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 영화화된다고 하자 사람들은 문제적인 캐릭터 리스베트 살란데르를 누가 맡을 것인가에 주목했다. 루니 마라는 의외의 카드였다. <소셜 네트워크>(2010)에서 마크 주커버그가 연모하던 여인의 단정한 인상을 기억해낸 이들은 덕분에 더욱 의심했다. 스웨덴에서 동명의 작품을 영화화한 닐스 아르덴 오플레르 또한 이에 질색했다. 하지만 모두의 기우를 발로 차버리듯, 그녀가 해냈다. 가시처럼 세운 머리, 스키니한 가죽 의상 곳곳을 메운 메탈 재질의 장식과 체인 벨트, 얼굴 곳곳에서 발견되는 피어싱. 퇴폐적인 스타일 만만하지 않게 무뚝뚝한 태도와 범접하기 어려운 반사회적인 인상. 마라는 완벽하게 리스베트가 되어 스크린에 등장했다. 부유한 NFL 구단주 가문의 딸이라는 사실은 이를 더욱 비범하게 수식하는 반전이었다. 화염병처럼 강렬한 폭발, 루니 마라는 이제 막 불이 붙었다. 더욱 뜨거워지리라.
스웨덴 재계의 큰 손으로 꼽히는 재벌의 뒷거래를 폭로한 기자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다니엘 크레이그)는 되레 곤경에 처했다. 증거 불충분으로 명예훼손의 역공을 당한 그에게는 이를 맞받아칠만한 여력이 없었다. 정보원의 증발로, 심증은 충분했지만 물증이 없었던 것. 덕분에 재판에서 패소하고 막대한 벌금형 구형으로 전재산을 날리게 된 그는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스웨덴의 산업을 일으킨 기업으로 꼽히는 방예르 산업의 전직 회장 헨리크 방예르(스텔란 스카스가드)의 제안을 대신 전하는 변호사로부터였다.
펑크한 헤어스타일과 피어싱이 눈에 띄는 리스베트 살란데르(루니 마라)는 사실 유능한 정보원이며 천재적인 해킹 실력의 소유자다. 사회부적응자에 가까운 그녀의 외모는 모든 이들의 편견을 부르는 동시에 그녀의 공격적인 성향이 구체화된 결과에 가깝다. 문신과 피어싱으로 무장한 그녀는 한 남자에 관한 정보 수집을 의뢰 받게 되고 그로 인해 그가 곤경에 처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이로 인해서 한 남자의 방문을 받게 된다. 그 남자의 이름은 미카엘 블롬크비스트, 바로 리스베트가 조사한 바로 그 남자였다.
고인이 된 스웨덴 작가 스티그 라르손의 스릴러 3부작 중 첫 작품을 두 번째로 영화화한 데이비드 핀처의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스웨덴에서 제작된 <밀레니엄 제1부: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원작과 다른 각색이 발견되는 작품이지만 그 결과물에는 차별점이 있다. 각색물로서 두 작품의 차이는 인물 간의 관계를 묘사함에 있어서 그 내면의 감정까지 포용하느냐의 여부에 있다. 스웨덴 버전은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관계를 동료라는 이성적 대상의 범위 안에 가두며 원작과 다른 길을 걷는 반면, 핀처는 두 남녀 사이의 미묘한 감정적 화학 작용을 보다 세심하게 다룸으로써 소설에 내재된 멜로적인 여운을 영화로 끌어온다.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만남이 성사되는 과정이나 결말부를 처리하는 방식에 있어서 원작에 충실한 건 핀처의 결과물이다. 이는 단지 원작의 모사를 염두에 둔 것이라기 보단 그 결정적인 순간을 스크린에 세워 넣을 것인까라는 고민이 원작의 감정까지 영화가 포용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맞닿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선택은 3부작으로 진전될 시리즈의 형태에도 미묘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란 예감을 부른다. 특히 원작이나 스웨덴 버전과 달리 결말부의 사건 해결 방식을 보다 독립적으로 각색해낸 측면은 이런 추측을 보다 강하게 대변한다.
스웨덴 버전이 남녀의 관계적 심리를 잔가지라 생각하고 쳐낸 결과물이라면 핀처의 작품은 캐릭터와 그 캐릭터가 이루는 관계에 보다 큰 흥미를 느낀 작가의 각색물이라는 차이로 보인다. 그만큼 스웨덴 버전이 사건의 추리와 해결에 공을 들인 작품이라면, 핀처의 작품은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인물의 심리와 현재의 관계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이는 이 작품을 보다 개인적인 야심이 깃든 작품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물론 핀처의 작품에서도 스웨덴 버전의 인용이라 이해할만한 아이디어가 발견되지만 이는 스웨덴 버전의 인용이라기보단 먼저 선점한 결과에 대한 차별적인 대안이 불필요했던 까닭처럼 보인다.
