험한 것 같고 <얼굴 없는 미녀>로 확신을 찍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내적인 변화나 요동은 그 전부터 있었지만 그런 것들을 좀 다르게 보여줄 수 있었던 찬스가 <쓰리>였지. 그 지점은 분명해. 그리고 거기서 다른 어떤 불가해한 수렁으로 발을 내딛기 시작한 건 <얼굴 없는 미녀>가 맞고. 김지운 감독님이 자연스럽게 나에 대해서 다른 면을 보셨던 거 같다. 그렇다고 억지로 김혜수의 이런 면을 봐야겠다,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김지운 감독의 시나리오를 받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신라의 달밤>때문에 압구정에 있는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을 때, 매니저였던 성혜 씨가 내가 김지운 감독님 좋아하는 거 아니까 아래 층에 김지운 감독님이 계시다고 알려주더라. 사실 감독이나 배우가 먼저 가서 인사하는 게 어려운 건 자존심 상해서가 아니라 어렵기 때문이거든. 내가 이 감독님 좋아한다고 해서 그 감독님에게 굳이 찾아가 인사하는 게 조용한 분들에겐 부담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망설이다가 그냥 가서 인사 드렸는데 뭔가 메모하고 계시는 거다. 뭐하세요? 물으니까, 단편 준비해요, 하셨고, 그렇게 잠깐 이야기하고 다시 올라온 게 전부인데 나중에 그 단편 시나리오를 받게 됐다. 개인적으로 대학 때 단편 작업을 좋아했기 때문에 공포건 뭐건 상관없이 단편이라 좋았고, 김지운 감독님과 너무 작업하고 싶었으니까 어쩌면 시나리오 안보고도 했을지 모르지. 사실 단편이라 개봉할 줄도 몰랐다. 그게 한국, 홍콩, 태국 합작으로 만든 같은 테마의 옴니버스 프로젝트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고. 그런 건 상관없었으니까.
차기작에 대한 계획은 아직인가? 계획이 없다. 아직 못 정했다. 잘 안 들어오기도 하고. 그나마 다행인 건 몇 개월에 한번씩 간혹 들어오는 것들이 고민해보게 만든다는 거. 연기는 해야 되는데, 이러다 손가락을 빨면서 워크샵을 전전할 지도 모르지.(웃음)
최근 영화를 위주로 활동했던 배우들이 드라마로 진출하는 경우가 늘던데. 나쁜 것 같진 않다. 가뜩이나 시장도 좁은데 따질 필요도 없지. 배우는 연기를 하면 되는 거고.
예전엔 본인도 드라마에 많이 출연했다. 난 주로 드라마를 했었지. 배우는 지속적으로 연기해야 되는데 백 개를 해도 하나 잘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이거보다 나아지길 바라지. 그건 불가능해. 왜 <타짜>의 정마담을 못 뛰어넘냐, 사실 그런 각도에서만 본다면 더 이상 그 지점에서 연기를 하지 않는 게 옳다. 그런데 그건 아니지 않나. 그럴 수만은 없지.
그건 단지 다른 사람들을 통한 고민만은 아닐 거다. 스스로 느끼는 어떤 강박이 될 수도 있다. 평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도 내 인생을 통해 무언가 많은 것을 쏟아 붓는 일이기 때문에 그냥 정체돼있기만 하면 내 인생에도 의미가 없는 셈이지. 그걸 굳이 남들이 알아봐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일부로 남 모르게 하는 것도 아니고, 물론 너무 못 알아봐주면 그것도 좀 서운하겠지. 그런데 정말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다. 그리고 실은 그것보다 더 한 것도 해야 된다는 걸 이번에 배웠다. 이게 정말 다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서 또 다른 게 있더라. 그거 하나 이만큼 해내는 게 죽도록 힘들고 정말 이래야 하나란 생각이 들었는데 그래도 할 수 있구나, 해야 되는 구나, 라는 걸 알게 됐다. 물론 정말 그래서 뭔가 나아졌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나도 모르는 거고. 다만 그걸 해보자는 거고. 쉽지 않겠지. 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그림 실력이 대단하다고 들었다. 특별히 그 분야에 대한 공부를 했나?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다 보니까 하게 된 거지. 정규수업도 다 못했던 애가 미술공부를 어떻게 하겠어. 어쩌다 몇 년마다 가끔 한번씩 심심할 때, 그려볼까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거야. 장난 같은 거지.
