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기차게 소개팅을 하는데도 만날 남자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요즘 남자들 속을 도통 모르겠단다. 만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썸 타는 남자들이 늘었다. 이유가 뭘까?
언젠가부터 A군은 심심찮게 괜찮은 레스토랑을 물었다. 소개팅 때문이라고 했다. 한 주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소개팅을 했다. 어차피 같은 여자를 매주 만나는 것도 아닐 텐데 그렇게 열심히 장소를 옮겨 다니는 이유를 물었다. “장소가 중요하니까.” 너무 당연해서 당황스러운 답변이었다. 하지만 곧 삼면에서 불어오는 냉기 같은 멘트에 정신이 맑아졌다. “나도
같은 곳을 여러 번 가면 질리거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하면 최소한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여야
할 거 아니야.” 유레카! 그렇다. 시간과 돈을 투자했으니 손실을 최소화시켜야 한다. 언제부턴가 남자는
소개팅의 기회비용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식사라도 맛있게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 종의 진화다.
사실 이미 기회비용을 이용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심심하니까 소개팅할
때도 있어. 특별히 어떤 남자를 만나고 싶다기 보단 특별한 계획도 없는데 소개팅 제안이 들어오면 그냥
나가는 거야. 맛있는 것도 먹고, 그냥 놀다 들어오는 거지.” B양의 말처럼 어떤 여자들에게 소개팅이란 킬링타임무비 같은 것이었다. 소개팅
자리에서 여자에게 계산을 시키는 남자를 만난다는 건 벼락을 맞을 확률과 비례할 것이니 나갈 준비만 하면 된다. 그래서
여자들은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라도 두세 번 만나는 게 부담스럽지 않다. 남자들은 계산하라는 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여자들에게 애프터 신청은 중요하다. 소개팅에서
애프터 신청을 받지 못한다는 건 치욕적인 일이란다. 하지만 요즘 남자들은 예전 같지가 않다. 대부분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매너 모드는 유지한다. 하지만 헤어지면
꺼진 전화기처럼 울리질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은 여자와의 관계를 한 발 이상 내딛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은 여자에게 돈도 쓰고, 시간도 쓰는 건 한번이면
족하다는 거다. 남자의 애프터 신청은 더 이상 매너가 아니다. 확실한
투자다. 어차피 소개팅 기회는 차고 넘친다.
“소개팅에서 만났을 때 진짜 괜찮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은 대부분 콧대가
높다.” C양이 말한 ‘진짜 괜찮다고 생각하는 남자’의 기준은 무엇일까? 키가 크고, 나이는
적당하고, 학벌도 좋고, 직장도 좋고, 얼굴은 그냥 못 볼 정도만 아니라면야. 왜 얼굴보다 키일까? “키가 큰 남자는 대부분 잘 꾸며놓으면 괜찮아지거든. 얼굴도 잘
생기면 좋고.” 하지만 요즘 그런 남자들은 이미 자신의 몸값을 안다.
시간은 남자의 편이다. 30대 여자들은 소개팅 시장에서 30대
남자들보다 단가가 낮게 책정된다. “원래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기보다 더 나은 수준의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30대가 넘어가면 점점 자기랑 비슷한
수준의 남자랑만 결혼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니까.” 30대 이후의 미혼 남자들이란 결혼 시기를 놓쳤거나
결혼이 절실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한쪽은 매력이 없고, 한쪽은
믿을 수 없다. 고로 이상적인 남자를 찾기가 어렵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어”라고
D군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네가 어제 한 일을 알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는 없어도 여자는 만난다는 사실을. “사실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는 여자는 많지. 하지만 마음에 드는 여자는 정말 없다니까. 그냥 요즘은 섹스하려고 여자 만나는 거 같아.” E군은 잘 생기고, 키도 컸으며 결정적으로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여자가
많았다. 혹자는 이게 무슨 된장녀 아메리카노 원샷하는 소리냐고 하겠지만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다. 지하철 3호선 타고 다닌다며 당당하게 말하는 남자의 말에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이던 여자도 외제차 키를 무심하듯 시크하게 테이블에 올려놓은 남자 옆에 앉는 법이다. 키도
크고, 잘 생기고, 돈도 많아 보이는 남자가 매너도 좋으니까
끌리는 것도 당연하다. 다만 체크인과 체크아웃 시간이 정해진 호텔 같은 남자라서 안타까울 뿐이다. 룸서비스 시간은 정해져 있다. 그의 원나잇에 투숙한 뒤 새로운 방을
찾아야 한다. 제로섬 게임이다. 자신이 머물 방을 찾아야
하는 여자는 반복되는 패턴이 지겹고, 방에 새로운 여자를 끌어들여야 하는 남자는 자신의 욕망이 허망하다.
