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 단평

cinemania 2009. 8. 5. 10:49

대세는 리얼이다. 리얼을 보장하는 건 실시간이다. 고로 10억의 상금이 걸린 인터넷 생중계 서바이벌 게임은 대세를 아는 기획이다. 문제는 이 서바이벌이 단순히 게임의 탈락자를 양산하는 수준이 아닌, 인생의 탈락자를 양산하는 진짜 리얼 서바이벌이라는 점에 있다. 무한 경쟁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현대인들의 아비규환을 연상시키듯 거액의 상금을 눈앞에 둔 게임 참가자들의 생존 게임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문제는 그 의미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랄까. 참혹한 세태를 방조한 자들에게 복수를 가한다는 내용은 일면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영화는 좀처럼 정곡을 찌르지 못한다. 단 한 사람의 생존자가 남았고, 그 생존자의 기억을 더듬어 플래쉬백을 전진시키고, 사건의 배후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는 서사의 구조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본질적인 이야기 구조다. 게임의 법칙 안에서 철저한 규칙성이 보장되지 않고, 우연을 필연처럼 눈가림하려는 수작들이 곳곳에 산재해있다. 좀처럼 어리석지 않고서야 그 단점을 알아채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때때로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이해할 수 없는 대사와 감정들이 연출되곤 하는데 하나같이 심각한 수준의 비웃음을 유발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사건의 원인이 된 시작점을 결말에 전시할 때, 영화 자체의 수준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러니까 세상에 대한 비관으로 똘똘 뭉친 이 영화가 내던지는 궁극적 원인이란 건 어지간해서 이해할 수 없는 비약적 현실이다. 물론 현실에선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정말 어처구니 없는 방식으로 벌어지곤 한다. 하지만 영화적 설득력은 그 어처구니 없음을 고스란히 따라가는 방식으로 체득될 수 있는 게 아니다. <10>은 좀처럼 설득력이 없는 영화다. 그저 개똥철학을 담은 무책임한 혐오덩어리에 불과하다. 고생한 흔적이 확연한 배우들만 뒤늦게 안쓰럽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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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으로 만든 리얼 돌(real doll)을 애인이라고 소개하는 그를 미친놈 취급하기 전에 ‘라스는 착한 녀석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그 곳은 분명 선량한 사람들의 공동체다. 하지만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이하, <사랑스러운 그녀>)는 현실에서 반허공에 뜬 착하기만 한 이야기라고 지나칠 수 없는 영화다. 그건 착한 이야기가 절실한 감정을 진심 어린 표정으로 내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극단적으로 기피하는 라스(라이언 고슬링)는 함께 식사를 하자는 형수(에밀리 모티어)의 권유에 머뭇거리다 달아나고, 여자 직장동료(켈리 가너)의 적극적인 관심도 피해 다니기만 한다. 하지만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항상 온화한 얼굴로 기억되는 착한 사람이며 독실한 기독교도로서 인망도 두텁다. 하지만 항상 자신의 집에 홀로 박힌 그의 일상에 대해 형수는 걱정이 깊고 이웃들의 친절한 관심은 끊이지 않는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형의 집을 찾아와 멀리서 자신을 찾아온 여자친구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한다. 의외의 소식에 화색이 된 그들은 그녀에게 내어 줄 방까지 준비하며 설렘을 감추지 못하지만 이내 그가 데려온 그녀의 정체 앞에서 멍해질 따름이다. 그가 데려온 모종의 여인, 비앙카는 실리콘으로 만든 섹스토이 리얼 돌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큰 문제는 장난이나 농담이라 말하기엔 너무나 진지한 그의 태도다. 그는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리얼돌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비앙카라고 소개하는 라스와 대면하는 이들의 당혹감은 설명할 필요 없이 표정만으로 드러난다. 게다가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돌아올 리 없는-인형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행동하는) 라스의 모습을 (관객으로서가 아닌 극 중 주변인으로서) 지켜본다면 심히 걱정이 앞설 것이 자명하다. 물론 당연히 라스의 곁에서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형과 형수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그의 이해할 수 없는 애정표현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때론 뜨악한 심정을 토로한다. 하지만 인형을 향해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흉측하게 바라보는 대신 그 특별한 로맨스의 주인공을 위한 연극에 기꺼이 조연으로 참여하는 그들의 노력은 진심만이 전달할 수 있는 감동을 숙성시켜나간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은 점차 행위에 진심을 담기 시작하며 허구적인 이야기는 점차 실존의 설득력을 얻기 시작한다.

