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저메키스'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5.10.30 <하늘을 걷는 남자>를 보고
  2. 2009.11.19 <크리스마스 캐롤>답보적 기술의 맞춤형 효과
  3. 2009.11.09 <크리스마스 캐롤> 단평

<하늘을 걷는 남자>는 말 그대로 하늘을 걸었던 남자 펠리페 페팃에 관한 영화다. 그는 1974년 뉴욕 세계무역센터, 즉 쌍둥이 빌딩이라 불리던 그 고층건물 두 동의 110층 옥상에 나란히 와이어를 매달아 그 위를 걸었다. 이는 2008년에 공개된 다큐멘터리 <맨 온 와이어>에서 영상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두 영화를 나란히 감상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맨 온 와이어> <하늘을 걷는 남자>가 얼마나 사실적인 근거를 바탕에 두고 영화화된 작품인가를 증명하는 기록적 그림자에 가깝다. 고로 두 작품을 교차해 볼 수 있다면 상당히 입체적인 감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맨 온 와이어> <하늘을 걷는 남자>가 그 대단한 경험을 기록한 사실에 기반한 영화라는 육체적 증거가 될 것이다. <하늘을 걷는 남자> <맨 온 와이어>가 기록하지 못한 감각을 객석에 전이시키는 영혼적 증거가 될 것이다. 같은 것을 보고 있지만 다른 것을 느낄 것이고 궁극적으론 깊고 너른 감흥을 얻게 될 것이다.

사실 <하늘을 걷는 남자>의 영화화 계획이 발표됐을 때, 3D 입체 영상의 장인인 로버트 저메키스가 이 영화에 혹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110층 높이의 빌딩 꼭대기에 설치한 와이어 위에 선 남자의 주변부를 채우는 뉴욕시의 풍경만큼이나 광대한 원근감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하늘을 걷는 남자>는 단순히 3D 입체 영상을 위시한 볼거리에 국한된 영화가 아니다. 객석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 관객과 스크린 사이의 안전한 경계를 무마시켜 버리는 체험으로 수렴시키기 위한 마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실화를 바탕에 둔 영화이길 넘어 기록을 읽던 관객을 기록의 현장으로 세워버리고자 하는 체험으로서의 영화에 가깝다. 와이어에 선 필리페 페팃이 줄에 서는 그 순간에 느낄 수 있었던 그 심정에 포개질 순 없겠지만 그 줄에 선듯한 기분을 공유할 수 밖에 없는 광대한 숏 앞에서 경건한 긴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시각적 스릴을 넘어선 육감적인 떨림. 그 지점에서 이 영화는 어떤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무엇을 보는가. 무엇을 겪는가. 무엇을 체험하는가. 그리고 그런 질문을 받을 때 우리는 영화의 영혼을 느낀다. <하늘을 걷는 남자>에선 그런 영혼이 느껴진다. 뉴욕에서 필리페 페팃의 곡예를 본 사람들이 느꼈을 기적적인 감동. 영혼을 지닌 영화는 그런 감동을 전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을 나는 남자>는 단순히 볼거리로서의 영화가 아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단순히 뉴욕 세계무역센터 꼭대기를 와이어로 건너는 남자의 이미지만으로 언급될 만한 작품도 아니다. 어떤 영화는 남다른 모험담을 묘사하며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지를 논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런 모험 아래 놓인 모두를 모험하지 않는 인물로 규정하기도 한다. <하늘을 걷는 남자>는 결국 필리페 페팃의 도전기를 다루지만 그것이 우리 모두가 본받을만한 어떤 경지처럼 떠받들지 않는다. 반대로 누군가가 행한 그 모험이 대다수의 사람에 게 어떤 감동과 흥분을 줬는지 표정을 읽게 만든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란 것이 줄 수 있는 감동에 대해서 역설한다. 우린 대부분 영화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 없을 것이다. 그게 당연하다. 그래서 우린 영화를 본다. 다행히도 영화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같은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린 모두 이 세상의 중심에 설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세상의 중심에 서지 않아도 좋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어울리는 영화도 있을 것이다.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에겐 저마다를 위한 영화가 필요할 뿐이다. 고로 영화는 존재한다. 고로 우린 영화를 본다. <하늘을 걷는 남자>는 바로 그런 영화의 존재를 되묻고, 되짚게 만드는 영화다.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그 시대의 공기를 호흡하게 만든다는 것이기도 하다. 필리페 페팃은 자신의 행위가 쿠데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조력자가 되길 자처하는 이들은 하나 같이 기꺼이 그 흥분에 동참한다. 그 시대는 워터게이트로 닉슨의 광기가 절정에서 내려오는 시대였고, 히피들의 전성기가 지났지만 반체제적인 자유와 평화의 여운이 마지막 그림자를 드리우던 시대였다. 어떤 의미로든 무언가 한 시대가 지나가는 징후가 나타나던 시대였다. 그 시대의 끝에서 뉴욕 한복판에 110층 높이의 세계무역센터가 건설됐다. 하나도 아닌 둘 씩이나. 사람들은 땅으로 내려온 필리페 페팃에게 말한다. "다들 저 타워가 마음에 든대. 네가 저 타워에 숨을 불어넣었어." 나는 문득 김춘수의 시 <>이 생각났다. 펠리페 페팃은 완공 직전의 세계무역센터에서 하늘을 걸었고, 이는 결국 이 빌딩을 물리적 랜드마크 이상의 영혼적 상징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일이 됐다. 그리고 다시 그 형체를 스크린에 소환할 수 있는 사연이 됐다. 지금은 사라진 그 두 빌딩이 나란히 선 풍경을 스크린에서 목도하는 건 결국 사라진 이름을 다시 되새기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이 결국 불리어지지 않더라고 이름이 존재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일일 것이다. 완전히 다른 영화지만 마찬가지로 세계무역센터를 마주한 채 엔딩크레딧을 올리는 스필버그의 <뮌헨>과 유사한 여운이 남는 것도 그래서다. 영화를 통해 가능한 마법이란 이런 것이기도 하다. 사라진 시대의 공기 속에서 호흡하고 잊혀진 것을 다시 제 자리로 돌려 놓는 소환술. 물론 모든 영화가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영화는 그럴 수 있다. <하늘을 걷는 남자>는 바로 그런 영화다. 하늘을 걷는 남자와 함께 그 시대를 걷고 호흡할 수 있는, 마술적 체험의 영화. 마음이 벅차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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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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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그것까진 알 수 없지만 이거 하난 확실하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디지털 캐릭터의 꿈을 꾼다. <폴라 익스프레스>이후로 3D디지털 이미지에 심취한 저메키스는 이제 더 이상 실사적 세상을 뷰파인더로 관찰하지 않는다. 북유럽 영웅 서사시 <베오울프>에 이어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을 디지털 양각의 세계로 구현한 저메키스는 이제 디지털 세계의 조물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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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그건 몰라도 이건 확실하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디지털 캐릭터의 꿈을 꾼다. <폴라 익스프레스>이후로 디지털 캐릭터와 3D비주얼에 올인 중인 로버트 저메키스는 북유럽 영웅 서사시를 디지털 이미지로 구현한 <베오울프>에 이어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을 디지털 부호로 재생시킨다. 지독한 구두쇠로 악명을 떨치는 스크루지(짐 캐리)가 자신이 혐오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7년 전 사별한 동업자 말리를 만나게 되고 그 이후로 3명의 유령을 만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게 된다는 플롯은 저메키스를 통해 환상적인 디자인을 입고 재생된다. 배우의 실제적 외모를 스크린의 디지털 캐릭터에게 이양하려는 것처럼 보였던 <베오울프>의 편집증적인 시도와 달리 <크리스마스 캐롤>은 디지털 캐릭터의 특성 안에 실제 배우의 외모를 함몰시켜버린다.

