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 노는 게 중요하다고.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고.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놀이들을 말할 땐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행복해 보였다.
최근에 유행했던 ‘아이스버킷 챌린지’에 두 번이나 초대받았다.
처음엔 진의함이란 대만 배우가 지목해서 했던 거라 진가신 감독이나 장학우 같은 중국의 지인들을 다음 주자로 초대했다. 그런데 나중에 (황)정민이 형한테 문자가 왔다. “야, 너 해야 돼!” 나를 지목했더라. 그래서 한번 또 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좋은 일이니까 상관없겠더라.
아이스버킷 챌린지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위한 일이긴 하지만 우울하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의미를 알고 하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지만 의미를 모르고 하는 사람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즐겁게 확산되면 좋겠다.
진가신 감독의 <퍼햅스 러브>를 비롯해서 몇 편의 중화권 영화에 출연한 경험이 있다.
작년에도 한 편 찍었고, 올해도 한 편을 더 찍었다. 찾아주니 고맙지. 예전부터 합작영화를 몇 번 했는데 넓은 세상에 나가서 멋진 사람을 만나게 되면 기분이 좋지. 장학우 씨나 진가신 감독은 어릴 때부터 존경했던 분들이라 신기했다. 정말 영화배우 보는 느낌?
아시아에선 <대장금>이나 <동이>의 인기가 상당해서 알아보는 사람도 적지 않겠다.
그래서 족쇄라는 생각도 든다.
족쇄라니, 어떤 의미인가?
이런 관심을 받는 걸 부러워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건 그만큼의 책임감이 따르는 일이기도 하다. 사실 외국에선 사람들의 관심을 떨쳐버리고 쉬고 싶은데 요즘은 한국 사람들도 여행을 많이 다녀서 마냥 그럴 수도 없다. 그런데 외국인들까지 알아보면 정말 가끔씩은 힘들기도 하다. 물론 뭔가 이상한 짓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냥 편하게 쉴 수 있는 느낌이 사라지니까.
아이스버킷 챌린지에 초대한 진의함이란 배우와는 최근에 <두 도시 이야기>란 영화로 호흡을 맞췄다고 하던데.
후시 녹음만 남았다. 북경에서 할 예정인데 한국을 오가면서 프로모션도 진행할 예정이다.
김태균 감독이 연출을 했다고 들었는데 한국영화인가?
중국영화다. 진의함 씨 외에 진학동이라는 중국 배우가 나오고, 원더걸스의 혜림이도 출연한다. 사실 대본도 완벽하게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제안이 왔는데 김태균 감독님의 전작이 마음에 들어서 수락했다. 3개월 가량을 기다리는 동안 감독님이 중국을 오가면서 대본을 수정하고 배우 캐스팅을 진행했는데 촬영은 불과 1달 반 만에 끝났다. 기적이라고 생각했지. 장마기간인데도 날씨까지 좋았으니까. 최근에 1차 편집본을 봤는데 만족스러웠다. 한 시간 정도를 들어내야 한다지만 완성도가 있었다.
<두 도시 이야기>라니 두 도시를 오가는 건가?
한국 제목은 그렇지만 원래 중국 제목은 <탁혼연맹>이다. ‘혼인을 방해하기 위한 연맹’이란 뜻이다. 남동생의 결혼을 막으려는 중국 여자와 딸의 결혼을 막으려는 한국의 ‘돌싱’ 아빠의 관계가 진전되는 내용이다. 북경은 처음에 잠깐 오가는 정도만 촬영했고 95%정도를 부산에서 촬영했다. 나는 한국 사람이지만 전 아내가 화교로 설정돼서 중국말을 할 수 있다는 설정이었다.
중국이 아닌 한국에서 중국 배우들과 중국어로 연기를 한다는 게 색다른 기분이었을 거 같다.