배우 김혜수 외에도 인간 김혜수에 대한 욕심이 많아 보인다. 10대 중후반부터 20대까지 열심히 살았지만 맘껏 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강하게 남았나 봐. 욕심이 많다기 보단 그냥 놓치기 싫은 것들이 좀 많아. 그런 것들을 알게 된 뒤로 좀 안 놓치고 살려고 하지.
대부분의 사람은 시대적 변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들며 저항하기 보단 생존의 가능성을 먼저 본능처럼 익힌다. 1930년대 일제 치하 경성에서 살아가는 패망한 나라의 후손들 역시 그 환경에 천착해 살아가는 이가 대다수였을 것이다. 시대적 배경과 무관해질 수 없는 이분법의 운명론에 밀착한 인물들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기록되지만 실상 대부분의 이름없는 민중은 옷을 갈아입듯 자연스레 그 시대적 변화에 편입됐을 것이다. 다만 그 사이에 일제 치하의 권력에 밀착해 풍요로운 삶을 타전하는 이들이 존재했거나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고자 시대에 극렬하게 저항하는 두 부류의 극점 같은 존재들이 일부로서 존재했을 것이다. <모던보이>는 그 시대에 대한, 혹은 그 시대에 함몰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이지형의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를 원작으로 한 정지우 감독의 <모던보이>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되 인물에게 좀 더 복잡한 감정적 갈등을 부여함으로써 결말부를 철저하게 변주했다. 원작과는 판이한 양상으로 변주된 결말부를 위해 캐릭터도 재단됐다. 특히 원작과 전혀 무관하게 보이는 신스케(김남길)나 원작에 비해 내면적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조난실(김혜수)이 그렇다. 무엇보다도 패망한 조국의 역사에 심드렁하듯 조선총독부 1급서기의 직책을 수행하는 경성의 모던보이 이해명(박해일)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로맨스를 향해 사력을 다하지만 원작과 달리 마지막까지 적극적인 태도로 감정선을 고수한다. 오로지 낭만 그 자체를 추구하는 개인주의자가 아니라 로맨스에 취해 인생 전반을 소모하는 열혈순정파로 묘사된다.
경성 최고의 미남이자 낭만의 화신이라 스스로 자처하는 이해명(박해일)과 그의 마음을 뜨겁게 달군 묘연의 여인 조난실(김혜수)은 1930년 경성이란 시대상 속에서 개인과 시대라는 대립각을 이루면서도 서로를 탐닉한다. 오로지 로맨스를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이해명과 자신이 완수해야 할 시대적 과업을 위해 자신을 연모하는 남자의 순정마저 악용하는 조난실 사이엔 분명 시대라는 거대한 간극이 서로를 경계하듯 자리하고 있다. <모던보이>는 원작과 달리 냉소주의가 아닌 온정주의로서 개인을 조명한다. 조난실을 사모하던 이해명은 자신의 순정을 완성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소모하려 하고 개인의 숨겨진 욕구를 은밀히 드러내는 조난실은 끝내 자신이 이뤄내야 할 대의를 위해 개인의 삶을 폭파시킨다. 엄밀히 말하자면 <모던보이>는 이뤄지지 못한 로맨스에 대한 짙은 비애로 보호색을 띤 시대적 애도다. 단지 그것이 어느 한 쪽에 무게중심을 두지 않고 상호적인 시선으로 평형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텍스트를 이미지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캐릭터를 변모시키거나 보완하기도 했지만 이 모든 건 스토리의 폭을 증축하기 위한 것이다. 영화는 이야기의 출발점을 원작에서 묘사되지 않는 과거에 두고 이해명과 조난실의 인연이 어디로부터 시작되는지를 명백하게 밝힌다. 이는 문장의 형식을 기반으로 하는 소설보다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는 영화가 독자의 상상력을 활용하기에 불리하단 점에서 어느 정도 수긍할만한 해법을 찾았다고 할만한 대목이다. 다만 그 이후 기본적으로 소설의 플롯을 골격으로 둔 사연의 전환 과정이 종종 불완전한 문장처럼 단절된 맥락의 어색함을 드러내 보이곤 한다. 이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변환시키는 과정에서 잠재된 텍스트의 여백을 이미지가 갈무리하지 못한 까닭이다. 덕분에 <모던보이>는 전체적으로 원작이 그리는 굵직한 이미지를 연결하며 내러티브의 선을 이어가지만 종종 매끄럽지 못한 개연성을 드러낸다.