전자가 디지털 부호를 통해 현실을 가상에 안착시키기 위한 극사실적인 전이적 실험이었다면 후자는 디지털 부호를 통해 현실적 형태를 지워내고 새롭게 창조된 가상적 리얼리티를 극대화시킨 변환적 실험에 가깝다. 전자가 재생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술을 활용했다면 후자는 창조를 위한 수단으로서 기술을 활용한 셈이다. 이는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을 만한 성공적 방식이다. 디지털 캐릭터에 대한 혐오를 의미하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조차도 음울한 영화의 톤에 어울리는 효과처럼 인식될 정도로 <크리스마스 캐롤>은 허구적인 가상성에 어울리는 디지털 캐릭터의 음산함을 구축하고 이미지의 입체적 환상성을 적절히 활용한다. 다만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3D비주얼이 필수적인 의상인가를 염두에 둔다면 그것이 때때로 과욕적 활용처럼 보인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때때로 입체적 이미지로서 탁월한 감상을 부여할만한 장면들이 존재하지만 그 전체적인 형태가 과도한 시각적 피로감과 맞바꿀 만큼의 기회비용을 설득하는 것으로 가득 채워진 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로버트 저메키스의 이상이 단순히 <크리스마스 캐롤>에 대한 맞춤형 효과로서 3D 비주얼과 디지털 캐릭터를 활용했을까, 라는 의문도 동원될 필요하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실험은 여전히 과도기이며 때때로 그것이 집착을 넘어서는 발전적 지향이라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답하기 쉽지 않다. 결과적으로 그 도전적 의지를 존중할 수 있는가, 라는 지점에서 로버트 저메키스의 꿈 역시도 판단가치를 얻을 만한 산물인 셈이다. 물론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눈에 띄는 건 짐 캐리다. 그는 디지털 캐릭터와 3D비주얼의 숲 속에서도 유효한 아날로그적 기본을 설득한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은 진보보다도 답보란 측면에서 유효한 몽상가의 꿈인 셈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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