신기하지. 중국에서 중국어로 하는 건 당연하지만 한국에서 중국어로 대사를 하니까 묘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부산이란 도시가 독특하더라.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느낌이랄까. 과거의 향수와 최첨단의 풍경이 공존해 있다. 게다가 바다도 있고. 영화 찍기 좋은 도시였다. 지금껏 부산을 오가면서 느끼지 못했던 바를 이번에 많이 느꼈다.
지금 촬영 중인 작품은 한국영화라고 들었다.
아직 가제이긴 한데 <여름에 내리는 눈>이란 옴니버스 영화다. 두 복서의 우정도 있고, 매니저와 여배우의 이야기도 있는데 나는 아버지와 딸에 대한 이야기다. 눈물을 참기 힘들만한 이야기다.
한국영화는 오랜만이다.
그렇지. 해외영화만 두 편을 찍고 나서 처음이기도 하고.
그런데 영화 <점쟁이들>의 원안자라던데?
그 영화를 기획한 장원석 PD와 정말 친해서 자주 만났는데 한번은 태국에서 친해진 가이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해줬다. 한국의 점쟁이들이 태국 관광을 왔는데 갑자기 버스 안에서 난리가 났단다. 갑자기 웃고, 울고, 춤추고, 소리 지르고. 나중에 진정되고 이유를 물어보니 방금 지나간 터가 좋지 않아서 잡귀들이 몸에 들어와서 그랬단다. 그래서 나중엔 그 터를 피해서 다녔다더라. 이 얘기를 듣더니 자기가 영화화하고 싶다고 원안으로 사겠다는 거다. 대신 뭘 원하냐고 해서 레고나 두 개 사달라고 하니까 레고를 우습게 알았는지 100개도 사줄 수 있다는 거다. 어쨌든 <스타워즈>에 나오는 ‘밀레니엄 팔콘’을 사달라고 했다. 결국 중고로 하나 사주더라. 영화가 잘되면 더 해준다더니 아무래도 잘 안됐나 보다(웃음). 원래 카메오 출연도 요청 받았는데 일정상 힘들었다.
레고 매니아로 알려져 있는데 재미를 붙인 계기가 궁금하다.
뭐든 만드는 걸 좋아해서 예전부터 관심은 있었지만 직접 하게 된 건 아들이랑 같이 놀 수 있는 걸 고민하다가 찾은 게 레고였다. 애가 뭔가 만지작거릴만할 때부터 같이 만들자고 레고를 사줬다. 그러니까 한 8년 이상은 된 거 같다.
아들도 좋아하나?
완전 좋아하지. 애하고 같이 노는 데엔 레고가 최고다.
그런데 단순한 취미라고 말하기엔 수준이 상당하더라.
레고로 못하는 게 없더라. 언젠가 레고로 집도 짓고 싶다. 가능성이 충분하다. 브릭(brick)이 얼마나 있는가가 문제지. 쌓기만 하면 된다. 물론 기본적으로 머리도 써야 하고.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기도 했지만 일상에서 쓸 수 있는 걸 만들고 싶었다. 테이블이나 의자 같은. 그런데 브릭이 너무 많이 필요하다. 그것 때문에 당장 브릭을 사기도 그렇고, 일단 작은 것부터 시작해보자는 마음으로 우리집 대문의 번호판을 레고로 만들어서 붙였다. 그러니까 애들이 너무 좋아한다. 나갈 때 한번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들어올 때 한번 보면 또 기분이 좋아진다. 사실 아내는 처음엔 창피하다고 싫어했지만 결국 좋아하더라. 일상에서도 레고를 많이 써보고 싶다.
신세계백화점 본점을 레고로 만드는 이번 프로젝트 제안은 어떻게 받게 됐나?
신세계 관계자와 친분이 있던 지인 중 한 명이 우연히 이야기를 듣고 나를 추천했다. 그래서 연락을 받고 나가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브릭을 확보할 기간이 필요했고, 사이즈를 고려한 설계와 제작에 들어갈 시간도 절충할 필요가 있었다.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팀이 있던데.
