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남성용 피임약이 개발됐다는 사실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보단
남성용 피임약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남성용 피임약을 검색해보니 관련기사가
수두룩하다. 자세한 내용을 보니 ‘바살젤은 기존의 정관수술처럼
고환에 있던 정자가 외부로 나오는 길인 정관을 막아 임신 가능성을 낮추는 원리를 사용한다’라고. 다시 정리하자면 사정은 하지만 정자는 나오지 않는다는 듯. 그러니까
다운로드는 받았는데 폴더 안에 파일이 비었다고? 믿거나 말거나 과학적으로 어느 정도 실효성이 인정되고
있나 보다. 임상실험에서 12마리의 토끼가 피임 효과를 보였다고. 잠깐, 12마리의 토끼라니, 토끼? 아니, 왜 하필 토끼야? 너무
일찍 싸서 슬픈 동물 아닌가. 그래서 정자가 나올 틈도 없는 거 아닌가!
어쨌든 남성용 피임약이 그 목표대로 피임 외의 부작용만 없다면야 반대할 이유는 없을 거다. 일단 당장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임신’이라는 2음절을 넣고 검색해 보시라.
‘남친과의 섹스 중에 질내 사정이 의심되는데 임신을 한 건 아닌지’란 식의 물음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그러니까 왜 말을 못해. 이 콘돔이 네 콘돔이다! 왜 말을 못해! 콘돔을 끼우면 느껴지지가 않는다는 그 놈의 사정을
봐주다 임신을 하면 그 짐을 당장 무겁게 짊어져야 하는 건 아무래도 남자보다도 여자다. 섹스에서 콘돔
착용이라는 기본적인 피임을 거부한 남자의 책임보다도 그걸 허용한 여자가 짊어질 책임이 보다 막대하다. 그러니
확실하게 주장해야 한다. 꼴린 대로 덤비지 말고 씌우고 덤비라고. 그런
의미에서 남성용 피임약은 훌륭한 대안이다. 0.03mm의 초박형 콘돔조차 거부하는 남성의 예민함도 존중할
수 있는 미래가 열렸다.
이는 결국 남성에게 실로 좋은 일 아닌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는
윤동주보다도 섬세한 당신의 거시기에게 남성용 피임약은 링컨의 노예해방에 버금가는 업적이다. 물론 콘돔회사
사장님이 이 글을 싫어하겠지만 어쨌든 마실 물과 약만 있으면 마음껏 쌀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데 거부할 이유가 있는가. 게다가 잠깐의 쾌락에 몸을 떨며 멋대로 싸질렀다가 창창하던 미래를 계획에 없던 육아와 자식 부양으로 수렴하는
모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 질외사정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종종 당신의 사정은 당신의 머리보다
빠르다. 쾌감을 느끼고자 하는 본능이 미래를 생각하는 이성보다 강하다.
불과 10초 남짓한 쾌감과 예기치 않은 미래를 교환하는 건 지나친 기회비용이다. 그리고 그 10초 남짓한 쾌감을 보다 생생하게 느끼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겠다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먹으면 된다. 남성용
피임약을.
물론 남성용 피임약은 아직 시판 전이다. 우리는 토끼가 아니므로 아직
남성용 피임약을 먹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 그것이 나온다 해도 머뭇거릴 이유는 없다. 아마도 그것은 당신의 사정에 해롭지 않을 것이다. 호르몬 조절을
통해 피임을 유도하는 여성용 피임약에 비해서도 그것은 훨씬 안전하다. 그저 당신의 정자가 나갈 길을
막는 문지기를 잠시 추가하는 것뿐이다. 적어도 임상실험에 성공한 남성용 피임약이 증명한 이론은 그렇다. 당신을, 아니 당신의 쾌감을 해치지 않는다. 그러니 그날이 오면, 삼켜라. 그럼
느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사정에 건배를.
(GRAZIA KOREA JUNE FIRST ISSUE 2016 'GRAZIA COLUM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