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왕대륙
왕대륙이라고 했다. 쉽게 잊혀질만한 이름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여전히 생소하겠지만 왕대륙은 이미 쓰나미 같은 팬덤을 부르는 뜨거운 이름이다. 이 남자가 문득 궁금해졌다.
발음할수록 거대하게 와 닿는 이름이다. 왕대륙이라니, 한반도는 집어삼키고도 남을만한 이름 아닌가. 그 거대한 이름이 심심찮게 들리기 시작한 건 대만영화 <나의 소녀시대>가 국내에서 개봉한 5월 11일부터였을 것이다. 대만에서 역대 흥행 최고 기록을 얻었다는 이 작품은 중국, 홍콩, 싱가포르에서도 차례대로 개봉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도장격파에 나선 무림고수와 같은 행보를 이어나가던 이 영화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국내 영화팬들에게도 심상찮은 반응을 얻었고, 올해 개봉 이후 적은 상영관 수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관객을 몰았다. 결국 대만영화 최초로 40만 관객을 돌파한 흥행작이 됐다.
<나의 소녀시대>는 대만영화뿐만 아니라 근래에 개봉한 중화권 영화 가운데서도 이례적인 흥행작이다. <응답하라 1994>처럼 1994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았고, 학창시절의 우정과 사랑이라는 보편적 경험을 낭만적으로 극화했는데 이를 통해 대만이라는 지역적 정서를 뛰어넘는, 보편적 공감대와 트렌디한 매력을 전파하는데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청춘이란 단어로부터 툭 튀어나와버린 듯한 캐릭터들은 자칫하면 유치하고 뻔하게 읽힐 수 있는 영화의 감정선에 특별한 숨을 불어넣는 생생한 육체가 됐다. <나의 소녀시대>의 흥행이 주연배우들을 향한 팬덤으로 이어진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유덕화의 아내가 되길 꿈꾸는 평범한 소녀 임진실을 연기한 송운화와 교내 최고의 불량학생이자 짱으로 군림하는 소년 서태우를 연기한 왕대륙을 중심으로 태풍의 눈이 형성됐다. 그리고 이런 기류를 감지한 배우들이 내한 의사를 밝히며 팬들의 술렁임도 가속화됐다. 특히 유덕화의 아내가 되길 꿈꾸는 임진실처럼 SNS상에서 왕대륙의 여자친구를 자처할 정도로 지극한 팬심을 내보이길 주저하지 않던 여성팬들의 관심이 지대했다. 지난 6월 5일에 내한한 왕대륙이 <나의 소녀시대> 상영관을 찾아 무대인사 일정을 소화했을 땐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암표까지 판매됐을 정도였다. 이에 왕대륙은 ‘비글’처럼 상영관 곳곳을 분주히 오가며 팬심에 적극적으로 부응했다. 그를 따라잡는 경호원들이 진땀을 흘릴 정도였다. 덕분에 ‘비글미’ 있는 배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렇게 1박 2일간의 짧은 일정을 꽉 채우고 돌아간 왕대륙은 한 달여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촬영 중인 영화가 있어서 겨우 시간을 내서 온 거라 일정이 빠듯했지만 내가 출연한 영화를 사랑해준 팬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자리를 갖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기분은 좋았다. 한편으론 한국에선 첫 팬미팅이라 긴장됐다.” 왕대륙이 다시 한국에 발을 디딘 건 7월 13일 새벽 1시였다. 그리고 그 늦은 시간에도 왕대륙을 마중하기 위해 인천공항에 모여든 팬들은 왕대륙의 본명인 ‘왕 따루(Wang Ta Lu)’를 외치며 선물 공세를 펼쳤다. 그리고 당일 오후, 650명에 달하는 팬들과 두 시간 여의 팬미팅을 가졌다. 팬미팅 행사가 끝나고 나서도 거의 모든 팬들과 하나하나 사진을 찍어주는데 여념이 없었다는 관계자의 전언을 듣고 그에게 한국 팬과의 만남이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다.