100세 시대라는데, 인생은
길어졌지만 서로가 어떤 사람인가를 천천히 알아갈 만한 인내심은 줄었다. 여유가 사라졌다. 적자생존의 진화 과정을 거친 동물적 본능으로 더 나은 사람을 선택하고자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그러다 보니 선택을 위한 인내심은 증발하고 만남과 이별의 패턴에 대한 익숙함만 남는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소개팅을 아무리 해도 남자를 만날 수가 없다니. 소개팅을 하러 나갔는데 음식에 반해야 한다니. 여자들은 성에 차는
남자를 찾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정말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면 콧대가 너무 높다고 말한다. 덧셈, 뺄셈 수준이었던 남자들이 언젠가부터 미분, 적분 수준으로 진화했다. 상대적으로 남자들은 여자를 만나는 게 쉬워졌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기는 역시 어렵다고 말한다. 왠지
이 여자보다 더 괜찮은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거 같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내가 투자한 자리인데 더 나은
선택을 해야 하는 게 도리다. 그리고 여자를 만나지 않아도 놀 사람은 많다. 주변에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도 적지 않다. 플레이보이들이 넘친다. 남자들끼리 모여서 와인을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것도 지겹진 않다. 여자에게
쓰던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걸 깨달았다. 세상은 넓고 기회비용은 많다.
“아무래도 요즘 남자들은 박력이 줄어들었지.” 여자의 입에서 발음된 게 아니다. F군은 계속 발음했다. “사실 여자들도 이젠 남자한테 기댈 필요 없잖아. 나름대로 사회적
지위가 생긴 여자도 많고. 그만큼 남자들이 여자들을 압도할 수 있는 이유가 하나 줄어든 거 아냐. 그러니까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그러니까 계속 썸만 타는 거지.” 일리 있는 말이다. 터프가이의 시대는 끝났다. 화끈했던 남자들은 맹탕이 됐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사랑은 쟁취하는 게 아니라 기다리는 거라고. 나를 보고 자꾸 웃어주는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착각하던 남자들은 그녀의 미소를 닮은 매너로 여자들을 착각하게 만드는 법을 익혔다. 썸 태우는 기술을 익혔다. 경제적인 우월감을 창처럼 휘두르던 남자들은
이제 썸이라는 방패 뒤로 숨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전통적으로 한국사회에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우월한 존재여야 했다. 그
수단은 경제력이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남자들의 경제력은 여자를 압도하지 못한다. 그만큼 비슷한 여건을 지닌 또래 여성에게 자격지심을 느끼는 남자들도 늘어났고,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점할 수 있는 어린 여자들을 살피게 된다. 그런데 사실 이건 남녀의
관계가 평등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남자들의 지배력이 떨어진 건 여자들의 지위가 상승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페어플레이가 가능해졌다. 그렇다면 보다 명확해진다. 남자가 계산하는 게 당연하다는 암묵적 룰도 깨져야 한다. 페어게임을
원한다는 신호는 분명 매력적일 거다. 뺨 맞은 재벌 2세처럼
‘이런 여자 처음인데’라는 인상만 줘도 일단은 성공이다. 남자는 단순하다. 그러니 알려줘야 한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 역시 이 관계에 있어서 동등한 투자자임을 어필해야 한다. 같은 출발선 위에 서 있는 존재임을 깨우치게 만들어야 한다. 물론
남자가 당신의 지갑을 사랑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썸’을 타고 말지.
1년만의 출연작입니다.
개봉일이 다가오니 시험 보는 수험생 같은 느낌이 드네요. 시험문제를 빨리 봤으면 좋겠다는 설렘도 있고, 한편으론 긴장감이나 걱정도 많고, 초조함과 부단함이 복합적으로 섞인 기분이에요.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한 기대감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시도적으로, 작품적으로, 개인적으로도.
