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공무원 출신 아입니까!” 그렇다. 원래 그 남자, 최익현(최민식)은 밀수업자들에게 삥이나 뜯는 부산 세관이었다. 물론 혼자 해먹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팀원들의 비리 행위에 총대를 메고 옷을 벗을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밀수업자들의 필로폰을 입수한 그는 건달과 손을 잡고 이를 일본에 유통해서 한몫 챙기길 시도한다. 그래서 만난 것이 바로 부산의 내로라는 주먹 최형배(하정우). 그리고 경주 최씨 충렬공파 최익현은 직감한다. 그가 자신보다 항렬이 낮은 집안 사람임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렇게 그는 세력을 자랑하는 건달 두목의 대부가 된다. 1980년대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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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오르는 법을 배운 이는 미끄러지면서 버티는 재주를 용하게 터득한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는 한국의 근대사를 헤쳐오며 오늘날 일가를 이룬 한 아버지의 진창 같은 일생을 조명하는 영화다. 노스텔지어로 가오를 잡고, 블랙코미디의 리듬을 타면서도 서슬 퍼런 서스펜스가 때때로 쑥 들어온다. 두 전작을 통해서 리얼리즘의 연출적 장기를 드러낸 윤종빈 감독의 시대적 묘사가 탁월한 가운데, 배우들은 또렷한 연기로 그 시대적 공기를 채워낸다. 특히 영화를 좌우로 흔들어대는 최민식의 가공할 연기가 돋보이는 가운데서도 종종 그 리듬을 중심축으로 세워 넣고 긴장을 불어넣는 하정우의 존재감도 근사하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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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게임> 단평

cinemania 2011. 12. 13. 10:22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빅 매치로 회자되는 최동원과 선동열의 연장 15회 완투 대결. ‘나는 전설이다라는 부제라도 걸고 싶은 <퍼펙트 게임>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라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실제 야구팬이라면 가상의 인물까지 동원해서 실제 경기 양상까지 변주한 영화의 선택에 주목할 가능성이 크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세기의 투수로 꼽히는 두 선수의 대결의 재현을 넘어서 그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에 가깝다. <퍼펙트 게임>은 일단 최동원의 영화 같다. 선동열을 연기한 양동근이 (연기와 무관하게) 외모부터 실제 인물과의 괴리를 형성시키는 것과 달리 최동원을 연기한 조승우는 실제 인물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고, 신뢰하게 만든다. 두 선수의 대결 구도가 형성되고, 결국 맞붙기까지의 기승전결은 덜컹거리는 화법에도 불구하고 온도를 상승시킨다. 다만 구멍에 가까운 몇몇 주변 캐릭터가 스토리의 제구력을 깎아먹는 인상이다. 감독의 작전보다는 선수들의 능력에 좌우되는 경기처럼, 연출의 승리라기 보단 소재 자체의 매력과 배우의 열연이 얻어낸 승리 같다. 지나치게 비장한 음악도 퇴장 감이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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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드는 연쇄아동살해사건이 발생한다. 대통령이 직접 경찰청을 방문해서 범인 검거를 독려할 만큼 국민들의 관심이 지대하다. 덕분에 경찰 조직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총력을 기울이던 중, 유력한 용의자가 검거 현장에서 경찰의 오발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게 전전긍긍하던 수뇌부는 새로운 대안을 마련한다. 진범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범이라 위장시킬 만한 대체자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이 사건의 연출자로 낙점된 건 광역수사대 에이스로 꼽히는 철기 반장(황정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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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을 견딘 예술품은 보존적 가치를 발생시키고 개인의 소유욕을 자극한다. 예술품에 물질적 단위의 가격을 매기게 된 건 그 소유욕 때문이다. 희귀성이 인정될수록 책정되는 화폐 단위가 올라간다. 본질적인 아름다움보다도 금전적인 저울질을 통한 소유욕이 예술을 장악한다. 예술이 금전적 가치로 규정될 때 예술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변질시키는 굴절된 욕망이 파생된다. 진품을 베낀 위작들이 눈먼 소유욕을 등에 업고 시장에 유통되고 진가를 해독할 수 있는 감정가의 판단이 예술적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다. 변수는 그 모든 과정에 개입하는 사람의 속내가 투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예술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붓도, 예술적 가치를 판명하는 혀도, 예술적 가치를 구입하는 돈도, 사람에 의해 움직인다. 결국 사람이 변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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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를 (의도적으로) 연상시키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The good the bad the weird>(이하, <놈놈놈>)은 전자의 명성에 무임승차하고자 조합된 문자 나열의 결과물 따위에 불과한 것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놈놈놈>을 마카로니 웨스턴(스파게티 웨스턴)의 동양적(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적) 변주라고 섣불리 규정해버리는 것도 탐탁치 않다. 일단 <놈놈놈>의 부분을 채우는 다양한 이미지들은 대부분 어디선가 한번쯤은 본듯한, 그리 낯설게 보이는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 낯익은 이미지들이 조합된 전체적 형태는 낯설게 입력된다. 이는 그 이미지들이 조합된 결과물이 하나같이 과도기적인 형태로 혼재된 채 무질서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까닭이다. 이런 시각적 이해는 그 당시 주인이 불분명했던 만주벌판의 지정학적 요건과도 맞물려 교묘하게 시대상과 연관되어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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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잃어버린 서울의 밤거리. 유흥의 자본으로 세워진 네온사인들은 어두운 밤거리를 밝히고 그 아래엔 밤을 잊은 호스티스들이 향흥의 환락가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받아먹고 살아간다. <비스티 보이즈>는 도시의 밤이 만들어낸 빛의 허상을 좇아 거리로 내몰린 불나방 같은 청춘들에 대한 이야기다.

