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크라이스트 일명 적그리스도, 이 불경한 언어를 제목으로 내건 <안티크라이스트>에는 불순한 기운이 그득하다. <파리넬리>를 통해서 유명해진, 바로크 작곡가 프레데릭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 2막에서 등장하는 아리아 <울게 하소서>가 경건하게 울려 퍼지는 도입부는 강렬한 성애에 빠진 두 남녀의 섹스를 유려한 고속촬영의 방식으로 포착한 뒤, 투명한 흑백의 색감으로 포장해낸다. 그 욕망이 절정의 쾌락으로 분열되는 오르가슴의 찰나를 공유한 부부는 동시간에 벌어지는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삶의 균열로 빠져든다. 극렬한 성욕 속에서 어린 아들의 죽음을 방치하게 된 부부의 일상은 점차 우울과 무기력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광기로 침전돼 간다.
입구와 출구 역할을 하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한 4장의 단락으로 구성된 영화의 서사는 음울한 분위기를 밑천으로 삼아 점차 흉악한 분위기로 발전돼 나간다. 우울과 무기력 속에서 점차 비이성적인 광기로 뻗어나가는 아내(샬롯 갱스부르)의 행위와 이를 관찰하고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남편(윌렘 대포)의 관계는 행위자와 관찰자의 단계를 넘어 가학과 피학의 상대자로 진화한다. 이는 성적인 욕망을 넘어서서 상대에 대한, 혹은 스스로에 대한 파괴적 희열을 느끼는 새디즘과 매조히즘의 대비적인 양상까지 맞닿는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가학과 피학의 대비적 상징에 가깝다. 그리고 이는 이성적인 (척 하지만 실상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는) 남성과 비이성적인 광기로 물들어가는 여성의 대비를 통해 때때로 우스꽝스러운 은유로 가 닿는다.
‘자연은 악마의 교회’라 일컫는 <안티크라이스트>는 종교모독이라는 주제를 건드릴만한 요소로 치장돼 있으나 이를 단순히 종교에 대한 직접적인 겨냥이라 국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는 신앙에 가까운 인간의 이성적 신념이 무지한 광기로 변질되는 과정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이자 상징과 은유를 동원한 독설에 가깝다. 11세기 중세 유럽에서 십자군 전쟁 시절의 광기 어린 역사를 배경으로 둔 <리날도>의 <울게 하소서>가 오프닝과 엔딩 시퀀스에 사용되는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이성을 무기로 둔 한 남성이 피라미드를 그려나가며 여성의 비이성적인 행위를 악마적인 본성과 연결해나가는 과정은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을 둘러싼 광기의 매커니즘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남성성의 기득권으로 무장한 사회 전반에 대한 공격적인 은유처럼 보인다. 특히 에필로그로 명명된 엔딩 시퀀스는 이런 영화적 메타포를 블랙코미디의 정점으로 끌어올린다.
(포르노 배우를 대역으로 삼아 촬영했다는) 성기 노출과 삽입 신을 비롯해서 (언론시사회에서는 공개됐지만 정식 상영본에서는 삭제된다는) 여성의 성기 절단을 비롯한 극악한 신체 훼손 신 등, 당신의 자극적 역치를 시험에 들게 할만한 몇몇 장면이 존재하지만 <안티크라이스트>는 단순히 극악무도한 이미지로 점철된 영화라 폄하할만한 작품이 아니다. 이성의 껍데기가 벗겨진 채 쾌락과 생존이라는 동물적인 본능만이 남겨진 남녀의 끔찍한 양상을 묘사하는 과정은 자연 상태의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힘의 본질과 이성적 무기력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과 같다. 성적 행위를 비롯한 폭력의 상응까지, 극단적인 광기와 함께 가학과 피학의 매커니즘에 갇힌 남녀의 양태를 묘사하는 영화는 문명과 이성이라는 제어로부터 발가벗겨진 인간의 본질이 이토록 손쉽게 파괴될 수 있는 나약한 것임을 강렬하게 조명한다. 광기란 결국 순수한 극단의 소산이다. 정이든, 반이든, 가학과 피학은 어떤 식으로든 합의 광기로 통하게 돼있다. 그것이, 아니, 그것도 결국 인간이다.