사실 굳이 <쌍화점>이 아니라도 유하 감독님과는 한 작품이라도 같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죠. 하지만 제게 섭외가 들어왔을 땐 좀 의아하기도 했어요. 어쨌든 <쌍화점> 시나리오를 보고 왕후 역할에 푹 빠져서 진짜 꼭 해보고 싶어졌죠. 제 스스로 연기자라는 일을 갖고 살아간다면 한번쯤 꼭 해보고 싶은 역할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욕심이 많이 났죠.
심리적인 변화가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드는 양상입니다.
단아하고 아름답고 고결한 느낌이 있는 반면, 굉장히 강한 카리스마가 있고 냉정한 면모도 있으니까요. 그런 이중적인 면모를 지닌 왕후의 모습을 생각하면 어떤 배우라도 한번쯤 연기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겉으로 보여지는 면과 안으로 숨겨진 면을 적절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점에서 난관도 있었을 겁니다.
쉽지 않았죠. 쉽지 않으리란 생각 때문에 한번 경험해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고요. 경험하고 나니까 역시나 유하 감독님께서 많은 것을 가르쳐주시고 일깨워 주셨다는 걸 느꼈어요.
유하 감독님의 전작들은 보셨죠?
예.
전작인 <말죽거리 잔혹사>나 <비열한 거리>처럼 유하 감독이 남성을 중심에 둔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의 비중은 다소 미비합니다. <쌍화점>도 두 남자가 중심이 되는 영화죠. 여성 캐릭터가 소외되진 않을까라는 걱정은 없었습니까?
일단 왕후는 영화를 끌고 가는 인물에서 제외되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왕후는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분량이 많이 나오느냐, 영화를 끌고 가는 캐릭터냐, 를 떠나서 얼마나 임팩트가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왕후는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고, 영화의 모든 사건에 연루된 인물이기 때문에 영화에서 배제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어요. 유하 감독님은 남자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시는 경우가 많지만 남자의 이야기 가운데서도 여자가 빠지면 안 되는 상황이 굉장히 많잖아요.
남자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성공했다는 인상이 남더군요. 어쩌면 저에 대한 기대치가 크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요? (웃음)
많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아무래도 포커스는 두 남자에게 맞춰졌으니까.
(웃음)
노출 연기가 과감했습니다. 전작인 <색즉시공2>에서 얇게나마 노출씬이 있었는데 어쩌면 그때 단단해진 바가 있기에 이번 결정이 가능했던 게 아닐까 싶은데요.
사실 <색즉시공2>는 노출연기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그건 단지 인서트에 불과한 상상씬에서 기술적 착오로 인해서 노출되지 말아야 할 부분이 나왔던 거고, 그게 저에게 어떤 경험이 됐다는 생각은 안 하니까요. 저는 <색즉시공2>에서의 경아 역할이 좋아서 연기했지만 노출을 염두로 두진 않았을 때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색즉시공2>가 <쌍화점>을 선택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쌍화점>을 선택하고 끝내기까지 저는 처음이란 생각과 신인이란 생각으로 모든 걸 버리고 시작해야겠다는 용기밖에 없었죠.
분명 부담되는 결정이었을 텐데 무엇을 통해 용기를 얻었나요?
제 앞길을 이끌어 주실 분은 감독님밖에 안 계셨고 그 길의 지도는 <쌍화점>이라는 시나리오였죠. 어느 누군가가 제게 득이 될만하다 생각하는 무언가를 저에게 주시면 오히려 그건 짐이 됐어요. 유하 감독님께서는 공부한다고 이거 저거 참고하거나 찾아보는 걸 싫어하셨거든요. 오로지 순수한 왕과 왕후와 홍림을 원하셨고 그 사이에 뭔가가 들어가서 포장되는 걸 굉장히 싫어하셨어요. 그래서 <쌍화점>에 있어서는 외적인 부분을 신경 쓰지 않아야 했고요.