“미인이 많다.” 대답을 한 뒤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는, 장난끼가 가득 배어 있는 표정에서 <나의 소녀시대>의 쉬타이위가 느껴졌다. 거창한 이름만큼이나 커다란 미소가 짓궂게 느껴지지만 결코 밉지 않은 유쾌함. “사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팬들은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해주는 거 같다. 예를 들면 그저 웃기만 해도 좋아해주고, 작은 애교에도 환호해 주니까. 다만 안타까운 점은 있다. 사실 나는 내 스스로가 굉장히 유머러스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그런 면을 제대로 이해시킬 수 없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팬들 하나하나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것이었을까.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말없이 가만히 서있는 것보다 직접 몸을 움직여서 팬들을 만나는 게 즐겁다. 다른 나라를 가도 그렇다.” 그러니까 진정 ‘비글미’가 넘치는 남자인 것이다.
1991년생인 왕대륙에게 1994년을 배경에 둔 <나의 소녀시대>는 겪어보지 못한 시절이다. 경험해 보지 못한 시절의 주인공이 됐으니 타임머신을 타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쉬타이위는 굉장히 캐주얼한 캐릭터이고 그에게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상황이 묘사된다. 게다가 러브스토리가 중심에 놓인 영화였기 때문에 1994년이란 시절이 큰 제약으로 다가오는 것 같진 않았다. 결국 내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바탕으로 연기를 했기 때문에 캐릭터에 몰입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물론 거저 먹듯이 연기했다는 말은 아니다. 왕대륙이 연기한 쉬타이위는 문제아들 중에서도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대장 노릇을 하는 인물이다. “현장에서 다른 배우나 스태프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있곤 했다. 패왕 같은 캐릭터라 그에 어울리는 패기나 두목 같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래도 거칠고 사나운 면은 나와 다른 지점이기 때문에 성격을 조절해야 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자신과 닮았다고 느낀 점은 없었을까? “장난끼가 많다. 무엇보다도 나처럼 굉장히 귀엽다는 점?”
장난끼가 다분하고 거칠게 행동하는 쉬타이위는 마음을 바로잡고 공부에 매진하지만 심각한 편견에 맞서야 한다. 왕대륙은 그런 쉬타이위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나도 남들에게 잘 공감 받지 못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말로 부정당한 경험이 있다.” 다행히도 왕대륙은 쉬타이위처럼 삐뚤어지지 않았다. “결국 내 의지를 꺾지 않기 위해 더욱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에겐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일곱 명 정도 있다. 그 친구들이 있어서 괜찮았다. 특히 배우로 활동하는 가진동과는 15년 넘게 친구로 지냈다.” 가진동은 지난 2012년에 개봉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로 왕대륙보다도 한국에 먼저 알려진 대만 출신 배우이기도 하다. “나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남들이 뭐라고 말하는지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주변사람들과 어려움이나 고통을 나누기 보단 즐거움을 나누려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서 코미디를 많이 좋아한다.”
왕대륙은 코미디물에 대한 애정을 적지 않게 언급해 왔다.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주성치를 꼽기도 했다. 그건 배우로서의 재능이 코미디와 가깝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8년 동안 다양한 작품을 소화하면서 코미디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았다. 한번은 진지하게 정극 연기를 하고 있음에도 내가 등장할 때마다 관객들이 많이 웃는 걸 보고 내게 사람을 웃기는 소질이 있음을 알았다. 이런 재능이 있다면 제대로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소녀시대>에서 연기한 쉬타이위를 통해서도 웃음을 주고자 참고한 것이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일본만화를 좋아하는데, <슬램덩크>를 비롯해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코믹한 캐릭터 톤을 많이 참고했다. 실제로 쉬타이위는 <슬램덩크>의 강백호를 닮았다.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저돌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자상하고 따뜻한 남자. 실제로 왕대륙은 얼마 전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강백호의 그림을 게시한 적이 있다. 아무래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왕대륙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8년간의 무명생활을 겪었다고 말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소녀시대>는 왕대륙이 배우라는 궤도에 올라 처음 성공적으로 착륙한 경유지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그에게 지난 무명시절은 어떻게 다가올지 문득 궁금했다. “사실 생각보다 힘들진 않았다. 1년 동안 한 작품도 하지 못했던 적은 없었으니까. 평생 자신에게 어울리는 캐릭터를 기다리는 것이 배우의 운명이란 걸 알았기 때문에 그 시간을 보내는 게 어렵진 않았다. 결국 그 시절이 연기할 수 있는 힘으로 남겨진 것 같다.” 어쩌면 그건 처음부터 대단한 야심을 품고 연기에 도전한 것이 아니었던 덕분일지도 모른다. “로드 캐스팅을 받고 광고를 찍게 됐는데 광고에서의 연기는 짧은 시간만 허락되는 지라 내가 과연 제대로 된 연기를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결국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사실 당시엔 어렸을 때라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물론 지금의 왕대륙은 배우로서 진지한 미래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스물다섯 살에 찾아온 이른 성공에 도취되지 않고자 마음을 다잡는다. “아직 젊으니까 조급해하지 않고 지금 내가 가진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해낼 거다. 천천히 시간을 들이며 다양한 이들로부터 많은 걸 배우고 싶다. 그래서 진짜로 연기하고 싶은 캐릭터를 생각해보고 언젠가는 그에 어울리는 배역이나 스토리를 직접 찾아갈 수도 있을 거다.”