핀처의 작품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스웨덴 버전의 영화와 원작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 없다는 건 이 작품이 결국 원작과 스웨덴 버전을 섭렵한 관객에게 더 큰 발견의 재미를 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특히 원작을 먼저 숙지한 관객이 반대의 경우보다 영화를 보다 즐길 수 있는 확률이 크다. 사실 핀처의 영화는 두 인물이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데 할애하는 분량이 책 한 권을 훌쩍 넘기는 원작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이는 속도감 있는 사건의 진전을 바라는 관객의 입장에서 기다림이 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미카엘이 헨리크를 만나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는 광경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는 복잡한 브리핑과 같아서 단숨에 들이키기 쉽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핀처의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건 스타일의 양식이다. 비주얼리스트로서 핀처의 장기는 이 작품에서도 녹록하잖게 드러난다. 특히 극 초반 영화의 줄기와 상관이 없는 오프닝 시퀀스의 비주얼은 CF감독 출신다운 핀처의 감각을 체험할 수 있는 부록과 같다. 동시에 핀처의 감각은 스티그 라르손의 원작에 비해서 보다 정밀한 장르물의 형식에 가깝게 보인다. 특히 유령과 같은 시선으로 생물처럼 미끄러져나가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유려하게 공간을 포착하고 응시하는 방식은 필요에 따라서 극적인 서스펜스를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원숙한 연기와 캐릭터 표현력이 두드러지는데 그 중에서도 리스베트를 연기한 루니 마라는 단연 인상적이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무난한 인상으로 출연했던 그녀는 펑크한 스타일로 무장한 리스베트를 연기해냈다는 이슈를 넘어서 완벽하게 자신의 스타일로 승화했다. 단연 올해의 발견이랄까.
‘소셜 네트워크’가 뭔지 잘 모르는 당신이라 해도 당신은 이미 소셜 네트워킹 중일 게다. 적어도 인터넷에 취미가 없지 않은 이상 미니홈피, 블로그, 트위터 등등에 올려놓은 당신의 계정을 통해 이미 당신은 이 사회의 구성원들과의 접속을 경험해봤거나 진행 중인 셈이다. 그리고 207개국의 5억여 명의 회원이 이용한다는 ‘페이스북’은 대표적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이며 250억 달러의 가치를 지닌 글로벌 기업이다. 페이스북의 개발자이자 창립자인 마크 주커버그는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 자리에 오르며 소셜 네트워크 시대의 신화로 등극했다. “Facebook me”라는 신조어를 유행어로 만든 페이스북의 열풍이란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소셜 네트워크>는 바로 그 전세계적인 현상의 중심에 있는 페이스북의 성장과 이를 개발한 주커버그가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에 이르기까지의 전기적 서사를 담아낸 작품이다. 하지만 단순히 <소셜 네트워크>는 페이스북의 성공 신화라는 단순한 주제로 요약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일단 ‘소셜 네트워크’는 ‘페이스북’에서 비롯된 용어가 아니다. 페이스북은 ‘소셜 네트워크’를 대변하는 하나의 현상이었다. 무형의 사이버스페이스 속에서 활발하게 이뤄지는 개인간의 접속과 이를 통해 형성되는 거대한 장의 마련은 이미 페이스북 이전부터 웹이라는 공간의 형성과 함께 존재하던 것이었다. 페이스북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의 제목이 <소셜 네트워크>라 명명된 것에는 뚜렷한 의미가 있는 셈이다.