하지만 부담되는 건 사실이었을 텐데요. 개인적으로 그런 부담을 극복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이걸 끝내고 나서 어떻게 하겠다, 사실 이럴 정도로 저는 정치적인 사람이 못돼요. 전 감정적인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쌍화점>에서의 베드씬은 몸이 얼만큼 노출되고 어떤 자세가 나오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베드씬을 위한 베드씬이 아니에요. 클로즈업이 굉장히 많이 나오죠. 그 부분이 가장 많이 걱정되고 우려되는 부분이었어요. 몸과 자세는 감독님께서 잡아주신 포지션대로 하면 되지만 표정이 클로즈업되는 경우엔 제가 감정을 받아들이고 인지하지 못하면 얼굴로 표정이 나오지 못하니까, 그 부분이 사실 가장 큰 부담이었어요.
<쌍화점>을 통해 단순히 노출연기를 했다는 것 이상의 어떤 경계를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연기적인 선도 그렇고, 저에 대한 선도 그렇고, 제 연기 생활에 있어서 어떤 큰 산을 하나 넘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스스로도 그런 터닝포인트를 염두에 둔 선택이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그냥 여태까지 제가 선택한 작품의 폭이 그다지 넓지는 않았어도 언제나 즐겁게 일하자는 생각으로 생활을 꾸려왔으니까요. 절 만족시키면서 행복하게 일하자는 건데, 가만히 보면 제가 지금껏 했던 작품 중 인기가 많았던 캐릭터와 닮은 이미지를 붙잡고 순탄하게 갈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전 그게 싫었어요. 어떤 맹목적인 한가지 이미지로 많은 분들에게 어필하는 것 자체가 정체된 느낌이니까요. 그래서 <색즉시공2>도 하게 됐고 그 후로 찾은 게 <쌍화점>이었죠. 그래서 어쩌면 지금까지 했던 제 역할들의 이미지가 전부 다르게 보일 수도 있을 텐데 저는 그게 만족스러워요. 내가 이번 한 작품 하고 나면 남들이 이렇게 보겠지? 그러면 그 다음 작품은 어떤 걸 하고 그 다음 작품은 어떤 걸 해야지. 이런 정치적인 생각은 아직까진 잘 모르겠어요. 해본 적이 없어서.
왕후는 수동적인 여자였지만 홍림과의 로맨스를 통해 적극적인 여자가 됩니다. 캐릭터의 심리적 변화에 공감하는 게 관건이었을 거 같습니다.
왕후는 원에서 공주로 있다가 정치적인 정략 결혼으로 고려에 와서 한 남자를 지아비로 섬기고 살아야 하는데 알고 보니까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거죠. 그 모든 걸 받아들여야 하는 만큼 홍림에 대한 감정이 미움과 시기와 질투를 넘어선 감정이지 않을까, 라고 감독님이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그게 연민일까? 아니면 동정일까? 아니면 동질감? 지효야, 어떤 걸까?’ 감독님이 이렇게 물었을 때 저는 단지 여자가 갖는 시기나 질투 이상의 것이란 왕후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게 왕후고, 왕후는 모든 걸 받아들여야 되고, 감싸야 되고, 내색하지 않아야 되는 외로운 사람인 거에요. 그러다가 제 자리가 위태로워지고 지아비로 섬기는 왕의 자리가 위태로워지고 고려라는 나라가 위태로워지니까 정치적인 모든 상황을 배제하지 못하고 여자로서는 정말 치욕스런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잖아요. 그래서 대리합궁을 했는데 제가 생각하는 대리합궁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거죠.
의외의 결과를 낳게 되는 계기가 돼버리죠. 감독님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굉장히 연하디 연한 연시가 바늘로 콕 찔렸을 때 내용물이 터져 나오는 것과 같다고. 다만 왕후로서 난 터지지 않았다고 믿으면서 내용물을 감추다 보니까 거짓말을 하게 되고 자기 스스로까지 속이게 되는 거죠. 그러다가 아예 겉잡을 수 없이 흘러나오니까 아예 오히려 그거 하나만 보고 가버리는 거에요. 감독님께서 그렇게 예를 들어서 말씀해주시니까 많은 이해가 갔어요.
아무 것도 몰랐던 여자가 처음으로 뭔가를 깨닫고 느끼게 됨으로써 변화를 겪는 셈이기도 합니다.
