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헴스워스는 지루한 캐릭터에서 벗어나고자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천둥의 신이 됐다. 그리고 이젠 두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배우임을 증명할 차례다.
잘 알다시피 할리우드 영화란 단순히 미국 영화가 아니다. 전세계 어디에서든 극장이 있는 곳이라면 할리우드 영화를 상영한다. 전세계의 배우들이 할리우드 진출을 동경하는 건 야구 선수가 메이저리그를 꿈꾸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특히 영어권 국가의 배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영국과 캐나다 배우들의 할리우드 진출 역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할리우드 배우의 산실 노릇을 하는 국가론 호주 역시 빠지지 않는다. 고인이 된 히스 레저를 비롯해서 멜 깁슨, 휴 잭맨, 러셀 크로, 케이트 블란쳇, 나오미 왓츠, 니콜 키드먼, 에릭 바나, 그리고 샘 워싱턴까지, 할리우드를 주름잡는 이 이름의 주인들은 모두 호주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 리스트에 추가해야 할 이름이 하나 더 있다. 크리스 헴스워스, 그는 ‘아스가르드’가 아니라 호주에서 태어났다.
“나는 척박한 시골의 가정에서 두 형제들과 함께 자랐다. 우린 끊임없이 무기나 요새 같은 것을 만들며 놀았지만 액션 히어로가 되려고 했던 건 아니다.” 헴스워스는 멜버른에서 태어났다. 어느 어린 아이들처럼 자연스럽게 ‘슈퍼맨 흉내를 내면서 집 주변을 뛰어다니며’ 성장했다. 하지만 20대가 넘은 나이에 거대한 망치를 휘두르는 신을 연기하기 위해서 히어로가 등장하는 만화책을 펼쳐보게 될 일이 생길 거란 예상 역시 해본 적이 없었다.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직원들로부터 <토르>의 카피본이 무더기로 쇄도할 줄을 몰랐다. 할리우드의 이방인에서 세계적인 스타로 단숨에 도약할 수 있으리라 상상해본 적은 더더욱 없었을 거다.
대자본이 투여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심지어 마블 엔터프라이즈의 야심찬 프로젝트인 <어벤져스>(2012)로 향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대작의 얼굴로 낯선 배우를 내민다는 건 일종의 모험이다. 확신이 필요하다. 이런 경우엔 대부분 프로젝트를 좌우하는 큰 손의 보증이 있기 마련이다. <어벤져스>의 감독이기 전에 이미 유능한 제작자이자 각본가였던 조스 웨던은 <토르: 천둥의 신>(2011)의 메가폰을 잡은 케네스 브레너에게 크리스 헴스워스를 추천했다. 담보는 자신이 각본에 참여하고 제작했던 <캐빈 인 더 우즈>(2012)였다. 2009년에 촬영을 완료했지만 2012년에서야 개봉되어 큰 인기를 얻었던 이 작품은 대단히 파멸적이고 끔찍한 세계관을 재기발랄한 풍자와 위트로 승화시킨 컬트작이었으며 조스 웨던이 제작과 각본을 담당했다. 그는 이 영화의 출연자 중에 한 명이었던 크리스 헴스워스를 눈 여겨 봤고, 토르의 망치 ‘뮬니르’의 주인이 되리라 믿었다.
“육체적으론 어렵지 않았다. 그저 체육관에 머물면 되니까. 가장 큰 어려움은 나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안소니 홉킨스나 나탈리 포트만과 함께 거대한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기회를 꿈꿨지만 비로소 다다랐을 땐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사실 헴스워스가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건너온 건 그에게 어떤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본격적인 연기 경력은 2004년 호주 시드니에서 촬영했던 연속극 <홈 앤 어웨이>를 통해서였다. 그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3년 반 동안 똑같은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건 매우 지겨웠다. 항상 불이나 태풍, 헬리콥터의 충돌, 비행기 사고 따위에 휘말렸다. 드라마틱한 죽음을 소원하게 됐다.” 결국 새로운 계기를 찾아 LA로 건너온 그는 가까스로 <스타트렉: 더 비기닝>(2009)에서 작지만 중요한 단역을 따낸 뒤, 그저 그런 몇 편의 경력을 전전하다가 ‘인간 이상의 존재’로 발탁됐다. 드라마틱한 죽음 대신 고전적인 비극의 요소를 품은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토르: 천둥의 신>과 속편인 <토르: 다크 월드>(2013)는 여러 모로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두 작품의 메가폰을 잡은 이들의 면모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토르: 천둥의 신>의 감독은 <햄릿>(1996)을 연출했던 배우 출신 감독 케네스 브레너다. 실제로 그는 크리스 헴스워스에게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를 던져주며 토르의 모티프를 찾길 요구했다. <토르: 다크 월드>의 메가폰을 잡은 건 미니시리즈 <왕좌의 게임>을 연출한 앨런 테일러다. 고전적인 엄숙함과 중세 왕정기의 야만성이 교차하는 <왕좌의 게임>은 그 자체로 역설적이고 필연적인 운명이 뒤엉킨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연상시키는 판타지물이다. 이는 곧 <토르>라는 작품을 꿰뚫는 핵심이 셰익스피어의 코드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 서로 다른 핏줄을 안고 태어나 반목하는 토르와 로키 형제의 멜로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시리즈에서 고전적인 중후함과 연민을 자극하는 깊은 눈매를 지닌 헴스워스가 갈등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는 건 결과적으로 적절해 보인다. 단순하지만 강인하게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가면서도 내면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남성적인 매력은 토르라는 캐릭터 자체에 대한 신뢰로 이어진다.
<토르: 천둥의 신>과 <어벤져스> 그리고 <토르: 다크 월드>까지, 크리스 헴스워스라는 배우를 이야기할 때 토르를 제외한다면 할 말이 없어지는 건 사실이다. <백설공주>를 모티프로 기획된 액션 판타지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2012)에서도 특별한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말하기란 어렵다. 그런 면에선 존 하워드가 연출한 <러시: 더 라이벌>(2013)이 오히려 특별한 경력에 가깝다. F1의 왕좌를 두고 경합을 벌였던 전설적인 라이벌에 관한 실화를 다룬 이 작품에서 헴스워스는 할리우드 진출 이후로 출연한 주연작에서 처음으로 현실적인 캐릭터를 연기해낸다. 비현실적인 혹은 초현실적인 세계관을 거치며 우직한 선의로 무장한 채 악과 맞서 싸웠던 것과 달리 누군가를 이기겠다는 사적인 욕망을 표현한다. 새로운 가능성이 발견되고 연기의 범위가 확장된다.
물론 그는 한동안 하늘을 날고 거대한 망치를 휘두르며 세계를 구하는데 여념이 없을 것 같다. 2015년에 개봉될 예정인 <어벤져스>의 속편 이후로도 이 슈퍼히어로의 세계는 오랫동안 유지되고 확장되며 전세계 관객을 사로잡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헴스워스의 세계도 점차 확장될 예정이다. 선악의 경계가 불분명한 범죄물의 대가 마이클 만의 신작에 출연한 그는 실화를 스크린에 옮길 예정인 론 하워드의 새로운 신작에 또 한번 참여한다. 신계와 인간계를 오가는 바쁜 스케줄을 소화할 예정이다. 신이라 불린 사나이, 크리스 헴스워스가 두 발을 딛고 설 진짜 세계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