페이스북은 유기체와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다. 유저 스스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관계를 발전시키고 네트워크의 확장을 구축해나가던 기존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다른 차원의 진화적 체계를 갖춘 새로운 양식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다. 페이스북은 스스로 다른 유저에게 접근을 도모하고 접속을 시도해야 하는 기존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달리 시스템의 알고리즘을 통해 유저와 유저의 연결을 유도하고 접근성의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마이스페이스’와 같은 기존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메일 주소를 통해 유저와 교류가 있었던 주변인들을 검색해서 리스트를 제공함으로써 관계망 구축을 위해 유저 스스로가 주변인들을 검색하는 수고를 덜어준다. 이런 접근의 편의성은 페이스북이 구축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차별화된 전략이었으며 이를 토대로 페이스북은 자가증식을 유도하는 시스템 안에서 끊임없이 분열해 나가는 유저들의 선택을 통해 전세계적인 네트워크망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소셜 네트워크>는 주커버그(제시 아이젠버그)를 중심으로 그가 페이스북의 성공을 이끌어내기까지의 서사에 관여했던 다섯 명의 인물을 비중 있게 다루거나 주목한다. 주커버그와 함께 페이스북을 공동으로 설립한 왈도 세브린(앤드류 가필드), 페이스북의 확장에 큰 기여를 한 냅스터의 창시자 숀 파커(저스틴 팀버레이크), 마크 주커버그에게 아이디어를 빼앗겼다며 대립선에 서게 되는 윈클보스 형제(아미 해머) 그리고 마크 주커버그의 과거 애인인 에리카(루니 마라)까지, 이 다섯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셜 네트워크>는 세 갈래의 서사 속에서 중첩적인 사연을 만들어내면서도 엇갈리는 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진전되는 이야기다. 기본적으로 영화의 현재 시제는 주커버그를 둘러싼 두 개의 법정 드라마다. 그리고 이는 <소셜 네트워크>의 줄기가 되는 사연, 즉 하바드대 2학년 생이던 주커버그가 페이스북을 창립하고 성공을 이룬 뒤, 소송에 시달리기까지의 서사를 이어나가는 매듭이자 그 모든 서사의 종착역과 같다.
이처럼 <소셜 네트워크>는 다층적으로 구성된 서사 구조를 저마다의 시점으로 나열하고 있는 작품이나 퍼즐을 맞춰나가듯 머리를 싸매고 볼 작품은 아니다. 동시에 엄청난 대사량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통해 방대한 정보량을 쏟아내지만 이 모든 것을 이해해낼 정도의 지적 능력을 준비한 채 상영관에 들어설 필요도 없다. <소셜 네트워크>는 방대한 서사를 심플하게 정리하고 긴밀하게 구성해내는 스토리의 운용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약간의 변주가 가미된 곡조에 강렬한 리프와 스트레이트한 훅을 담아 능수능란하게 연주해 나가듯 흥미를 자아내고 몰입을 발생시키고 감상을 점층시키는 드라마다. <조디악>과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통해 관조적이고 유려한 연출력을 선보이며 대가로서의 경력에 들어선 데이빗 핀처는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의 이런 능력을 보다 극대화시킨다. 캐릭터의 내면을 깊숙하게 살피는 동시에 인물의 주변부를 세심하게 조망하고 이를 둘러싼 시대의 공기를 긴밀하게 포착해낸다. 동시에 <소셜 네트워크>는 플래쉬백을 동원한 서사의 재구성을 통해 방대한 이야기를 압축해내면서도 그 안에 담긴 정보량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각색과 편집의 요소에서도 탁월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할만한 작품이다.
사건 자체보다도 그 사건 속에 놓인 인물의 심리에 집중하는 방식은 사건 자체의 진전만으로 이룰 수 없는 역동적 리듬을 발생시킨다. 자신의 애인이었던 에리카와 헤어진 주커버그가 하버드대의 커크랜드 기숙사방으로 돌아와 기숙사 사이트를 해킹한 뒤 여학생들의 외모를 비교해서 투표하는 ‘페이스매쉬’라는 사이트를 만들고 이로 인해 큰 이슈가 되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의 도입부는 이 에피소드 하나만으로 주커버그라는 인물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이해시킨다. 일종의 ‘너드(Nerd)’에 가까운 컴퓨터 천재 주커버그는 상황에 대한 판단력과 이성적인 사고를 지닌 인물이지만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좀처럼 친밀함을 형성할 수 없는 인물이다. <소셜 네트워크>는 주커버그의 이런 성격에서 기인한 인간관계의 갈등과 충돌을 극적 감정의 요소로서 활용해나간다. 특히 속사포처럼 단어들을 쏟아내는 주커버그의 대화 방식은 막대한 정보량을 방출하고 있음에도 그 빠른 대사가 주는 리듬감을 통해 극 자체에 활기와 흥분을 일으킨다. 이런 특성은 단지 주커버그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소셜 네트워크>는 주커버그의 페이스북에 연관된 인물들의 주요한 서사들을 효율적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종종 극의 구성을 위한 유효한 장식처럼 활용하며 영화의 시야를 보다 광대하게 확보해냄으로써 극의 흥미를 넓혀나간다.