<모던보이>에서 크게 눈에 띠는 건 구시대적 바탕 위로 근대화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1930년대 경성의 기이한 풍경이다. 일제가 주도한 근대화 속에서 자주적인 풍속이 촌스러움으로 몰락하던 경성의 모더니티엔 이미지가 존재할 뿐 사상이 없다. 근대화로 위장한 제국주의적 정복의 야욕이 1930년대 경성을 기이한 풍경으로 재건한다. <모던보이>는 고증에 입각해 그 시대를 충실히 재현한다. 명동성당, 숭례문과 같은 1930년대 경성의 랜드마크를 전시함은 물론 CG와 세트를 동원해 스크린에 옮겨 담은 1930년대 경성의 아기자기한 풍경들은 그 자체만으로 괜찮은 볼거리다.
궁극적으로 <모던보이>의 야심은 그 변주된 결말에 자리잡고 있다. <모던보이>는 민족주의와 개인주의를 사이에 둔 줄타기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 소설의 비정치적인 냉소주의를 결단력 있게 비튼다. 어린 시절 일본인을 꿈이라 말했던 이해명은 결국 천황폐하신민이 될수 없는 꼭두각시의 삶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시대에서이탈한다. 그 과정만으로도 유쾌함과 처연함이 공존한다. 누가 모던보이를 시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나. 그건 사랑마저도냉소하게 만드는시대라는 운명이다. 마지막까지 낭만에 목숨을 건 모던보이의 비정치적 태도는 마지막 로맨스의 가시는 길을 더욱 처연하게 물들인다. 실로 의미 있는 결말이다. 조센징이거나 친일파거나. 시대가 그랬다. 어찌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나.
(씨네서울)
지인의 부탁으로 성신여대 방송실에서 배우론(?)을 짧게 녹음하게 됐다. 버리긴 아까워서 원고를 남긴다. 12명은 성신여대 방송실에서 선정했으며 그 기준은 대종상 수상자 명단에 두고 있다 한다.
원래 원고상에서는 경어체 문장을 썼으나 다시 문어체로 바꿨다. 배우는 가나다 순으로 나열됐다.
김윤진
한류스타로 불리고 있지만 이건 좀 어색하다. 언제부턴가 그저 해외에서 인기만 있으면 한류스타라고 부른다. 그 전에 미국에 한류가 있긴 하나? 실체 없이 너무 남발되는 용어다. 어쨌든 현재 김윤진은 <로스트>의 성공으로 자신의 이름을 전세계적으로 통용하는데 성공했다. <쉬리>의 흥행으로 관심을 얻었지만 그 이후로 그럴만한 행보를 보여주지 못했던 그녀가 해외에서 되려 성공해 국내에서도 관심을 얻었다. 이건 마치 국내에서 관심을 얻지 못하던 상품이 해외에서 인기를 끌자 국내로 역수입된 현상과 비슷한 거다. 그 이전에 그녀는 미국에서 오래 생활한 덕분에 영어를 잘한다. 이는 국내배우들이 해외활동을 함에 있어서 지닐 수 밖에 없는 선천적 장애를 설명하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언어의 장벽을 돌파하지 않고선 쉽지 않은 일이란 거다. 어쨌든 해외의 상종가는 최근 국내에서도 이어졌다. 그녀가 열연한 <세븐 데이즈>가 흥행했다. 지적인 변호사의 이미지와 절절한 모성애가 잘 융합됐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쉬리>에서 보여준 연기도 이중적인 태도였다. 아직 김윤진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증거는 부족하다. 그건 반대로 이 배우에게 볼만한 기대치가 아직 많이 남았을지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김혜수
건강미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육체파 배우에서 관능적인 이미지의 연기파 배우로 진입하는데 성공한 배우이자 명랑한 소녀의 이미지에서 성숙한 여인으로의 성장통을 잘 견뎌낸 케이스다. 사실 그녀는 성실하다.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라.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토록 꾸준한 활동을 보여주며 성장한 배우는 드물지 않나. 물론 건강미 넘치는 이미지로 소모되던 그녀가 섹스심벌로 자리를 잡기까지는 그녀의 파격적인 의상이 한몫 한 것도 있다. 하지만 2000년도에 들어서 그녀가 보여준 파격적인 변신은 상당히 눈부신 것이다. 그녀의 육체적 가치는 캐릭터의 완성도에 기여했다. <얼굴 없는 미녀>와 <타짜>에서 보여준 그녀의 모습을 보라. 팜므파탈이라는 용어로 간단히 정의될 수 있겠지만 노출만으로도 상당히 파격적이다. 결코 무모한 선택이 아니었다. 자신의 장점을 캐릭터에 반영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위치를 점하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은 헌신적이고 열의가 넘쳤다. 이 정도면 당연히 <좋지 아니한가>?