활동한지 2년 정도 됐다. 레고와 관련된 걸 찾다가 포털사이트 카페에도 가입하게 됐는데 카페를 돌아다니다가 지금의 멤버들을 만나게 됐다. 사실 같은 커뮤니티에 있다고 해서 마음이 다 맞긴 어렵다. 그 안에서 의견이 맞는 사람 몇 명끼리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관심이 생겨서 함께 하고 싶다고 의사를 표현했고 꾸준히 참여하게 됐다. 서울역에서 전시도 하고, 3년째 레고 벼룩 시장을 여는데 그것도 꽤 커졌다. 지금은 덴마크에 있는 레고 본사와 직접 소통할 정도다. 심지어 좀 더 저렴한 가격에 브릭을 우선적으로 살 수 있는 우선권도 준다. 나름대로 공헌도를 인정 받은 거랄까.
아무래도 외국에 나가면 레고 가게는 꼭 들르겠다.
너무 멀지만 않으면 시간되는 대로 무조건 간다. 그전에 카메라에 관심이 있을 땐 카메라를, 피규어에 관심이 있을 땐 피규어를, 다이캐스트 미니카를 보러 다녔다. 그런 게 있으면 좋다. 여행가서 쉬는 것도 좋지만 어떤 한가지를 선택해서 찾아 다니면 재미있다. 이런 계획이 있으면 어딜 가든 즐겁게 할 수 있다.
사실 레고와 가까워 보이는 이미지는 아니다.
아무래도 점잖게 보이는 면이 많았으니까. 사실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레고를 좋아하는 모습이 나온 것도 작가가 뭐하고 노냐고 물어보길래 레고하고 클라이밍이라고 하니까 다 반영된 결과다.
취미가 있다는 것도 좋지만 이를 통해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겠다.
사실 레고는 혼자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좀 더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만들고 보면 뿌듯해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도 분명 있지. 그런데 그걸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은 드물다. 우리가 1년에 한두 번씩 전시를 여는데 가끔 카페에 올라온 게시물을 보고 우리가 연락해서 전시 의향을 물어본다. 사실 처음에 모였을 땐 쪽팔렸다. 카페에서 다같이 레고를 만들고 있으니까(웃음).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도 있고, 하다 보면 즐겁다. 게다가 성격이 나쁜 사람은 없다. 모난 사람은 가끔 있어도(웃음).
연예인이 모임에 등장하니까 놀라는 사람은 없었나?
처음엔 다들 나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런데 모임에 처음 나왔을 땐 놀라더니 이젠 자연스러워졌다. 서로 편해진 거지. 사실 이런 카페 모임에선 서로 자신을 닉네임으로 소개하는데 나는 그냥 닉네임을 내 본명으로 썼다.
한 가지에 꽂히면 깊게 파고 드는 편인가 보다.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술을 안 마실 수가 없잖아. 요즘은 그나마 좀 바뀌고 있다지만 불쌍한 거다. 술을 마시면 다음날 피곤하고 일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사실 술값으로 할 수 있는 취미가 많다. 대단히 생산적이고 다음날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돕는 가지. 게다가 가족이랑 같이 놀기도 좋다. 이런 걸 알리고 싶었다. 클라이밍을 하는 것도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해서 알리고 싶었다. 술만 마시는 게 다가 아니다.
술 외에 대안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불쌍한 거다. 자신이 해보지 못한 걸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대학을 가는 게 목표이고, 결국 대기업에 가거나 공무원이 되길 바라는 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영문과든, 국문과든 상관없다.
아무래도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게 되니까.
사실 요즘은 대기업에서 잘리기도 하잖아. 그러니까 제2의 대안을 세워야지. 이젠 100살까지 산다는데 나이 60에 정년 퇴직하면 남은 세월은 어떡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취미는 그래서 중요한 거란 말이지. 더 이상 돈만 많이 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늙어서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나이를 먹어서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도 요즘은 작은 가게들이 많이 생겨서 좋다.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겠지만 큰 욕심을 버리고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적당히 먹을 만큼만 벌겠다는 시도가 보인다. 앞으론 그런 것들이 많이 생길 거다.