전작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 군대라는 남성적 특이집단을 들춘 윤종빈 감독은 <비스티 보이즈>를 통해 남성 호스티스라는 또 다른 특이집단을 들춘다. <용서받지 못한 자>와 <비스티 보이즈>는 남성성에서 뻗어나간 양극단의 환경을 배경으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대척점에 놓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은 진배없다는 점에서 동일한 속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체제적 복종을 완수하기 위해 개인을 억누르는 군대와 수익적 복종을 위해 개인을 억누르는 남성 호스티스의 세계는 어떤 면에서는 닮았다. 다만 그것이 남성성이란 지점의 양극단이란 점에서 명확한 거리감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호스트가 자신의 손님을 물주로 삼는다는 ‘공사’, 자신이 일하는 업소에 돈을 끌어서 쓴다는 의미의 ‘마이킹’, 실적에 따른 성과급수당을 지칭하는 ‘티씨(T/C)’ 등, 그 세계만의 전문용어가 소통되는 <비스티 보이즈>의 세계는 분명 특화된 구역이다. <비스티 보이즈>는 호스트바라고 불리는 특수한 세계를 스크린에 호기롭게 재현하며 리얼리티의 흥미를 유발한다. 하지만 <비스티 보이즈>가 작동시키는 리얼리티는 단순히 영화가 두른 병풍에 불과하지 않다. 강남 일대의 풍경을 담아낸 네거티브 질감의 영상은 그 거리에 팽만한 욕망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들춘다. 때때로 페이크 다큐나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같은 현실감이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철저한 현장조사를 거쳐 만들어낸 영화의 리얼리티가 탁월한 까닭이며 동시에 연기라는 장막을 걷어내고 실제 자신을 캐릭터에 이입시켰다고 생각될 정도로 캐릭터에 잘 스며든 배우들의 연기가 누구 하나 손색없는 덕분일 것이다.

몰락한 강남 2세인 승우(윤계상)는 잠시 호스트의 삶에 기대고 있을 뿐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하면서도 자신의 현실에서 발생하는 괴리감을 때론 감당하지 못한다. 업소의 에이스로 추대될 만큼 호스트로서의 자질이 충분하지만 그 위장된 얼굴로 가린 내면의 자격지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 삶에 저항하듯 다혈질의 성격을 토해내곤 한다. 그 와중에 지원(윤진서)을 만나 그녀를 통해 삶의 통로를 찾아나가지만 진심을 가늠할 수 없는 바닥에 내몰린 승우는 끝없이 의심을 헤매다 결국 치정의 미궁으로 스스로 빠져든다. 도박의 늪에 빠져 큰 빚에 억눌린 재현(하정우) 역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으로부터 도피하려다 극단에 내몰린 경우다. 하지만 재현은 현실에 타협하며 끝없이 출구를 마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비굴하게 내몰리면서도 눈치를 살피는 약삭빠른 근성은 천덕꾸러기처럼 그를 괄시하게 만드는 반면, 그가 호스트로서 천연덕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생존력의 기반이 된다.