한 가지 궁금해지는 대목은 <소셜 네트워크>가 실제 인물을 묘사하는 전기적 드라마라는 방식에서 얼마만큼이나 사실성을 중시한 작품인가라는 지점이다. <소셜 네트워크>는 벤 메즈리치의 미발간소설에서 착안된 작품이다. ‘카드 카운팅’이라는 방식을 통해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거액을 벌여 들인 MIT의 수학천재들에 관한 실화를 소설로 옮긴 <MIT 수학천재들의 라스베이거스 무너뜨리기>를 집필하며 화제가 된바 있는 벤 메즈리치는 20대의 나이에 페이스북을 창립하며 벼락부자가 된 마크 주커버그에 관한 논픽션 소설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 사실에 깊은 관심을 보인 할리우드 제작자에게 직접 건넨 14페이지 분량의 트리트먼트가 <소셜 네트워크>의 출발점이 됐(다고 알려졌)으며 이를 각색한 아론 소킨의 시나리오가 현재의 결과물로 발전된 것이다. –최근 벤 메즈리치는 <소셜 네트워크>와 동명의 소설을 발표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소셜 네트워크>의 제작에 관여한 이들은 이 작품의 초고가 된 벤 미즈리치의 트리트먼트가 다양한 채널을 통한 취재와 조사로서 완성된 이야기인가라는 물음보다도 다른 측면에 대해서 흥미를 느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주커버그는 <소셜 네트워크>가 자신과 무관한 영화라고 스스로 어필한 바 있다. 그가 자신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입힐 수도 있는 영화적 내용에 대한 부정의 의미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펼치는 것일지 몰라도 어쨌든 <소셜 네트워크>가 페이스북이라는 논픽션 현상에 입각해서 완성해낸 허구적 사연이라 이해해도 무방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벤 메즈리치의 트리트먼트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는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데이빗 핀처가 완성한 <소셜 네트워크>라는 결과물을 토대로 짐작해보자면 이 작품은 주커버그라는 실제 인물을 수단으로 실물이자 허상인 소셜 네트워크라는 현대인의 관계 맺기의 아이러니에 포커스를 맞춘 영화처럼 보인다. 이 지점에서 사실성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유효한 것은 페이스북이라는 신화도, 마크 주커버그에 대한 전기적 재현도 아닌, 소셜 네트워크라는 21세기적 관계 형성의 양면성에 있다. 온라인에 거대한 네트워크 제국을 구축한 천재가 정작 현실의 인간관계 안에서 고립된 존재라는 관점이 <소셜 네트워크>라는 작품의 세계관을 이루는 기초적 태도이자 관점으로서 유효한 어필을 한 것처럼 보이며 이는 영화가 완성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중요한 설정으로 작동된 것처럼 보인다.
자신들의 합리를 내건 언어를 통해 치열한 공방이 펼쳐지던 사무실에 홀로 남겨진 주커버그를 비추는 결말부는 <소셜 네트워크>의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결정적 순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온라인이라는 방대한 우주에 거대한 네트워크 세계를 창조해낸 주커버그가 오프라인의 현실에서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 같은 인물임을 드러내는 역설적인 광경, 이는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누르고 웹에 접속하여 자신의 아이디로 로그인함으로서 전세계의 모든 이들과 활발하게 소식을 주고 받지만 가상의 네트워크에서 로그아웃한 뒤, 두 발을 딛고 선 현실 위에서는 정작 깊은 고독을 체감하게 된다는 고독한 현대인의 실풍경에 대한 응시이며 영화는, 그리고 데이빗 핀처는 이런 현실을 사려 깊은 동정의 시선에 담아 투영한다.
<소셜 네트워크>는 어느 개인의 아이러니한 현실을 비추는 드라마 자체로서도 훌륭한 의미를 전달하는 작품이다. 알고리즘을 통해 획기적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창조한 이가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고립된 존재라는 역설 그 자체가 <소셜 네트워크>의 진심인 셈이다. 지금도 전세계의 많은 이들이 모니터 앞에 앉아 몇 번의 클릭을 통해 자신에게 허락된 가상의 공간에서 소셜 네트워크에 몰두하고 있다. 그 수많은 관계의 알고리즘 속을 떠도는 이들의 풍요로운 인간 관계는 과연 얼마나 유효한가. 본질이 사라진 피상의 세계에서 거대한 허상의 네트워크 속을 떠도는 유저로서의 일상을 즐기는 현대인들은 고독한 현실로 회귀해야 한다. 당신은 그를 친구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예, 아니요. 당신의 클릭에, 혹은 상대의 클릭에, 관계의 유무가 결정되는 지금, 당신도 소셜 네트워크하고 있습니까? 아니, 하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의 고독은 치유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소셜 네트워크다. 당신에게 그 관계는 진짜가 아니다.