지난 2005년, 영국BBC방송은 ‘세상을 바꾼 대중문화’란 주제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밥 딜런의 ‘Like a rolling stone’이 1위를 차지했다고 발표했다. 통기타 선율을 밑그림으로 삼아 나지막하게 흐르는 밥 딜런의 포크송은 겉으로 소박했지만 듣는 이를 안으로 요동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전쟁의 광기가 도사리고 차별이 만연하던 시대에서 밥 딜런의 노래는 대중의 처참한 분노를 대변했고 그들의 삶에 일말의 위안을 안겨줬다. 물론 그것이 그가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극 초반, 스크린에 나열되는 문구-Inspired by the music & many lives of Bob Dylan-와 같이 <아임 낫 데어>는 밥 딜런의 음악과 많은 삶으로부터 얻은 영감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쥬드(케이트 블란챗)를 비추는 카메라 너머로 들려오는 나레이션은 그의 영혼이 안식을 얻었음을 선포하며 게걸스러운 대중이 그의 유물을 공유할 것이라 말한다. 그 이미지는 각각 시인(poet), 예언가(prophet), 무법자(outlaw), 가짜(fake), 인기스타(star of electricity)의 얼굴로 나열된다. 이는 <아임 낫 데어>가 밥 딜런의 육체를 재연하는 전형적인 전기영화가 아님을 표명하는 바이기도 하다.
<아임 낫 데어>에서 등장하는 연령과 생김새가 각각 다른 6인의 이미지는 7가지 삶으로 호명된다. 그들은 각각 밥 딜런이 아니지만 그를 연상시키는 단면으로써 밥 딜런을 이룬다. 그들은 밥 딜런이면서도 밥 딜런이 아니다. 동시에 그 개별적 이미지들은 밥 딜런의 것이 아닌 ‘(게걸스러운) 대중’의 것임에 틀림없다. 그 이미지를 생성한 건 타인으로부터 추상적으로 인지된 밥 딜런의 초상들이다. <아임 낫 데어>는 타자화된 밥 딜런을 콜라주 하듯 배열하며 스크린에 수집한다. 그는 세상의 불의에 맞서던 정의로운 포크 싱어였지만 일렉기타를 든 포크의 변절자였다. 좀처럼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주의적 은둔자이며, 세상의 규격에 맞추길 거부하는 무례한 저항가였다. 그는 무력한 급진주의자였으며, 강건한 자유주의자였다. 영화는 이처럼 밥 딜런을 규정하던 다양한 세계적 시선 속에서 무심코 존재하던 밥 딜런의 조각들을 거칠게 조립한다.
물론 밥 딜런을 연상시킬 만큼 그와 근접한 이미지의 쥬드와 같은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인물은 그의 삶 일부를 채취해내듯 낯설거나 그가 남긴 궤적을 통해 얻어지는 영감의 흔적처럼 막연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밥 딜런으로부터 발생한 것이거나 그를 만들어낸 근본이라 추측되는 것들이다. 하나같이 인물들은 밥 딜런을 향하고 있는 동시에 밥 딜런을 갈망하게 만든다. 예리한 추상과 철저한 해석으로부터 완성된 인물들은 밥 딜런과 현격하게 동떨어진 모습으로써 그를 완벽하게 배려한다. 심지어 밥 딜런의 이미지에 가장 근접한 쥬드가 여배우인 케이트 블란챗의 육체로 이뤄졌다는 점은 <아임 낫 데어>가 철저하게 인물들과 밥 딜런 사이에 괴리감을 형성시킴으로써 인물에 대한 주관적 시선들을 철저하게 객관화시키려 했음을 드러내는 징표와 같다.
<아임 낫 데어>가 밥 딜런을 규정하지 않는 방식으로써 밥 딜런을 연상시킨다는 점은 이 영화가 진정 밥 딜런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미지로 구체화시킬 수 없는 인간에 대한 드넓은 단상들을 하나로 융합하지 않고 스펙트럼 그 자체로 펼쳐놓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아임 낫 데어>는 가장 규정하기 힘든 전기적 영화이자 밥 딜런이라는 불가해한 이미지에 가장 탁월하게 접근한 작품으로 남을 수 있게 됐다. 모든 규정을 거부한 밥 딜런을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아임 낫 데어>는 밥 딜런을 탁월하게 연상시킨다. 스크린에는 밥 딜런을 제외한 밥 딜런의 모든 것들이 담겨있으며, 그를 통해 관객은 밥 딜런이 존재하지 않는 밥 딜런의 영화를 통해 밥 딜런을 이해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이해’란 결코 정의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인지를 의미한다. 결국 <아임 낫 데어>는 한 인간에 대한 일방적인 시선으로부터 탈피함으로써 한 인간을 완벽하게 재생한다. 그것은 너비가 불분명한 스펙트럼을 지닌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경의에서 비롯된 탐구라 할만한 것이다. 그리고 뛰어난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이 영화의 캐스팅 경위도, 뛰어난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한 이 영화의 OST 역시도, 하나같이 그 경의를 위한 것이라 말하기에 손색없이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