문소리
최근 드라마로 발을 넓히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녀는 영화배우로서 더 많은 걸 보여준 것이 확실하다. 그녀가 자신을 각인시킨 건 <오아시스>였다. 뇌성마비 장애인을 연기하는 그녀는 연기가 아니라 완전 장애인이 됐다. 실제로 그 영화를 보고 문소리가 실제 장애인인 줄 알았다는 사람도 많았다. 사실 그건 연기적으로 평가될만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면 말 그대로 묘기에 가까운 것이니까. 하지만 그 태도는 중요하다. 어떤 여배우가 그런 역할을 맡고 싶어할까? 게다가 그건 매우 고통스럽게 보인다. 차기작인 <바람난 가족>에서 그녀가 보여준 파격적인 노출도 헌신적이라 할만한 것이다. 그건 김혜수의 노출과는 다른 의미다. 김혜수의 육체가 자신에 대한 가치 증명을 겸한다면 문소리의 육체는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장면 그 자체를 위한 소품으로서 위치한다. 그녀는 배우로서 진검승부를 펼쳤다. 결국 오늘날 문소리라는 배우에 대한 신뢰도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게다가 그녀는 쉽게 말해서 소위 연기 잘 하는 배우다.
박중훈
정말 오랫동안 꾸준히 활동하는 배우다. 안성기와 함께 출연한 영화도 많다. 8~90년대 국내영화를 주름잡았던 배우이며 <마누라 죽이기>나 <투캅스>시리즈에서 보여준 능청스러운 입담과 표정 연기로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 영향력이 지나쳤던 것인지 90년대 이후 코믹한 범작들에 연이어 출연했고, 결국 그 이미지가 배우의 자질을 한정시켰다. <게임의 법칙>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를 생각한다면 그는 결코 코믹한 이미지로 한정돼선 안 되는 배우다. <세이 예스>에서 그의 진지함이 역설적으로 의도하지 않은 폭소를 유발한다는 건 비극적이다. 아이러니하지만 한 때 그렇게 됐다. <인정사정 볼것없다>는 그런 면에서 훌륭했다. 이 배우의 장점이 탁월하게 구현된다. 게다가 자신의 오랜 파트너 안성기와의 연기니 호흡도 좋았다. 몇 년 후 다시 안성기와 호흡을 맞춘 <라디오 스타>는 그간 한국영화가 이 배우를 소비했던 얄팍한 태도를 고심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올디스’를 ‘구디스’로 끌어올리는 건 배우의 능력이기도 하지만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의 몫이기도 하다. 박중훈 씨 같은 배우를 썩히는 건 정말 애석한 일이다.
설경구
캐릭터와 배우의 간극이 크지 않아 보이는 배우, 굳이 규정하자면 성격파 배우랄까. 최근작인 <강철중: 공공의 적 1-1>으로 이어진 <공공의 적>시리즈에서의 강철중은 어쩌면 설경구라는 배우의 이미지를 온전히 끌어들인 게 아닐까 싶은 인상이 강하다. 어딘가 삐뚤어졌지만 밉지 않다. 기본적으로 선량하다. 게다가 희극적이다. 인간미가 발생한다. 동물적인 본능으로 움직이는 인상이 강하다. 기본적으로 이 배우가 지닌 능동적 자질은 상당히 강렬하다. 덕분에 다소 경직된 캐릭터를 붙여놓으면 스스로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상도 나타난다. <공공의 적>과 <공공의 적2>를 비교해보자. 아무래도 전자가 좀 더 자연스럽다. 현재 그는 재난 블록버스터 <해운대>에 참여했다. 아마도 그 결과가 나오면 <괴물>의 송강호와 비교될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해보면 둘 다 동물적인 배우다. 다만 날 것의 느낌이 다르다. 설경구가 좀 더 맹수적인 느낌이다. 그것을 어느 정도 잘 다스리면서도 본인을 제약하지 않는 캐릭터를 선택하는 쪽이 그에겐 좋을 거 같다.
