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를 묻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지극히 사적이고 사소한 만남이라고 생각했다. 정지우 감독이 <은교>라는 소설을 영화화하기로 했다고 할 때까지도 몰랐다. ‘이적요라는 노시인의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꺼내기 전까지. “사실 원작을 읽기 전까지는 잠깐 노인 분장을 하면 되겠지 생각했죠. 그렇게 긴 호흡으로 가야 하는 건지 몰랐어요. 당황스러웠죠.” 계속 물음표를 던져야 했다. 70대 노인을 연기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의심이 거둬지지 않았다. 정지우 감독은 말했다. “사람은 나이 들어가면서 내면보다 외형이 더 빨리 변하는 것 아닐까요. 환경보다도 그에 익숙해진 느낌들이 빨리 변하지 않듯이.” 동의할 수 있었다. 선택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14시간이나 소요된 첫 테스트 분장이 끝난 뒤, 거울을 본 박해일은 생각했다. ‘이게 이적요구나.’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배우의 얼굴을 가리면서도 드러나야 하는 그 작업은 ‘기술이라고 하기엔 너무 크리에이티브한 미술작품’이었다. 완성도 있는 특수분장은 ‘단서를 잡아야’ 했던 박해일을 위한 첫 번째 단서였다. 70대 노인이 되기 위해서 박해일은 다양한 데이터를 수집했지만 그 ‘방대함’은 오히려 ‘큰 숙제’가 될 뿐이었다. ‘노시인을 능동적으로 드러내려 할수록 어색해지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노시인 이적요를 연기하는데 있어서 첫 번째 화두는 ‘노인처럼 보이는가’라는 기능적 측면이 아니었다.“미세하게 떨림까지 잡아낼 수 있는 특수분장을 했지만 결국 저는 한 꺼풀 뒤에 있는 거잖아요. 그냥 박해일이라는 자연인이 그 나이에 그런 생각을 가진 인물이 되어 솔직하게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오히려 부담도 덜어지더군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는 거였죠.” 박해일이 찾은 키워드는 결국 ‘자제’와 ‘절제’였다.
어느 새 연기경력 10년을 훌쩍 넘긴 박해일은 그 이름값에 비해서 딱히 드러난 바가 없다. 자연인 박해일은 정적 그 자체와 같았다. 작품을 통해 나타났다가 작품과 함께 사라진다. <은교>의 노시인 이적요를 떠올리게 만드는 지점이다. 공적으로 거룩하게 추앙 받는 시성의 대가가 10대 소녀에게 연정을 느끼다 깊은 애정으로 치닫는 과정은 시구로서 기억되는 천재성과 비범함을 배신하면서도 자연인으로서의 은밀한 욕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양면성은 사실 박해일이라는 배우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수없이 동원된 단어다. 사회적인 위치와 개인적인 욕망 사이에서 노시인 이적요는 예상치 못하게 번져버린 뜨거운 감정 앞에서 주저하면서도 한 걸음씩 나아간다. “이적요의 감정은 그의 나이를 감안해봤을 때 굉장히 열정적이고, 폭발적이죠.” 박해일에게 그 감정은 단순한 욕망이 아닌 간절함이었다. “한 순간의 욕망이든 갈망이든 그런 매혹에 빠지면서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 했을 때 그 상황들의 감정에 대해 동의가 됐어요. 단지 노인의 감정을 이해한다기보단 이 정도의 일을 겪은 사람의 감정을 많이 느꼈나 봐요. 원래 한 작품이 끝나고 캐릭터와 이별하는 과정에서 우울함이나 외로움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적요의 측은한 면이 아직 깊게 배어 있는 것 같아요.”
지난 해 흥행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은 <최종병기 활>이 박해일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가장 동적인 영화였다면 <은교>는 가장 정적인 영화일 것이다. 박해일에게 <은교>는 여러 모로 새로운 작품이었다. 나이에 비해서 어려 보이는 외모를 지닌 박해일은 단 한번도 자신의 나이 이상의 역할을 맡은 적이 없었다. 또한 다혈질의 성격을 지닌 성격파 캐릭터들을 연기해온 그가 절제라는 단어로 설명해야 할 내밀한 인물로 분한 것도 보기 드문 일이다. “절제되는 인물의 매력이 굉장히 큰 걸 알았어요. 더 설명하려 하거나 더 표현해보려 하거나, 능동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안에서 계속 꿈틀대는 걸 최대한 절제하는 것도 매력적이라는 걸 알았어요. 이번 경험은 큰 자산이 될 것 같습니다.” 매번 촬영에 들어갈 때마다 8시간의 특수분장을 인내해야 했던 그는 ‘참을 인’ 자를 마음에 새겼다. 덕분에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는 그는 70대 노시인을 연기하면서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각자 본인 나이와 상관 없이 저마다의 삶은 그들 각자에게 의미가 있어야 해요. 어느 누구를 위해서 산다는 게 오히려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매번 작품을 끝내고 나면 책꽂이에 책 한 권을 꽂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박해일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일상으로 사라질 것이다. 마치 없었던 사람처럼, 고요하고 안정적인 정적 속으로.