강남의 밤거리에 불을 밝힌 호스트바는 물질적 욕망이 넘실거리는 향락의 무대와 같다. 청춘을 볼모로 한 청년들은 그곳에서 몸바쳐 주머니를 채운다. 청년들은 저마다 가지각색의 표정으로 손님의 시중을 들지만 꿈은 결코 그 자리에 있지 않다. 그곳으로 흘러 들게 된 사정이야 어찌됐건 재현이나 승우에게 호스트바는 자신의 삶을 꿈꾸게 할 기회의 땅임과 동시에 언젠간 박차고 나가야 할 바닥이자 나락의 비상구로 통하는 길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없어 희망도 없는 청년들은 암담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강남의 네온사인 아래 모여든다. 꿈을 쫓기 보단 돈을 쫓는 법을 먼저 배운 청춘들은 어떤 가치도 깨닫지 못한 채 돈을 향해 뛰어간다.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란 말처럼 승우나 재현이 소비하는 호화로운 삶은 그들의 현실에서 껍데기로 소화되는 것에 불과하다. 고급 차를 몰고 명품 옷을 입고 비싼 임대료를 내고 강남에서 살아도 그들은 결코 부유한 강남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자본이 꾸며놓은 진풍경 아래 살아가지만 그들의 호사는 그 거리의 주인의 모습이 아니라 향락을 서비스하는 거리의 노예에 불과하다. 에이스가 되고, 텐프로(10%)가 된다 한들, 수입의 주체가 아닌 소비의 주체로 몰락할 수 밖에 없는 자본의 저변에 불과하다. 그건 어머니의 가게에서 이름은 같으나 얼굴이 다른 지원(윤진서)에게 목걸이를 사주지 못하는 승우의 꿈과 같다. 마치 자신의 것처럼 모든 것을 누리지만 결코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는 변두리의 주체. 끝없이 물욕이 샘솟는 그 거리에서 그들은 자본의 주인이 되길 원하지만 소모품으로 전락할 따름이다.

이는 88만원 세대의 절망감과 무관하지 않다. 원대한 꿈보다 자본의 속박을 먼저 체감하는 청춘은 그 수하로 무기력하게 편입되어 덧없는 물욕을 꿈꾸지만 쳇바퀴 도는 제자리의 삶은 꿈을 아득하게 밀어내고 현실의 무게는 더더욱 삶을 짓누른다. 끝없는 경쟁을 고수하는 교육과정을 체득하고 사회로 나와 취업난에 허덕이며 자본에 의한 패배주의를 체감한 젊은 세대의 무기력함은 막연한 미래를 꿈꾸며 현실을 소모하는 호스트의 삶과 진배없다. 경쟁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고달픈 삶을 자연스럽게 익힌 청년들은 자본의 첨탑에 기어오르기 위해 스스로를 탕진할 따름이다. 손님들과 잔을 주고받으며 진심을 연기하는 호스트들이 메말라가는 자신의 영혼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은 자신이 내몰린 구석에서 처량함조차 잊으며 피폐한 삶에 스스로를 내던진다.

결국 반짝거리는 조명처럼 환락이 넘실거리는 서울의 밤을 뜨겁게 누비던 승우는 갈 곳을 잃고 나서야 스스로가 어두운 곳에 내몰렸음을 깨닫고 좌절한다. 한편, 현실로부터 달아나듯 사라진 재현은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에서조차 진심을 가장한 호스트의 얼굴로 살아간다. 그건 압구정의 밤처럼, 신주쿠의 밤도 자본으로 세워진 네온사인 불빛에 불나방들이 몰려드는 덕분이다. 그리고 지금도 영혼을 저당 잡은 청춘들은 자신의 허영심을 충족시켜줄 공사상대를 찾아 술을 따른다. 어지러운 세상, 파이팅 하면서. 그렇게 밤조차 밀어낸 도시의 허영심에 미혹된 불나방 같은 청춘들은 그것을 희망이라 믿고 그쪽으로 날개를 퍼덕이다 제 몸을 태우고 스스로 소진되거나 끝없이 몸을 부딪히며 살아간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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