그렇죠. 한번도 그런 경험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홍림과 왕후의 입장은 비슷했다고 느껴집니다. 홍림 역시 자신의 욕망 자체를 인식할 겨를 없이 왕에 대한 충성심만으로 모든 행동을 당연시했던 것뿐이니까요. 그래서 홍림과 왕후의 사랑은 로맨스이기도 하지만 동병상련의 연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왕이 홍림에게 갖는 감정이 질투 시기를 더 넘어선 거라고 감독님이 말씀을 하셨던 거고요.
왕후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대상이 되는 셈이죠.
그렇게 왕후가 점점 한 사람만을 불같이 사랑하는 여자로 변해가기 때문에 점점 이 세 사람의 관계가 얽히고 설키고 거짓말하게 되고 배신하게 되고 슬픔과 상처가 남고 파국으로 치닫는 것 같아요.
아까 말했듯이 왕후는 사랑을 통해 소극적인 여자에서 적극적인 여자로 변합니다. 그렇다면 본인은 어떤 사람이라 생각됩니까?
둘 다? (웃음) 사실 저는 항상 제 안에 있는 부분들을 늘 하나씩 꺼내서 보여드리려 노력하거든요. 그래서 <여고괴담3>의 진성이, <썸>의 예진, <궁>의 효림이, <주몽>의 예소야, <색즉시공2>의 경아, <쌍화점>의 왕후까지, 모두 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에서 조금씩 부각시켜서 보여드리는 거죠. 저에겐 이 부분도 있고, 저 부분도 있기 때문에 왕후라는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양면성을 다 가지고 있으니까. 이건 연기하시는 분들이 전부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생각해요. 각자 제 안에 있는 부분에 숨결을 불어넣어서 캐릭터를 만들지 않을까.
연기를 하면서 발견한 측면도 있지 않을까요. 연기를 하다 보면 자신의 모든 것을 끌어낼 때도 있고, 만들어 낼 때도 있고, 그러다 보면 자신에 대한 이면을 발견할 때가 있을 것 같고요.
정말 많죠. <여고괴담3>부터 많이 느꼈어요. 아, 이래서 연기를 하나보다라고 느끼며 시작했다가 점점 한 작품씩 하면서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가니까 내가 이런 모습이 있었나 싶고, 내가 이런 모습이 있었는데 참 많이 변했구나, 이게 나이가 들고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건가, 원래 내겐 이런 면이 있었는데 많이 없어졌구나, 이런 생각들이 들고. 이렇게 계속 성향들이 많이 바뀌는 거 같아요. 그렇게 깨닫고 느끼면서 안 좋은 건 버리거나 놓게 되고, 새로운 건 재발견해서 부각시키게 되고, 그런 거 같아요.
<여고괴담3> 당시를 생각하면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카메라 앞에 서는 기분도 당연히 다를 테고.
그럼요. 그 때는 정말 애기였어요. 애기. 뱃속에서 바로 태어나 응애, 하고 우는 애기였죠. (웃음)
아무 것도 몰라서 무서운 게 없었을 때였을지도 모르죠. 나이대가 비슷한 배우들과 함께 어울리듯 연기할 수도 있었고, 그만큼 심리적으로도 안정되는 바가 있었을 테고요. 반면 차기작인 <썸>에서는 반대로 부담이 크지 않았을까 싶어요.
부담이 사실 굉장히 많았어요. 왜냐면 첫 작품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끝내놓고서 갑자기 80억짜리 블록버스터의 여주인공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부담이 컸죠. 게다가 장윤현 감독님과 작품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부터 처음으로 남자배우를 상대배우로 만나게 되니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부담스럽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그때도 지금만큼이나 참 많이 힘들었던 작업을 했었네요.
결과적으로 흥행마저 좋지 않아서 나름대로의 마음고생이 더해졌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캐릭터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지적당했던 부분도 많았고요. 아무래도 예산이 크다 보니까 기대치가 높아졌고 그만큼 흥행이 따라주지 못해서 속상했죠.
그 뒤로 약간의 공백이 있었습니다. 음, 그런데 저는 <여고괴담>한 뒤에 1년 정도 공백이 있었고요. <썸>후로도 1년 정도 공백이 있었죠.