<사랑스러운 그녀>에서 라스의 리얼돌은 마을이라는 공동체, 즉 인간적 유대감을 흔드는 어떤 물음과도 같다. 라스의 기이한 애정행각은 망상(delusion)이라는 의학적 진단을 얻지만 그의 주변에 있는 이들은 라스를 환자 취급하려 들지도, 그를 섣불리 치료하려고 들지 않는다. 단지 그의 애인 비앙카를 자신들의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사랑을 인정할 뿐이다. 그 과정을 이뤄내는 건 선량한 이들의 무조건적인 감수가 아니라 선택이다. 비정상과 정상에 대한 구별이 아닌 소수의 특수성을 받아들이는 다수의 포용력. <사랑스러운 그녀>가 특별한 이야기 이상의 값어치를 매길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자신과 다른 타인, 혹은 대부분과 다른 소수의 행위를 비정상으로 판명 짓지 않는 선택은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에 대한 이성적 도발을 감성적인 유대감으로 극복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인간미로 거듭나며 이는 상처받은 인간을 치유하는 현명한 처방전이기도 하다.

영화가 드러내는 것처럼 태생적 트라우마에서부터 기인한 라스의 방어적 본능은 성장기에 견뎌내야 했던 외로움을 통해 더욱 견고해진다. 자신의 외로움을 털어내는 것에 익숙지 않은 라스는 몸만 성장한 채 소통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어른이’다. 타인과의 접촉만으로도 통증을 느끼는 그의 질환은 지독한 애정결핍에서 비롯된 방어적 본능에 가깝다. 그가 유일하게 소통을 거부하지 않는 상대가 인간이 아닌 리얼돌이 된 것도 그가 접근하기엔 타인의 체온은 너무 뜨겁기 때문이다. 관계에 있어서는 미숙아에 가까운 라스의 칩거에 가까운 일상은 비앙카를 통해 활동영역을 넓히고 점차 관계적 소통의 폭까지 넓혀나간다. 라스는 자신의 내면을 비앙카와 동일시하며 스스로가 쉽게 드러내 보일 수 없었던 내면적 고뇌를 비앙카라는 대리적 자아에게 투영해 타인과의 소통을 시도하거나 혹은 관심을 유도한다. 결국 비앙카는 라스의 태생적 모성 결핍을 치유하는 대리모이자 폐쇄된 내면에 갇힌 자아를 이끄는 구원의 손길과도 같다. 비앙카의 손을 잡고 소통의 걸음마를 한걸음씩 내딛는 라스는 결국 홀로서기가 가능한 지점에서 비앙카와 이별을 고하게 된다.

현상보다도 그 안에 놓인 인간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 <사랑스러운 그녀>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투명한 믿음에 대한 이야기다. 순백으로 채색된 선량한 감정적 동의를 요구하지 않으며 순수란 이름으로 가공되는 기성복 같은 감동을 값싸게 내놓지도 않는 <사랑스러운 그녀>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유유히 흐르는 플롯 위를 부유하듯 떠내려오는 일목요연한 감정의 유유자적함이 돋보인다.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며 감정의 격양을 부르기보단 한산하게 흘러내리는 시냇가처럼 한껏 여유로운 <사랑스러운 그녀>는 흐르는 물길 주변의 여백에 채워진 이웃의 군상을 확인하게 만든다. 홀로 선 이의 어깨에 손을 올려줄 수 있는 인간들과의 소통이 가능한 그곳은 우리가 결코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믿음과 신뢰가 존재하며 이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투명의 소박한 극치에 가깝다. 너와 나의 차이를 넘어 우리를 이루는 믿음의 소통, 그 인간적 신뢰로부터 한발씩 디뎌나가는 <사랑스러운 그녀>는 선량한 눈빛을 넘어 끝내 투명한 감동으로 성장한다. 이는 종종 우리가 기적이라 부르는 것과 매우 닮았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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