운명은 언제나 우연의 탈을 쓰고 나타나 뒤늦게야 필연의 맨 얼굴을 드러낸다. 김고은이 ‘배우 김고은’이 되기까지의 과정도 그랬다. ‘책 욕심이 많아서 당장 보지 않더라도 일단 사고 보는’ 김고은은 ‘심심하면’ 집 인근의 서점으로 향했다. 그 날도 그랬다. 재미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박범신 작가의 소설 <은교>를 집어 들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재학 중인 학교 무대에서 단 한번 자신의 연기를 봤던 학교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김고은은 알고 있었다. <은교>가 영화화될 것이며 은교 역에 어울리는 신인배우 오디션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 적도 있다. ‘은교 역할을 맡게 될 여배우 꽤나 마음 고생하겠네.’ 하지만 몰랐다. 마음 고생할 그 여배우가 자신이 될 줄은. <은교>의 의상 감독을 만나기로 했던 약속이 정지우 감독을 만나는 자리로 바뀐 뒤 모든 상황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너무 재미있어서 2시간 만에 읽어버렸던’ <은교>는 탐나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앞길이 창창한 20대 초반의 배우 지망생이 만만치 않은 노출신이 예정된 작품을 데뷔작으로 선택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욕심을 누를 수 없었다. “그것 때문에 작품을 안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억울한 거에요. ‘그렇게 밖에 못해?’라는 생각도 들고.” 그만큼의 각오가 필요했다. 부모님의 동의도 필요했다. 아버지는 방문을 닫고 들어가버렸다. 하지만 10분 뒤, 방에서 나와 딸의 고민을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노출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 작품을 하지 않더라도 다음에 또 좋은 기회가 올 수도 있어. 하지만 그때 또 다른 두려움이 존재한다면 그때는 네가 그걸 이겨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어?” 그 한마디에 김고은은 스스로가 우습다고 느꼈다. “이렇게 욕심이 나는데 두려움 하나 때문에 포기할까 생각하는 제가 용서가 안되더라고요.” 의심과 욕심 사이에 놓여있던 김고은이 확고한 의지를 쥐게 된 순간이었다.
원래 ‘낯을 가리지 않는다’는 그녀는 현장 적응력도 남달랐지만 카메라만큼은 낯설었다. 정지우 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눈 끝에 방법을 찾았다. “카메라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엉덩이로 이름도 쓰면서 망가져보는 거였어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시행착오는 피할 수 없었다. “낯선 집을 혼자 둘러보는 신이었는데 카메라가 바로 앞에 있는 게 느껴졌어요. 갑자기 카메라가 무서웠고 머리가 하얘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죠. 그 장면만 20번 정도 갔어요.” 김고은은 8시간의 분장을 마친 박해일이 자신으로 인해서 당일에 계획했던 분량을 촬영하지 못했다는 것에 ‘죄송스러워서 속이 다 문드러졌다.’ 하지만 그녀의 집중력을 높여주고자 ‘카메라 밖에서 시선을 맞춰주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경험을 전하며 격려하는’ 박해일의 배려는 그녀에게 ‘큰 힘이 됐다.’ “잘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고 배운다는 입장으로 갔어요. 그러다 보니 많이 편해졌죠.”
작품 경력 하나 없는 22살 남짓의 신인배우 김고은은 <은교>를 통해서 그 누구보다도 주목 받고 있다. 어쩌면 검증된 배우 박해일과 김무열 사이에서 트라이앵글의 한 각을 차지한 신인배우를 향한 관심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렷하게 자기 주관을 드러낼 줄 아는 김고은에게는 분명 특별한 것이 있다. “은교는 겉으로 봤을 때 굉장히 순수함을 가진 아이다운 아이에요. 천진난만하게 행동하고 이야기하고 잘 웃잖아요, 하지만 자기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면이 있어요.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고민했죠.”
김고은은 호기심이 강한 소녀 은교를 닮았다. 박범신 작가는 은교의 눈을 이렇게 설명했다. ‘해맑은 재기로 반짝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다른 세상을 보는 것처럼 아득하다. 단순히 젊다고만 할 수 없는,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신비한’ 눈빛이다.’ 20대 초반의 앳된 외모에서 싱그러운 젊음이 전해지지만 다양한 의문을 머금은 까만 눈동자는 순수와 관능의 파도가 철썩거린다. “제가 호기심이 많다는 걸 몰랐어요. 그런데 주위에서 제 눈 안에 호기심이 가득하대요. 저도 궁금한 거에요. 그 눈이 뭘까.” 이제 갓 연기에 입문한 신인여배우에게 대단한 상찬은 어쩌면 독이다. 하지만 김고은은 만개할 날을 기대하게 만드는 꽃봉오리처럼 눈이 가는 배우다. 가혹한 부담감을 되레 ‘일상적인 연기를 보다 훌륭하게 해내야 한다’는 야무진 각오로 승화시킨 그녀는 <은교>를 관통하며 긴 야심을 품었다. 단단한 줄기를 뻗고, 뿌리를 내리고 있다. 꽃은 그렇게 피어 오른다.
상대적으로 뼈를 드러내며 시작하는 원작의 서사가 강렬한 건 부인할 수 없다. 서사의 축약을 위해 순행으로 전개를 수정한 건지 모르겠지만 가공할 떡밥을 스스로 포기했다는 점에서는 아쉽다. 삼각관계에서 빚어지는 심리적 갈등과 충돌로 발생하는 긴장감은 원작에 비해서 사유화되는 인상인데, 이를 테면 원작은 은교에 대한 두 남자의 감정 발화가 서로에 대한 견제와 의식을 통해서 발전되는 인상인 만면, 영화는 그것이 단순히 나이가 다른 수컷들의 롤리타적 욕망으로 제한하듯 그려진다. 형태는 남아있는데 핵심이 떨어져나갔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이적요 역할의 박해일은 열심히 했다. 톤이 나쁘지도 않다. 다만 70대 노인을 연기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깝게 들리는 성대 묘사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김무열의 서지우는 감정을 좀 절제할 필요가 있는 캐릭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리고 그 어떤 결점과 무관하게 신인 배우 김고은은 지우기 힘든 인상을 남긴다. 동물적인 감각이 느껴지는 신인배우의 출연이란 점에서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