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편의 시리즈와 한 편의 스핀오프에 이은 프리퀄. <엑스맨>시리즈는 확실히 동력이 다해가고 있는 낡은 모선과 같았다. 특히 근작인 울버린에 관한 스핀오프 <엑스맨 탄생: 울버린>의 심각한 수준은 브라이언 싱어의 두 전작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얻었던 <엑스맨 3: 최후의 전쟁>조차도 우월해 보이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낡은 시리즈의 심장을 되살리는 할리우드의 심폐소생술 공식을 충실히 따른 결과물이다. 프랜차이즈화되어 질주하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리즈들이 끝내 전복하는 현상 속에서 할리우드가 새롭게 찾아낸 대안은 질주하던 시리즈의 출발선을 살피는 일, 즉 <스타워즈>시리즈가 일찍이 꾀했던 프리퀄의 제작이다. 그러나 어떠한 기획 의도와 무관하게 이 작품은 시리즈의 갱생을 위한 성공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다.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시리즈가 울버린(휴 잭맨)을 필두로 한 엑스맨 캐릭터들의 파티였다면 새롭게 메가폰을 잡고 이 시리즈의 원점을 응시한 매튜 본의 <엑스맨>은 당연히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의 서사에서 출발한다. 자비에(제임스 맥어보이)가 프로페서 X라는에릭(마이클 패스빈더)이 매그니토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그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만났으며 갈라서게 됐는가를 살피는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이른바 <엑스맨>시리즈의 창세기나 다름없는 작품이다. 두 인물을 중심으로 진전되는 서사는 다양한 돌연변이 캐릭터의 수식을 통해 보다 입체적인 감상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서사적으로 속편에 해당되는 지난 시리즈에 애정을 지니고 있었을 팬들에게는 ‘엑스맨’이라는 유닛이 어떻게 탄생하고 대립하게 됐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충실한 답변과 같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수많은 돌연변이 캐릭터보다도 그 돌연변이들을 조율하는 매튜 본일 것이다. 근작인 <킥 애스: 영웅의 탄생>을 통해서 자신만의 능력을 인정받았던 매튜 본은 그 이전부터 탄탄한 시나리오 집필력과 유연한 연출력을 갖춘 인물로 인정받고 있었다. 히어로물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했다는 평을 얻은 <킥 애스>에 이어서 가장 유명한 히어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엑스맨>에서도 그의 녹록하지 않은 재능이 발견된다. ‘페이스오프’되거나 새롭게 업데이트된 돌연변이 캐릭터들의 활약상은 이 시리즈가 지닌 최상의 보폭이다. 지난 시리즈에서도 등장했던 몇몇 캐릭터의 젊은 날을 연기하는 인물들은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감상을 부른다는 점에서 특별한 재미를 부여한다. 무엇보다도 유머와 서스펜스, 드라마와 액션이 탁월하게 배합된 이 작품의 감각은 매튜 본이 브라이언 싱어 못지 않게 재능 있는 감독임을 다시 한번 설득시킨다. 그는 이 시리즈의 장점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고 자신의 방식에 녹여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의 성과는 연식이 오래된 시리즈를 새롭게, 그리고 근사하게 리노베이션했다는 점에 있다. 어느 히어로물보다도 대단한 물량공세가 가능하며 제각각의 캐릭터가 지닌 특별한 능력들이 전시되는,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져 이르는 거대한 세계관의 묘미를 다시 한번 탁월하게 즐길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는 것,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이 시리즈가 다시 한번 날개를 펴고 부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마련만으로도 충분한 제 역할을 해낸 작품인 것이다. 지난 시리즈가 진행되는 사이, 언뜻언뜻 등장하던 몇 가지 단서들이 확실하게 공개되고, 이를 통해서 또 한번 새롭게 서사의 갱신이 가능해졌다. 브라이언 싱어가 처음으로 이 매력적인 돌연변이를 소개한 2000년 이후로 이제야 비로소 그들을 위한 단단한 뿌리가 생긴 셈이다.
만약이란 말은 부질없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뒤집어 가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불필요한 첨언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현실이 아닌 허구 안에서 가정이란 유효한 착상이다. 논픽션이 아닌 픽션의 세상을 그리는 이야기꾼들에게 가정이란 발칙한 야바위이자 무궁무진한 떡밥이니까.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픽션으로 디자인된 논픽션의 세상, 다시 말하자면 영화로 이입된 현실의 역사를 전복시키고 깔깔거리는 유희다. 어쩌면 메가폰을 쥔 당사자가 쿠엔틴 타란티노란 사실만으로도 알만한 사람들에게 <바스터즈>는 싹이 노란 영화일 것이다. 그리고 <바스터즈>는 과감하게 돌진하는 피칠갑의 난장 속에서도 과장과 비유를 뒤흔들어 능수능란한 유머로 발화시키는 타란티노적 시네마천국이다.
