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만으로 모든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이름 모를 남자, 그리고 유일하게 그 눈빛에 통제 당하지 않는 남자 임규남(고수), 두 남자가 만났다. <초능력자>는 그래서 시작되는 영화다. 세상 누구에게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필요도 없이, 어쩌면 드러낼 수도 없이, 급류처럼 인파가 흐르는 서울 한복판에서 외딴 섬처럼 살아가던 초인(강동원)은 사람을 조종하는 능력으로 대부업자들의 돈을 탈취해내며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유유히 살아간다. 그리고 어느 날처럼 돈을 얻어내기 위해 들어선 대부업자의 사무실에서 규남을 만나게 된다.
초능력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히어로물을 통해 이미 익숙한 소재가 된지 오래다. 할리우드는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 초인들의 운명에 선과 악의 갈등을 입히며 이를 신화적인 이야기로서 발전시켜 왔다. 특별한 능력을 타고났거나 후천적으로 능력을 얻은 이들은 끊임없이 세상의 악에 대항하는 피로한 삶의 딜레마와 누구에게도 자신의 삶을 토로하지 못하는 고민으로 연동되며 점차 비범한 운명론으로 발전됐다. 적어도 할리우드에서는, 세계의 중심을 자부하는 팍스아메리카나에서는 그렇다.
<초능력자>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그것처럼 초능력을 지닌 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고민하지 않는다. 자신의 눈빛으로 사람을 조종하는 능력을 지닌 초인은 그 능력을 통해 세상에 숨어들어간 듯 살아간다. 그에게 그 특별한 능력이란 자기 마음대로 일상을 영위해 나가는 수단으로서 유용할 뿐이며 그는 평범한 타인들과 섞이며 살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진지하게 비관하기 보다는 누구와도 어울릴 필요 없는 삶을 방관하듯 살아간다. 그의 삶에서 체감되는 건 단지 고독이다. <초능력자>의 특별함은 그 특별한 능력을 활용하는 미니멀리즘의 특성에서 발견된다.
이는 대자본으로 기획되는 할리우드의 스케일과 다른 충무로의 입지를 고려한 아이디어의 순기능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창한 슈퍼히어로 서사를 완성하기에는 자본의 너비가 좁은 충무로에서 초능력을 지닌 인간의 대단한 활약상을 전시하기란 무리수다. 이런 여건이 블록버스터의 소재로서 평준화된 상상력 안에서 매몰되어 가던 소재 자체의 특이성을 이끌어내는 기반이 될 수 있음을 <초능력자>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영화 외적인 추리를 벗어나서 <초능력자> 안에서 소재가 활용되는 방식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무엇보다도 <초능력자>는 호러적인 방식을 통해 두 인물의 대립을 긴장감 있게 연출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초능력자>에서 초인에게 조종당하는 인간들이 등장하는 신들은 매번 탁월한 호러적 긴장감을 발생시킨다.
선악의 이분법적 관계를 밀고 나가는 가운데서 두 인물의 연대감이 모호하게 감지되는 건 두 인물이 이 세상과 괴리됐거나 그 사회에서 천대받는 이방인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초능력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은둔하듯 사는 초인과 사회의 하층민 청년으로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어울리며 지내는 규남에게는 연대할 만한 루저로서의 동일한 세대의 감수성이 저절로 엉킨다. 또한 좇고 좇기는 구도로서 대립각을 그리는 두 인물이 서로를 인식한다는 측면에서 두 인물은 서로에 대한 존재적 의미를 누구보다도 강하게 인식하는 상대로서 서로에게 역설적 의미를 부여한다.
사실 두 인물의 대립각 구도에는 서사적인 개연성이 충분하지 않다. 특히 <초능력자>가 초인과 규남의 대립구도를 덩어리 삼은 뒤, 이를 시퀀스의 조각처럼 나누어 굴려나가는 영화라고 생각했을 때 초인을 좇는 규남의 태도에는 보다 긴밀한 개연성을 위한 설득이 가미되어야 마땅하다. 그가 단지 ‘순진하고 착한 청년’이라고 쉽게 건너뛰기에는 치열한 추격전의 양상이 만만치 않다. 캐릭터 관계를 통해 서사를 밀고 나가는 만큼 그에 대한 설득력이 약해진다는 건 곧 이야기 자체의 설득력도 동시에 약해짐을 의미한다. 그 결함을 다분히 우연에 기대어 메우려는 시도가 종종 엿보이는데 이런 무리수는 소재 자체가 발생시키던 흥미를 떨어뜨리고 극적 몰입도를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에 가깝다. 초속은 좋은데 가속이 약하다.