1년 단위로 작품을 한 셈이군요.
예. 어떻게 그렇게 됐어요. 그러다가 이제 <궁>을 하게 되고, <궁>을 할 때까지도 한 5개월에서 8개월 정도 쉬었던 거 같고요. <궁>끝내고 <주몽>할 때도 그 정도 쉬었던 거 같고요. 그렇게 여태까지 계속 달려왔네요, 지금까지.
드라마는 영화와 리듬감이 달랐을 텐데요.
많이 다르더라고요. 저는 현장의 템포가 그렇게 빠른 줄 모르고 아침에 가서 라면 하나 먹겠다고 그랬다가 깜짝 놀랐어요. 모두 다 저만 기다리고 계시더라고요. (웃음)
아무래도 현장의 분위기를 몰랐을 테니까.
잘 모르는 데다가 신인이니까 정말 큰 실수를 범한 셈이죠. 그러니까 영화는 시간은 꼭 지켜야 되지만 여유가 있잖아요. 드라마는 여유가 없더라고요.
아무래도 준비기간이 짧으니까요. 영화는 캐릭터를 만들어서 들어간다면 드라마는 연기를 하면서 그 캐릭터가 되어가는 셈이라 볼 수 있고.
그리고 드라마는 얘기를 할 기회가 별로 없더라고요. 이렇게 (손가락으로 전방을 찌르면서) 일방적으로만 표현돼요. 그래서 많이 당황스러웠던 기억도 나요.
리액션이 많이 배제되죠. 그런 면에 있어서는 영화가 연기자 입장에선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을 텐데요.
드라마를 하고 나니까 영화에서 얻지 못하는 장단점이 있어요. 드라마는 굉장히 순발력을 요하는 작업이다 보니까 한 작품 끝내고 나면 저도 모르게 순발력이 늘어 있고, 영화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깊이가 깊어져 있으니 이 두 가지를 짬뽕시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웃음) 그런 생각을 해보곤 해요. 하지만 그만큼 뭐 하나 쉬운 게 하나도 없잖아요. 영화도 그렇고, 드라마도 그렇고.
오디션을 통해서 <여고괴담>에 출연하게 됐습니다. 연기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을 것 같은데요. 그 지점이 연기자로서의 출발점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고요.
호기심이기도 하고, 뭔가 새로운 도전에 대한 희망이기도 했었고, <여고괴담>이라는 타이틀 자체가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그런 기대감도 사실 굉장히 많았었죠. <여고괴담>에 출연하는 것에 대한 기대감보다도, <여고괴담>이라는 작품이 어떻게 만들어질까에 대한 기대감이 많았던 거 같아요. 내가 이 작품의 오디션을 보게 된다는 것만으로 신기해지는 것도 있었고요.
많은 여배우들의 등용문이 됐죠. 드라마를 거친 뒤 다시 영화를 하게 된 뒤로 연기적으로 달라진 지점도 있을 것 같아요.
정말 많이 다른 게 영화 같은 경우엔 여유가 있는 반면 깊이 파고들 수 있고 뭔가 생각을 하게 되고 혼자 해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잖아요. 드라마는 그게 아닌 거에요. 저 혼자 모든 걸 다 해내야 되고, 제거는 제가 챙겨야 되고, 누구 하나 챙겨주지 않았고. 그렇게 영화에 대한 장단점과 드라마에 대한 장단점을 다 느끼고 나니까, 오히려 저는 접목해보고 싶더라고요. 이런 거 있잖아요. 현장은 드라마처럼, 촬영은 영화처럼. 이런 느낌이요. 이런 거 괜찮지 않아요?
감독님께서 좋아하실지 모르겠네요.
(웃음) 아마 무지 힘들겠죠.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를 하다 보니 적극적인 면모가 많이 느껴집니다.
얘기하다 보면 그래요. (웃음)
연기할 때도 캐릭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파고드나요? 모든 것을 알아내고 구축해야 성미가 풀린다거나.
다른 작품도 물론 그랬겠지만 이번 작품은 특히 신경을 썼던 게 감독님한테 매달렸어요. 왜냐면 모든 정답을 감독님만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독님에게 캐릭터와 상황이나 시나리오에 대해서 끊임없이 물어보고 그랬던 게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최대한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개인적으로.
