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드 피트는 이제 할리우드의 큰 손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배우로서 자신을 채워줄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선다. 성숙한 자유주의자, 브래드 피드는 여전히 새로운 세계와의 교감을 꿈꾼다.
“그건 테니스와 비슷하다. 당신보다 나은 누군가와 게임을 할 때, 당신의 게임도 더 나아지는 거지.” 브래드 피트의 말처럼, 그에게도 어느 감독의 디렉션이, 어느 배우의 액션이, 조코비치의 강서브를 받아내야 하는 어느 무명 선수의 찰나처럼 버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명확한 리액션으로 리턴하기에는 역부족인 시절이 피트에게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더 나아지리라 믿는 쪽이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서 머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물론, 그게 날 부끄럽게 만들지.” 그는 머뭇거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피트는 촌구석이나 다름없는 오클라호마의 스프링필드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피트가 보수적인 침례교도들로 득실거리는 그 촌동네를 견딜 수 없었던 건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대학시절까지 몸을 담았던 스프링필드를 벗어나 할리우드로 건너온 뒤에 겪었던 갖은 고생담들, 이를 테면 닭머리 인형탈을 쓰고 선셋대로의 레스토랑 앞에서 호객 행위를 했다는 등의 사연은 언젠가 그가 집필할 지도 모를 자서전의 좋은 소재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 선셋대로에서 거품 같은 욕망에 허우적거리지 않고 어떠한 밑천도 없이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올라섰다는 것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
타고난 외모는 배우에게 있어서 선천적 재능이다. 그런 의미에서 피트의 밑천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고된 아르바이트로 꾸린 일상을 배우로서의 미래에 투자하던 피트가 단역을 전전하다가 비중 있는 조연으로 한 계단 올라선 것도 바로 이 선천적 재능 덕분이었으니까. 조지 클루니와 경합을 벌인 <델마와 루이스>(1981)의 오디션장에서 피트가 선택된 건 그의 탄탄한 몸매 덕분이었다. 사실 근사한 외모로부터 기인하는 매력은 브래드 피트라는 배우를 설명하는 오프닝 시퀀스와 같다. <피플>을 비롯한 유수의 매체가 그를 최고의 섹시스타로 선정했다. 하지만 피트의 섹시함은 온전히 외모의 공이 아니다. 제임스 딘이나 리버 피닉스의 고독한 기질과는 다른, 보다 원초적인 반항적 혈기가 피트에게 흐르고 있었다.
<흐르는 강물처럼>(1992)과 <가을의 전설>(1994)은 피트를 알리는데 공헌한 작품들이다. 하지만 이는 할리우드에서의 생존을 위한 연기적 전시를 연마하는 스파링 파트너에 가까웠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 이후, 피트는 말했다. “완전하게 이를 경멸했다. 내 캐릭터는 시작부터 끝까지 밑바닥에 있었다.” 그에게는 숨길 수 없는 자의식이 있었다. <칼리포니아>(1993)의 날 것 같은 연기는 그런 잠재력을 드러내는 한 뼘이었다. 그리고 데이비드 핀처는 그 잠재력을 폭발시키기 위한 무대를 구상할 줄 아는 최적의 디자이너였다. 일곱 가지 죄악으로 예고되는 살인을 수사하는 젊은 형사 밀스로 출연한 <세븐>(1995), 반사회적인 가치관으로 세상을 선동하는 파이트 클럽의 수장 테일러 역을 맡은 <파이트 클럽>(1999), 핀처의 두 작품은 당시의 피트를 위한 최고조의 실전이었다. 특히 <파이트 클럽>의 테일러는 피트가 지닌 가능성의 극단을 일깨우는 동시에 그 이상이었다. 피트는 종종 성공과 명예를 경계하고 부정했다. “성공은 괴물이다. 그건 실제로 엉뚱한 것을 주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대신, 욕심만 늘어간다.” 핀처는 피트의 그림자를 명확하게 간파했다.