송강호
모든 역할을 자신의 캐릭터로 소화해내면서 중심을 잃지 않는 배우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연기력과 함께 어느 정도 흥행성이 보장되는 특이한 케이스이기도 하다. 어쩌면 과거 한석규의 바통을 이어받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송강호가 수렴할 수 있는 캐릭터의 너비가 한석규에 비해 광활해 보인다. 송강호는 분위기를 장악한다. 어떤 배역도 자신의 옷처럼 걸치면서 자신의 스타일대로 코디한다. 하지만 영화 자체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다. 미장센으로써 영화를 장악하기 보단 좋은 추임새를 넣는다. 함께 출연한 배우들에겐 둘도 없이 좋은 파트너가 될 거다. 문장의 형태를 해치지 않는 탁월한 수식어의 역할을 하는 덕분이다. 본인도 원톱보단 그런 역할이 더욱 편해 보인다. 박찬욱, 김지운, 이창동, 봉준호, 이런 기라성 같은 감독들의 러브콜을 끊임없이 받는 배우가 바로 송강호다. 어쩌면 이보다 더 좋은 설명도 없겠다.
이영애
애당초 ‘산소 같은 여자’라는 CF이미지로 떠오른 미인이다. 애초에 연기자 지망생은 아니었단 말이다. 그만큼 활동 초반엔 연기 못하는 배우 축에 꼈다. 그런 그녀가 오늘날 배우라는 프리미엄을 얻게 된 건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인식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럴 땐 조력자가 필요하다. 그 역할을 맡아준 사람이 박찬욱 감독이다. 만약 이영애가 <공동경비구역 JSA>에 출연하지 못했다면 과연 배우로서 반등할 수 있었을까? <친절한 금자씨>도 마찬가지, 성공적인 변신은 배우를 돋보이게 한다. 그것이 파격적일 때 위력은 더한다. 사실 그녀에게 인상적인 필모그래피는 그녀의 활동 시기에 비해 많은 편이 못 된다. 그리고 CF는 전지현만큼이나 많이 찍는다. 그래도 그녀를 전지현처럼 비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건 출연작마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명품의 가치를 창출했다. 기회를 얻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꿰차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요즘 누가 그녀를 산소 같은 여자라고 부르나? 전지현이 아직도 ‘엽기적인 그녀’에 머무르고 있음을 상기해보자면 이영애의 명품가치가 좀 더 실속 있어 보인다.
장동건
스타로서 상품성을 과시하지만 어느 정도 연기력도 인정받는 배우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사실 상품성의 가치가 더욱 돋보인다. 그것이 국내를 넘어서 해외로 나아가는 상황이란 점에서 가치가 더욱 높아지는 상황이다. 사실 그도 한때 연기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친구>를 통해서 완전한 입지를 구축했지만 그 전에 출연했던 <인정사정 볼것없다>가 더욱 주요했다. 쓰임새가 한정적이던 주연배우가 조연배우를 자청하며 무엇을 터득했을까? 파격적인 캐릭터를 입고 이미지를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 결과가 <친구>와 <해안선>이다. 그 큰 눈망울이 표독스러워졌다. 다들 거기서부터 장동건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 결국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 완전히 야심을 완성됐다. 다만 현재의 그는 그 이미지를 답습하고 있다. <태풍>의 최명신에서 그 표독스러움의 유효기간이 드러낸 느낌이다. 하지만 이 배우가 보여준 고민은 중요하다. 자신의 스타성을 과시하는 요즘의 젊은 배우들은 한번쯤 그의 모험적인 경로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요즘 배우들은 시도를 무서워한다. 어쩌면 김태희가 배우의 이미지를 얻고 싶다면 장동건의 필모그래피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장진영