하지만 <초능력자>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히든카드가 있는데, 그것은 마치 한국어를 더빙시킨 것처럼 유창하게 한국말을 구사하는 두 명의 외국인 배우다. 두 배우는 강동원과 고수의 결합에 주목했을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의외의 발견이 될 것이다. 존재만으로 극적 흥미를 배가시키고 보다 차별화된 웃음 코드를 제공함으로써 소재 자체의 특이성과 함께 영화 자체에 묘한 흥미를 돋운다. 농담 섞어 말하자면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새로운 직업 창출에 성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랄까. 물론 그것이 영화적 한계를 보완할 정도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스승은 제자들에게 말한다. “이 길을 선택하는 순간, 너희는 많은 것을 잃게 돼.”각오와 경고가 한 몸에 담긴 언어가 필사적인 절박함을 드러낸다. 영광보단 고난을 명확히 관통하는 스승의 언질 앞에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피땀 흘린 노력의 과정이란 성공이란 방파제를 쌓지 않고서야 쉽게 허물어질 모래성 같은 영예나 다름없다. <킹콩을 들다>는 역도선수를 꿈꾸는 어린 학생들과 금메달에 도전했다 동메달에 머무르고 부상까지 얻은 비운의 역도선수의 삶을 사제라는 관계에 뒤엉켜 넣은 신파다.
금메달에 도전했다 실패한 동메달리스트 이지봉(이범수)은 심각한 부상과 잠재적 질병까지 진단받은 후, 역기를 놓고 은퇴한다. 그에게 동메달이란 애증의 영광이며 무관의 짐이나 다름없다. 1등을 놓친 3등은 예선탈락보다도 더욱 비참한 멸시의 대상이 된다. 그런 어느 날, 매일 노역을 통해 밥벌이를 하던 그에게 전직 국가대표 감독이자 옛 스승(기주봉)이 찾아와 제안을 던진다. 보성의 여자중학교에서 역도를 교육시킬 것을 권한다. 마지 못해 보성으로 내려간 이지봉은 한적하게 낚시나 하며 시간을 죽이려던 중 역도에 관심을 보이는 모종의 소녀들을 만나고 점차 그네들에게 마음을 연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제 때 밥을 챙겨먹지 못하는 영자(조안)가 눈에 밟힌다. 점차 새로운 결심이 생긴다.
<킹콩을 들다>는 스포츠 영화의 외양을 지니고 있지만 한없이 여리디 여린 신파의 마음을 품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킹콩을 들다>는 단지 스포츠 도전기라는 페어플레이 정신만으로 몸통을 이룰 수 없는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다시 한번 들추는 스포츠 신파다. 가난하거나 촌스러운 시골의 고학생들이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채 구타와 욕지거리를 견디며 세워 올린 스포츠 강국의 ‘7전8기’적인 전설적 외피의 속살에 담긴 피와 땀의 잔인한 내면이 공분을 부르고 그 안에서 학대 받는 학생들의 눈물과 신음을 페이소스로 건져 올리는 공식적인 신파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처우가 열악한 대한민국의 속성을 극복한 여성들의 연대기란 점에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연상시키는 바도 없지 않다. 최고가 되지 않고서야 견딜 수 없는 현실이 금메달에 대한 집착과 영광에 대한 속박으로 드라마를 이끈다.
열악한 환경을 무시하듯 엘리트 체육의 금메달 지상주의가 득세하는 국내 체육계의 현실은 스포츠 신파를 위한 좋은 먹잇감이나 다름없다. 연금을 보장하는 금메달에 목숨 걸지 않고선 버틸 재간이 없는 비인기종목 스포츠 선수들의 현실은 스포츠강국 대한민국의 얄팍한 신화를 지탱하는 열악한 기자재다. 아이러니하지만 21세기가 지나도 이런 기자재가 꽤나 쓸만한 소품이 된다. 먹히는 신파를 만드는 도구가 된다. 이건 시대착오적인 영화가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영화의 현실이다. <킹콩을 들다>는 이 열악한 시대에 담긴 근본적 자질이 노골적으로 활용된 현실적 신파다. 가녀린 소녀들의 몸에 구타의 이미지를 새겨넣고 가난한 루저의 슬픔을 묘사하면서도 중간중간 소박한 웃음을 매복하는 <킹콩을 들다>는 정직하다기 보단 적확한 기획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허구를 채워 넣은 드라마의 완성도가 빼어난 건 아니지만 분노가 자각되고 슬픔이 인정되는 수순을 거칠 때 <킹콩을 들다>는 효과적인 신파의 탈을 쓰고 객석을 공략한다. 배우들의 열연도 볼만하지만 가장 큰 볼거리는 여전히 촌스러운 대한민국이다. <킹콩을 들다>는 그 촌스러운 현실의 열악함을 영화적 감정으로 치환하는, 얄팍하지만 효과적인 신파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