핀처의 두 작품을 잇기 위해서 피트는 몇 편의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다. <12 몽키스>(1995)도 그 중 하나였다. 피트는 떠버리 같은 분열적인 캐릭터로 등장한 이 작품으로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다. 가이 리치의 <스내치>(2000)는 이를 보다 현실적으로 구체화시킨 작품이다. 협잡꾼들의 얽히고 설킨 복마전 속에서 유일하게 스트레이트한 일관성을 지닌 원 펀치 미키로 분하는 피트는 캐릭터의 직선적인 성격을 통해서 상황과 대치되는 유머를 자아낸다. 그리고 스티븐 소더버그는 피트의 코미디 감각을 제대로 건드렸다. 조지 클루니를 필두로 맷 데이먼, 줄리아 로버츠 등 할리우드의 간과 쓸개를 빼먹었다 해도 좋을 만한 톱스타들이 대거 출연한 <오션스 일레븐>(2001)에서 그는 유머의 한 축을 이룬다. <오션스 트웰브>(2004) 역시 큰 성공을 거뒀다. 더 이상 할리우드에 수혈된 새로운 피가 아니었다. 심장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2005)는 주목 받는 화제작이었다. 이는 피트의 인생을 뒤흔든 운명이 됐다. 한때 숱한 스캔들로 타블로이드를 지배한 바 있던 그였지만 안젤리나 졸리와의 만남은 제니퍼 애니스톤과의 이혼을 결심할 만큼 강력했다. 스미스 부부로 출연한 졸리와 피트 커플은 점차 브란젤리나로 불리기 시작했고, 익숙해졌다. 피트의 행보도 달라졌다.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이후, 그는 배우가 아닌 제작자로서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마틴 스콜세지의 <디파티드>(2006)는 피트가 설립한 제작사 플랜B의 첫 작품이었다. 이듬해 아카데미는 감독상과 작품상의 영광을 <디파티드>에 안겼다. 연기적 행보에도 변화가 발견됐다. 피트는 <바벨>(2006)과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2007)로 각각 칸과 베니스 레드카펫을 밟았다. 베니스에서는 남우주연상을 선물 받았다. 할리우드의 아이콘을 넘어서 세계적인 배우로서의 지위와 명예를 얻은 것이다.
피트는 할리우드를 움직이는 거물이다. 그의 행보는 보다 자유로워졌다. 2008년에는 코엔 형제의 <번 애프터 리딩>과 핀처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2009년에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 그의 경력에 추가됐다. 기차를 갈아타듯 거장들과의 작업이 이어졌다. 그는 올해 칸에서 공개된 테렌스 맬릭의 신작 <트리 오브 라이프>(2011)와 함께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말했다. “이 영화로 인해서 영원한 삶이 없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종교적 의미를 정의하고 규명하려 하지만 미지의 영역에 대한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미덕이 아닐까.” 그는 더 이상 기회에 연연하는 배우가 아니다. 자신의 성숙한 영혼과 교감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서고, 자신의 세계를 채워나간다. 지금 그의 영혼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있는 <세계대전 Z>(2012)의 촬영장에 머무르고 있다.
바야흐로 뱀파이어물의 바로크 시대다. 고전적인 호러 장르의 유물이나 다름없었던 뱀파이어는 지금 과도기적인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새롭게 줄기를 뻗어나가는 뱀파이어물의 진화가 엿보이는 다섯 편의 계보를 소개한다.
<박쥐성의 무도회>
용감한 뱀파이어 킬러 혹은 실례합니다만, 당신의 이빨이 내 목을 물었어요(The Fearless Vampire Killers Or Pardon Me, But Your Teeth Are In My Neck). 고전적이면서도 음산한 한글 제목과 달리 긴 영문 원제는 모종의 위트를 품고 있다. 거장이라 불리는 로만 폴란스키가 연출과 출연을 겸한 1967년작 <박쥐성의 무도회>는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이례적이란 수사로 치장되는 작품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거듭하며 과감한 폭력 묘사조차 불사하는 그의 극단적인 연출 방식 안에서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유머를 만날 수 있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 B급 감수성으로 무장한 이 뱀파이어 영화는 중후한 서스펜스 대신 백치스러운 소동극을 곳곳에 포진시켰다. 이 영화는 비극적인 후일담을 낳았다. 여주인공 역의 샤론 테이트는 이 영화로 만난 로만 폴란스키와 결혼한 뒤 임신 8개월에 이른 당시 살인마 찰스 맨슨이 이끄는 광신도 집단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덕분에 이 영화에 박힌 유머들은 역설적인 비극으로 맺혔다.