총 다섯 챕터로 구성된 <바스터즈>는 중심인물을 달리하는 챕터의 나열을 통해 사건을 범위를 빠르게 넓히고 영화적 세계관을 급속도로 확장해낸다. 1941년, 유태인 사냥꾼으로 악명을 떨치는 독일군 나치의 한스 란다 대령(크리스토프 왈츠)의 악랄한 만행과 유태인 소녀 쇼샤나 드레이퍼스의 탈출을 그리는 첫 번째 챕터는 나치를 살해하는 임무를 띠고 독일로 파견되는 미군, 일명 개떼들(Basterds)이라 불리는 알도 레인 중위(브래드 피트)의 특공대의 활약상을 그리는 두 번째 챕터로 넘어간다. 그리고 성인으로 자라 파리에서 극장을 운영하는 쇼샤나(멜라니 로랑)가 등장하는 1944년 6월의 세 번째 챕터에 다다라 앞선 두 챕터에서 별개의 동선으로 활동하던 캐릭터들의 교점을 형성하고 뒤따를 두 챕터를 통해 캐릭터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접합하던 영화는 궁극적인 본색을 드러내는 피날레를 향해 가속을 올려나간다.
독일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와 영어까지, 총 4개국어가 동원되는 <바스터즈>는 그만큼 수다스럽고 떠들썩한 영화다. 브래드 피트를 제외하면 대부분 독일과 프랑스에 주둔한 현지 유명 배우들로 이뤄진 캐스팅은 <바스터즈>의 현실성과 허구성을 이루는 양면적 자질이나 다름없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캐릭터들의 발성과 화음이 격차를 이루고 교차되거나 변환을 이룰 때, 유머와 서스펜스의 도화선에 불이 붙고 방류되듯 불거지는 사연은 급류처럼 진전된다. 또한 과감하게 전시되는 악의적 성격의 이미지는 예나 지금이나 타란티노의 영화다운 블랙코미디적 취향을 돈독히 다져나간다. 히치콕의 맥거핀 이론을 충실히 이행하는 몇몇 시퀀스는 비범한 서스펜스로 신을 지배하다가도 순발력 있는 제스처와 언어를 발휘해서 영화적 공기를 찰나에 변주해나간다.
“우리의 임무는 나치를 잡아들이는 게 아니라 싸그리 죽이는 거야.”알도 레인의 대사처럼 <바스터즈>는 정말 나치를 싸그리 죽여버리는 영화다. 허무맹랑한 허풍에 가까운 영화적 장면들은 근엄한 표정을 버리면서도 유희적 의식을 치르듯 진지하게 허구적 상황을 대면하고 펼쳐 보인다. <바스터즈>의 나치들은 역사적 죄인으로서 복합적인 죄의식의 형태를 드러내는 악인으로서 존재하기 보단 명확한 선악의 패가 나뉜 유아적 만화 속 악당처럼 단순하며 때때로 우둔하고 어리석거나 교활하다. <바스터즈>는 히틀러 암살을 시도하게 되는 알도 레인과 쇼샤나의 목표가 어느 수순까지 다다르는가를 지켜보는 것보다 그 목표에 접근하는 행위적 수단과 방식이 어떤 수순을 밟아나가는가에 관심을 둘 때 보다 유희적인 쾌감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선악의 경계가 명확하면서도 장난끼가 다분한 인물들이 이루는 난장의 연속은 서사적 예측 범위에서 한 발자국씩 벗어난 결과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거짓된 역사를 과감하게 묘사해나간다.
<바스터즈>는 영화광이라 불리는 타란티노의 영화적 유희가 무엇을 동경하고 겨냥하는가를 저돌적으로 드러내는 하이퍼 픽션이다. 스크린이 녹아 내린 극장에서 연기에 영사된 쇼샤나의 클로즈업된 얼굴은 마치 호러적 광기를 연출하고, 극장을 채운 날카로운 웃음소리는 아비규환에 빠진 관객들의 비명과 함께 거대한 난장을 부추기다 거대한 허구적 단죄로 승화된다. 물론 <바스터즈>를 나치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이루는 비범한 작품이라 치장할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다만 <바스터즈>가 '세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은 유희'라는 말을 영화로 증명하는 타란티노의 비범한 역작이란 것 정도는 인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영화적 세계관으로 이입된 현실적 부조리를 마음껏 쥐고 흔들며 조롱하는 <바스터즈>는 결국 타란티노가 지닌 영화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결과물이다. 피칠갑의 난장 속에서도 과장과 비유로 상황을 비틀고 뒤흔드는 능수능란한 타란티노식 유머는 <바스터즈>에서도 강력한 쾌감을 부여하며 이를 통해 연극적 단죄마저 유쾌하게 거둔다. “아무래도 나의 최고 걸작이 되겠는걸.”알도 레인 중위의 마지막 대사처럼 그 자뻑마저도 유쾌할 정도로, <바스터즈>는 분명 재치 있는 야바위꾼 감독의 유쾌한 저항을 그리는 결과물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