한땐 어른이 레고 같은 걸 갖고 놀면...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했지.
그런 면에선 우리사회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건강한 방향이다. 무엇보다 다양해져야 된다. 다들 레고하자는 말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생각이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달라야 한다. 같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쌍둥이로 태어나도 같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린 획일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다 같아야만 했던 거다. 똑 같은 공식을 외우고 정답을 맞춘 사람이 앞으로 가고, 말도 안 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거다. 남들 다하는 건 해야될 거 같고, 남들이 웃으면 따라 웃어야 될 거 같고. 하지만 그건 내 삶이 아니란 거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사실 외동아들이었는데 어렸을 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생각하는 게 취미였다.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그리고 뭔가를 생각하면 ‘그건 왜 그럴까?’라는 생각에 빠져드는 거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문득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데 ‘나는 내 이름을 남길 수 있을까?’ 싶었다. ‘이름을 못 남기겠구나’라고 생각하니 너무 절망적이었다. 그럼 가죽이라도 남기자. 그래서 시신 기증하기로 하고, 그랬더니 좋은 가죽을 남기자는 마음이 생기더라. 그래서 좋은 생각을 하려고 했고 결국 그런 생각이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된 거다.
우려와는 달리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됐는데.
아주 조금?
막상 비관적이라고 오해 받을 가능성도 있을 듯한데 결과적으론 대단한 긍정주의에 가깝다.
굉장한 긍정이지. 나는 긍정의 힘을 믿는다. 내가 처음에 연기를 시작할 때가 서른 살 즈음이었는데 장점이 하나도 없었다. 죄다 단점이다. 나이 많지, 인맥 없지, 연기 경험도 없지, 관심도 없지. 그럼 내 장점은 뭘까? 공예나 디자인이나 사진 찍어본 사람은 나뿐이지. 게다가 난 지금 바닥이니까 떨어질 일이 없어. 올라갈 일만 남았지. 이 정도면 대박이지.
결국 나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게 중요하다는 말 같다.
나를 알아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나를 모르면 허황된 행복을 추구한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걸 기대한다. 왜? 나를 모르니까. 항상 뭔가 부족해. 만족이 안돼. 그럼 절망적이지. 결국 나를 모르니까 그런 거다. 내게 어울리는 만큼 갖는 거다. 그럼 만족감도 희열도 생긴다. 그런데 이만큼을 더 갖게 됐다? 그건 더 행복해지는 거지.
그만큼 감당할 수 없게 소유욕이 늘어날 수도 있다. 수단과 목적이 전도될 수도 있고.
그게 문제다. 쉽게 망각을 한다. 그러니 늘 뒤돌아보고 체크를 해야 된다. 그래야 바닥으로 떨어져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언젠가는 다시 떨어지기 마련이다. 나이가 들면 죽는 것처럼 당연한 진리다. 진리를 거스르게 만드는 건 욕심이고 화다. 결국 그렇게 망가지는 거다.
언제나 최악을 대비하는 사람 같다.
물론이다. 늘 죽음을 생각한다. 언제 길을 걷다가도 떨어지는 간판에 맞아서 죽을 수도 있는 거니까. 다만 늘 후회하지 않도록 나를 위해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거지.
결론은 긍정적이지만 그 결론에 닿기까지의 사고의 과정은 비관에 가깝게 들린다.
긍정적인 생각은 중요하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정확히 모르는 긍정주의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어쨌든 행복해 보인다. 그전에 자신이 행복해지는 법을 잘 찾은 거 같고.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건 결국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장치가 다양하다는 거다. 그러니까 다들 그런 장치들을 마련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이런 장치들을 인정해달라는 거지. 그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 주변 사람들도 행복해질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셈이니까. 누구나 내 가족이 행복해지길 바라잖아. 결국 내가 행복해야 그럴 수 있는 거다.
(ELLE KOREA OCTOBER 2014 NO.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