<노스페라투>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나우르의 1922년작 <노스페라투>는 흡혈귀 문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브람 스토커의 <드라큐라>를 영화화한 작품으로서 독일 표현주의 고딕영화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성적인 메타포를 서스펜스와 연결하며 뱀파이어 영화의 섹스심벌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한 작품이자 뱀파이어라는 캐릭터의 묘사에 있어서 어떤 원형의 이미지를 제시한 작품이기도 하다. 뱀파이어 영화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이 작품을 동명 그대로 리메이크한 1979년작 베르너 헤어조크의 <노스페라투>는 원작의 성과를 훼손하지 않는 동시에 발전적 성과를 자랑하는 작품이다. 원작에 비해 보다 간결해진 캐릭터 관계를 통해 서사적인 몰입도를 높인 리메이크작은 시적인 영상미를 자랑하는 원작의 분위기를 보다 관념적인 형태의 메시지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중심 캐릭터로 등장하는 세 배우의 뛰어난 연기가 눈에 띄는 가운데 특히 강인한 이미지를 전하는 이자벨 아자니가 깊은 인상을 남긴다.
<드라큐라>
브람 스토커의 원작에서 영향을 받은 후대의 수많은 뱀파이어 영화 가운데 그 원작의 형태에 가장 충실하게 접근한 작품으로 꼽히는 건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1992년작 <드라큐라>다. 드라큐라의 고전적인 중후함이 잘 표현된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사악한 악의 상징으로서 드라큐라를 묘사해온 뱀파이어물의 관성에서 벗어나 그 이면에 놓인 인간적인 면모를 조명하며 이를 매혹적인 대상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제작된 의상이 시대극으로서의 사실감을 더하는 가운데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세트는 장르적인 위력을 더한다. 이는 관능적인 에로티시즘을 통해 강력한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동시에 궁극적으로 멜로적인 감성을 부각시킨 코폴라의 연출적 야심과 효과적인 시너지를 이룬다. 키아누 리브스, 위노나 라이더, 안소니 홉킨스 등, 화려한 출연진만으로도 호화로운 이 작품에서 드라큐라 역을 맡은 게리 올드만의 열연은 단연 돋보인다. 최초로 컴퓨터 편집을 시도한 작품으로서 영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 작품은 아카데미 3개 부문을 수상했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앤 라이스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는 낡은 유물처럼 여겨지던 캐릭터를 회춘시킨, 그러니까 보다 현대적인 배경 안에서 뱀파이어라는 캐릭터를 활용할 수 있는 여지를 확신하게 만든 작품이다. 할리우드의 꽃미남 스타에서 세계 영화시장을 선도하는 큰 손으로 자란 두 배우,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가 함께 출연한 이 작품은 당대 꽃미남 스타였던 두 배우의 외모만으로도 뱀파이어에 대한 판타지를 부추긴다. 영원히 늙지 않는 불멸의 존재로서의 영원성에 대한 환상과 고독한 존재에 대한 연민이라는 양면적 특성을 부여한 이 영화는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보다 입체적으로 치장하고 있다. 고전적인 캐릭터를 현대적인 배경에 녹여내며 악마적인 공포를 한 꺼풀 벗기고 한층 더욱 신비로운 캐릭터로서의 이미지를 덧씌우는데 성공함으로써 영화적 캐릭터로서 뱀파이어의 수명을 연장하는데 큰 기여를 한 작품이기도 하다.
<렛 미 인>
자신의 방 안에서 칼을 꺼내든 소년은 허공을 위협한다. 매일 같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소년이 할 수 있는 건 대상이 없는 윽박 뿐이다. 어느 날처럼 홀로 집 앞의 나무를 대상으로 화를 풀던 소년은 등 뒤에서 기이한 인기척을 느낀다. 소년, 소녀를 만난다. <렛 미 인>의 원제 <Let the right one in>은 뱀파이어 소녀를 초대하기 위한 주문이다. 외로운 소년과 고립된 소녀는 해가 지고 어두운 밤이 찾아오면 밀회를 시작한다. <렛 미 인>은 아름답고 환상적인 로맨스이자 절절하고 시린 멜로의 감성을 품은 뱀파이어 호러다. 창백하듯 투명한 스웨덴 설원은 평화와 공포가 함께 머무는 중의적 공간이다. 새하얀 눈 위로 내려앉은 햇살이 사라지면 그 위로 피가 맺힌다. <렛 미 인>은 간혹 무덤덤하게 머리를 드는 긴장감에 심박이 뛰다가도 순수한 동심이 진지하게 반짝이는, 뱀파이어라는 소재에 깃든 악의적 관성을 천진난만하게 막아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비범한 재능으로 완성된, 실로 아름답고도 경악할만한 로맨스를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