<나의 소녀시대>에서 가장 특별한 이벤트는 유덕화가 깜짝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작품의 제작자로 참여하기도 한 그는 현재 중화권 배우들이 우러러보는 대배우다. 왕대륙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녀시대>에선 유덕화가 젊은 시절에 출연했던 <천장지구>의 주제가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쉬타이위가 그 시절의 유덕화를 따라 하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왕대륙은 실제 유덕화의 모습을 따라잡기 위한 디테일에 고심했다고 설명한다. “청재킷을 똑바로 입으면 안 된다. 어깨에서 벗겨질 것 같은 느낌으로 살짝 걸쳐야 한다. 유덕화는 언제나 그렇게 입었으니까.” 그러면서 익살맞게 코피를 닦는 흉내를 내며 말했다. “유덕화도 한때 거친 남자 역할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왕대륙에게 유덕화는 단순한 별이 아니다. 자신의 위치를 되짚게 만드는 북극성과 같은 존재다. “유덕화도 젊은 시절엔 다양한 역할을 많이 소화했다. 그처럼 멋진 배우가 되려면 다른 배우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왕대륙은 시간을 달릴 준비가 돼있다. “배우로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섣불리 변신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잘 할 수 있는 역할에 집중하고 좀 더 내공이 쌓이면 다른 역할을 시도해보고 싶다.”
<나의 소녀시대>는 학창시절의 아련한 짝사랑에 관한 영화다. 왕대륙에게도 영화 같은 과거가 있다. “어렸을 때 한 여학생을 좋아했는데 문제는 같은 반의 모든 남학생이 그 여학생을 좋아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마음을 고백하지 못했고, 1년 뒤 그녀는 유학을 떠나버렸다. 그런데 그녀가 유학을 간 뒤 한 친구가 그녀도 나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기회가 된다면 그녀와 같이 <나의 소녀시대>를 보고 싶다.” 로맨틱한 사연이다. 그렇다면 왕대륙은 쉬타이위와 달리 우정보단 사랑을 선택할 수 있을까? “만약 친구와 한 여자를 두고 다투게 된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포기할 거다.” 단호했다. 그럼 아무래도 20년 동안 사랑하는 여자를 기다릴 순 없는 걸까? “물론이지. 그건 영화다! (웃음)” 역시 단호했다.
영화 촬영 스케줄 때문에 하루에 서너 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한다는 왕대륙은 한국에서 보낸 1박2일 동안에도 동분서주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인터뷰와 촬영이 끝나면 밤 비행기로 대만에 돌아간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 촬영 중인 무협 판타지 영화 <교주전>의 현장으로 곧바로 돌아갈 예정이다. 게다가 성룡이 출연하는 코믹 액션물인 <철도비호>와 중국의 거장 장이모우 감독의 딸인 장말이 연출하는 판타지물 <28세 미성년>을 준비하는 등 바쁜 일정이 줄줄이 이어질 예정이다. 그러니 서울을 두 번이나 방문했음에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게 그럴만했다. 그러다 문득 서울에서 어딜 가면 좋을지 추천해달라며 왕대륙이 물었다. 하지만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아 생각할 시간을 청했다. 그리고 그와 헤어지고 나서야 답변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니 지금까지 이 글을 읽은 왕대륙의 팬들은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대신 답변을 전해주길 부탁한다. 물론 비글미 넘치게 분주한 일정을 자청하는 그가 다시 한국을 찾았을 때에도 한가하게 여유를 즐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HARPER'S BAZZAR AUGUST 2016 NO.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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