사실 최근에 출연했던 대작 드라마 <로비스트>의 시청률이 부진했다. 게다가 몇 년 사이에 출연작의 흥행도 부진하다. 배우라면 분명 스트레스 받는 일일 테다. 사실 그녀의 출연작 중에 눈에 띄게 흥행한 작품은 <싱글즈>가 유일하다. 그런데 왜 이 배우의 이름이 이토록 영향력을 발휘할까? CF에서 그녀를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녀의 캐릭터가 상당히 눈에 선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싱글즈>이후로 그녀는 좀 더 자립적인 여성상을 연기하게 됐다. <청연>의 박경원과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연아까지, 그리고 흥행과 무관하게 연기는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연애, 참>을 통해서는 다양한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젠 파격이 무뎌진 시점에서 좀 더 내밀한 이미지가 필요하다. 그녀가 <소름>에서 보여준 연기를 최고로 꼽는 사람이 많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전도연
성장하는 배우의 얼굴이 어떻게 변모하는가를 증명하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국내에서 여배우가 극복해야 할 한계를 자신의 능력으로 돌파한 사례이기도 하고. <밀양>으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을 하기까지 이 배우가 보여준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라. 과감하면서도 영화에 지극히 헌신적이다. 캐릭터마다 몰입도 훌륭하고 자세도 진지하다. 솔직히 외모로 치자면 예쁜 배우는 아니겠지만 전도연은 분명 아름다운 배우다. 현재 연기에 대한 믿음 자체만으로 이만한 신뢰감을 부여하는 여배우가 누가 있나? 찾아보라. 전도연이 한국영화에서 차지하고 있는 무게감의 현재형은 그만한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그녀가 이렇게 성실한 필모그래피를 유지할지는 지켜봐야 알 일이다. 앞으로는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을 고르는데 좀 더 신중해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행보는 상당히 성실하면서도 훌륭하다. 박수를 받아도 마땅한 배우다.
최민식
최근 몇 년 사이 이 배우를 보기 힘들었다.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몇 년 사이 정치적인 제스처로 작품 활동이 어려웠다. 이 배우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는 건 그만큼 영화계의 손실이다. 이 배우의 주연작들을 보라. 대부분 쉽게 넘어갈만한 작품이 아니다. 그는 애초에 현재 활동하는 배우들의 이상이기도 했다. 현재 30대를 넘어선 배우들과의 인터뷰를 해보면 종종 최민식 씨의 연극을 보곤 했다, 는 답변이 나온다. 그의 얼굴은 수많은 감정들이 분출되는 화수분과 같다. 게다가 그의 연기는 언제나 고뇌를 동반한다. 고단하고 피로하면서도 끈질기다. 트라우마에 짓눌리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그저 웃고 넘긴다. 잡초처럼 생명력이 강한 인상을 탁월하게 남긴다. 그런 배우에게 3년 간의 공백이 생겼다. 누가 아쉬워야 하나? 그는 얼마 전 히말라야에서 전수일 감독의 새 영화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을 찍었다. 그는 히말라야에서 무엇을 보고 왔을까? 이 배우의 인생 자체가 어쩌면 드라마가 되고 있다 말할 수 있다. 그의 연기를 본다는 건 어느 한 사람의 인생을 짊어지는 것처럼 무거운 일이 될지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그걸 봐야 한다고 말하는 건 그 사람이 장인이라고 불려도 부끄럽지 않은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황정민
극단적인 이중성을 오가는 얼굴을 지녔다. 예를 들어서 <너는 내 운명>의 김석중과 <달콤한 인생>의 백사장을 비교해보라. 얼마나 극단적인가.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농촌총각의 얼굴에서 도시의 비정함에 찌든 갱단의 중역을 오가는 그 모습이 저마다 녹록하지 않다. 극단 목화 시절 무대에서부터 키워나간 경험적 내공이 상당한 덕분이겠지만 꾸밈새를 조금만 달리해도 이 배우의 인상은 극단적인 모습으로 돌변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그 중간 지점이 애매합니다. <검은 집>에서의 그는 뭔가 좀 망설이는 기분이 든다. 어느 한 쪽으로 무게중심을 잡았을 때 이 배우의 진가는 드러난다. 물론 복합적인 응용은 가능하다. <행복>에서 영수는 그런 케이스다. 정말 나쁜 놈이지만 삿대질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픽션의 상황에서도 현실적인 감정이입을 부른다. 그만큼 이 배우의 표정이 수많은 감정을 내포할 수 있는 그릇이란 의미이기도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