마치 학생이 선생님에게 질문하는 모습이 생각나네요. 정말 그랬어요! 저한테는, 진짜 그랬어요.
선생님 입장에서는 그런 학생이 예뻐 보이는 법이죠. 유하 감독님은 적극적으로 디렉팅을 주시는 편이던가요?
아까 연시 얘기 했듯이 그렇게 늘 리액션을 주셨어요. 여기서 눈빛의 흔들림조차도 관객들에겐 어떻게 전달될 수 있는지 생각하시고 목소리의 톤과 말투 하나까지도 신경쓰셨고.
본인이 생각했던 어떤 지점도 있었을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디테일한 디렉팅으로 캐릭터를 디자인해주면 분명 본인의 생각과 충돌되는 지점도 있었을 겁니다.
충돌은 있었지만 거기 집착하면 그 순간부터 저의 한계에 부딪히는 거죠. 그래서 제 안에 있는 제 것을 버리고 감독님이 주신 옷을 입어야 하는데 이 옷이 어떻게 입어야 맞는지 몰라서 제대로 입지를 못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걸 입을 때까지 수없이 테이크를 가고 수없이 감독님과 얘기하고 감독님은 수없이 저에게 디렉션을 주셨어요. 지효야, 이 사각형을 한번만 더 접으면 될 거 같은데, 접을 때 손가락 세 개를 이용해서 반반씩 잡아서 접어봐. 이렇게 디테일한 디렉션을 주실 때도 있으셨고 아까 연시의 예를 드는 것처럼 디렉션을 주실 때도 있었고 굉장히 다양한 디렉션을 주셨어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덕분에 그대로 이행하면 되는 것도 있는 반면 반대로 스스로 답을 찾아야 되는 요구도 있었을 겁니다.
돌려서 말하면 자꾸 생각하게 되죠. 고민하게 되고, 이게 뭐지, 자꾸 찾고 싶은 거에요. 충동심이 장난이 아닌 거죠. 매 한 순간이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시간이 지난 지금은 이제 조금이라도 저에게 무언가가 오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좋은 습관도 생겼어요.
대중들은 배우들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잘 사냥하기도 합니다. 특히 <쌍화점>처럼 선정적인 마케팅을 펼치는 영화의 배우들은 씹기 좋은 대상이 되기도 하죠.
저는 제가 상처받을 짓을 잘 안 해요. 그냥 인터넷은 안 하면 되는 거고, 그런 얘기를 들을만한 행동을 안 하면 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자꾸 저를 절제시키는 거 같아요. 자제를 많이 하고. 이젠 그게 좀 익숙해진 거 같아요. 스스로가.
이제 곧 29살이 됩니다. 서른이 1년 남았군요.
이제 내일 모레 그 시기가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네요. (웃음)
중요한 시기인 거 같습니다. 배우로서나 한 사람으로서나, 지금까지는 보이는 것에 충실하게 따라왔다면 이젠 뭔가 찾아가고자 하는 욕심도 생기지 않을까 싶고요.
제 입장이 커지고 제 생각의 폭이 달라진다면 저는 그것 또한 제가 미리 생각할 부분이 아닌 거 같아요. 저는 그냥 제가 좋아하는 걸 하면 되는 거고, 제가 싫어하는 걸 안 하면 되는 거고, 그런 정치적인 부분은 아직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건 사무실에서 생각하시겠죠? (웃음) 제 개인적으론 그렇게까지 제약을 받으면서 생각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제가 너무 이기적일까요? (웃음)
자신의 의사 정도는 필요하죠. 다만 때때로 타협해야 하는 상황도 올 테니까요. 배우에게 이미지를 포장하는 문제도 때론 중요한 전략처럼 활용되기도 하고요.
아직까진 제 안에 있는 걸 끌어내야 되는 시기인 거 같아요. 저는 아직까지 저를 빚어서 어떤 모양으로 만들까 생각할 순 있어도 저에게 어떤 색깔을 입히며 어떤 옷을 입혀야 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제 기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직 한 것보단 안 한 게 더 많고 그래서 조금 더 경험이 쌓이게끔 가려는 거죠. 결국 그 경험치가 제게는 너무나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들이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