“Facebook me.”우리 식대로 하자면 일촌 신청해달라는 의미로 통용될만한 이 말은 ‘페이스북’이라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전세계적인 열풍을 대변하는 유행어다. 207개국의 5억여 명의 회원이 이용한다는 페이스북은 대표적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이자 250억 달러의 가치를 지녔다고 하는 글로벌 기업의 이름이다. 페이스북의 개발자이자 창립자인 마크 주커버그는 자신이 개발한 페이스북을 통해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 기업자 자리에 오르며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시대의 신화가 됐다.
<소셜 네트워크>는 바로 그 페이스북의 성장에 관한, 마크 주커버그의 성공에 관한 서사를 다룬 이야기다. 하지만 <소셜 네트워크>는 페이스북과 마크 주커버그의 성공을 위해 마련한 전기가 아니다. 페이스북 이전까지 소셜 네트워크라는 명칭이 존재했듯이, 이 영화의 제목이 <소셜 네트워크>라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명확하다. 페이스북은 소셜 네트워크라는 시스템 안에 귀속된 하나의 현상에 가깝다. 페이스북을 다룬, 그 시작이 된 마크 주커버그라는 인물을 다룬 이 영화가 <소셜 네트워크>라는 제목으로 명명된 것은 이 영화의 배경이 ‘소셜 네트워크’라는 온라인 관계 맺기 그 자체를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바드대에 재학 중인 주커버그(제시 아이젠버그)가 자신의 애인인 에리카(루니 마라)로부터 이별을 통보 받는 시작부터 페이스북을 개발하고 성공을 거둔 뒤, 두 개의 소송을 겪게 되는 결말부까지를 다루는 <소셜 네트워크>는 큰 줄기로 이뤄진 순행적인 플래쉬백의 서사의 중간 중간에 현재 시제의 두 시점으로 나눠진 두 개의 소송 합의를 이행 중인 주커버그를 비춘다. 다층적인 서사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서사의 흐름은 매끄럽고, 엄청난 대사량을 지니고 있으며 방대한 정보량을 쏟아냄에도 극을 이해하는데 큰 무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거대한 정보가 유려하게 흐른다.
<소셜 네트워크>는 스토리의 운용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큰 너비의 서사를 주요한 맥락의 덩어리로 나눈 뒤, 다양한 캐릭터들의 개별적 서사를 그 틈새에 밀어 넣고 매듭처럼 이야기들을 연결해낸다. 인물의 내면을 깊숙하게 살피는 동시에 인물의 주변부를 조망하며 시대적 공기를 포착한다. 특히 관조적이고 유려한 연출력은 데이빗 핀처가 거장의 경력을 쌓아가고 있음을 직감하게 만들 정도다. 캐릭터의 특성을 통해 리듬을 만들어내는 방식도 훌륭하다. 캐릭터들의 특성을 묘사해내는 방식과 극의 흐름에 있어서 저마다의 캐릭터들이 뚜렷한 역할을 이룸으로써 영화의 시야는 폭넓게 확보되고 극의 흥미는 그만큼의 위력을 얻게 된다.
결과적으로 <소셜 네트워크>의 서사는 결말부를 통해 비춰지는 거대한 아이러니 그 자체를 드러내기 위한 여정이나 다름없다. 전세계를 연결하는 광대한 네트워크망을 창조해낸 이가 현실에서 혼자임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깊고 심각한 고독을 체감하게 만든다. <소셜 네트워크>는 광역화된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되레 지독한 고립감에 시달리게 되는 아이러니 그 자체를 비춘다. 가입과 로그인을 통해 자신만의 공간을 개설하고 전세계 누구와도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온라인이라는 가상의 세계로부터 로그아웃한 뒤, 두 발을 딛은 현실 위에서 체감하게 되는 고독이란 오늘날 현대인에게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소셜 네트워크>는 그 실풍경을 따뜻한 동정을 담아 응시한다.
실존 인물을 다룬 <소셜 네트워크>가 얼마나 사실성에 충실한 작품인가라는 의문에 있어서 이 작품은 논픽션에 기초한 2차적 생산물, 즉 결론적으로 가공된 픽션이라고 보는 쪽이 옳을 것이다. 실제로 마크 주커버그가 <소셜 네트워크>를 본 뒤, 자신과의 연관성을 부정했다는 사실처럼 <소셜 네트워크>와 마크 주커버그 사이에 놓인 진실의 간극은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소셜 네트워크>는 마크 주커버그라는 인물 그 자체를 둘러싼 거대한 아이러니로서의 드라마로도 탁월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수작임에 틀림없다. 이는 곧 <소셜 네트워크>가 품은 사실로서의 가치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다. 중요한 건 마크 주커버그가 아닌 당신이다. 당신은 소셜 네트워크 하고 있습니까? 알고리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당신의 진짜 네트워크는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진짜 관계를 맺고 있을까?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본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