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아론 소킨이었다. <소셜 네트워크>와 <머니볼>의 각본가 아론 소킨만이 스티브 잡스의 양면성을 근사한 스토리에 녹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무나 해서는 안될 이야기였다. 스티브 잡스라는 이름 자체의 유명세가 그것을 특별한 아이템처럼 둔갑시키니까. 반대로 말하자면 식상하다는 말이지. 이미 925페이지에 달하는 전기까지 출간된 마당에 스티브 잡스가 얼마나 천재적이었고 한편으론 괴팍하고 독선적이며 외로운 사람이었고, 이런 식의 블라, 블라, 블라는 곤란했다. 스티브 잡스라는 사람의 인생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을 관통하고 그의 시점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상 밖의 이야기를 길어올릴 수만 있다면 정말 괜찮은 결과물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얘기를 한다는 건 이미 눈치챘겠지만 <잡스>가 그런 관점에서 실패한 영화라는 말이다.
구부정한 걸음, 시선을 끌어당기는 손의 제스처, 스티브 잡스를 연기하는 <잡스>의 애쉬튼 커처는 제법 스티브 잡스처럼 움직이고 말한다. 하지만 끝내 스티브 잡스가 아니라 애쉬튼 커처로 남는 느낌. 이는 배우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이야기의 문제가 더욱 크다고 판단한다. <잡스>는 대단히 밋밋한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그것도 대단히 흥미로운 인물을 다룬 작품이 결과적으로 대단한 여운을 남기지 못한다는 사실은 일면 놀랍기도. 영화는 잡스가 천재적인 인물이지만 독선적이고 성질이 지랄 맞고 그래서 고립된 인물이지만 결국 성공했다고 나열한다. 조화가 아닌 나열. 마치 전기의 챕터 중간중간을 뭉텅 잘라서 점프시키듯이 이야기를 이어붙이는데 점층적으로 감흥이 상승하는 느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뚝뚝 잘라먹는 기분. 결과적으로 모든 에피소드에 평면 구속당하는 느낌. 그래도 스티브 잡스라는 인물의 흥미를 밑천으로 생각했을 때 <잡스>가 스티브 잡스라는 인물을 재현하는 방식은 최소한의 구경거리는 되는 듯. 애쉬튼 커처가 애써서 스티브 잡스를 따라잡는 것도 그렇고. 코스프레 무비 이상의 감상으로 끌어올리지 못하는 인상은 일면 아쉽지만
아무래도 역시 아론 소킨이었어야 했다. 다행히도 소니 픽쳐스에서 아론 소킨을 영입해서 스티브 잡스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잡스>를 보고 남은 사족. 우리가 아는 천재들은 대부분 성격이 지랄맞은데 생각해보면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지랄 맞은 성격이 아니고서야 멍청한 시스템을 이겨낼 수도 없었겠지. 평범한 다수가 생각하는, 멍청하지만 이래저래 편한 합리로 똑똑한 한 사람의 혁신을 짓누르는 건 어디서나 흔한 일상이고, 그런 시스템 안에서 멸망하는 천재성이 한둘이 아니니까. 착한 천재라는 건 결국 보존하기 힘든 이상일지도.
$114,457,768 vs. $39,722,689. 메이저리그의 최고팀과 그 아래에 있는 팀보다도 더 밑바닥에 있는 팀의 간극은 저 수치로 정리된다. 선수 몸값의 총액이 곧 팀의 실력을 대변한다. 수치만으로도 명백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실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프로스포츠의 세계에서 이는 흔한 일이다. 이는 메이저리그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세계 모든 종목의 프로스포츠 대부분은 구단의 빈부격차를 통해서 순위의 계층화가 손쉽게 이뤄진다. 뉴욕 양키스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공통점은 실력 있는 부자 구단이라는 것. 부자 구단들은 한 시즌이 마감되면 자본을 투여해서 스타들을 영입하고, 새로운 유망주를 발굴하거나 스타를 길러낸 가난한 구단들은 감당할 수 없는 부자 구단의 선수 수집을 넋 놓고 지켜볼 수 밖에 없다.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지금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듣고 있는 중이다. 2001년, 뉴욕 양키스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디비전시리즈. 3점 차로 앞서고 있던 오클랜드가 양키스에게 역전당하자 남자의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그리고 끝내 패배. 그해 오클랜드는 양키스에게 리버스 스윕, 즉 시리즈 역전패를 당했다. 남자의 손에 쥐어졌던 라디오가 멀리 날아간다. 그의 이름은 빌리 빈(브래드 피트), 오클랜드의 단장이다. <머니볼>은 빌리 빈에 관한, 그 빌리 빈이 이뤄낸 메이저리그의 개혁에 관한 이야기다. 세이버매트릭스라는 야구기록 통계 시스템에 빠삭한, 야구 경력이 없는 경제학 전공의 직원을 고용하고 기성 야구계의 편견과 한계에 맞서서 자신의 시스템으로 팀의 성공을 이끌어낸 단장 빌리 빈에 관한 전기적 실화가 담긴 경제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 마이클 루이스의 <머니볼>은 아론 소킨의 각본으로 옮겨졌고, 베넷 밀러의 지휘 아래 동명의 영화로 제작됐다.
<머니볼>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몇몇 인물의 형태가 영화를 통해서 변형됐고, 연출적 감각으로 채워 넣은 영화적 찰나들이 예감되지만, <머니볼>은 드라마틱한 현실에서 길어낸 현실적인 드라마다.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영화, 그것도 현실과의 불협화음을 이겨내고 자신의 개혁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남자에 관한 이야기는 분명 도식적인 예감을 부른다. 주목할 것은 일찍이 <카포티>로 할리우드 감독상을 거머쥔 베넷 밀러 이전에 <소셜 네트워크>의 각본가인 아론 소킨이다. 그는 마크 주커버그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또 하나의 화신을 스크린에 세워 넣는다. 그리고 <머니볼>은 <소셜 네트워크>가 마크 주커버그에 관한 전기가 아니었듯이, 오클랜드의 단장 빌리 빈에 관한 전기로 완성되지 않았다. <머니볼>에서 빌리 빈이라는 인물보다도 흥미로운 건 그의 행위적 근간이 되는 경험과 심리의 탐색, 그리고 그 주변을 이루는 풍경의 관찰에 있다.
상실의 에너지를 페이스북의 동력으로 끌어올린 마크 주커버그처럼, 빌리 빈 또한 실패의 에너지를 파격적인 구단 운영의 동력으로 끌어올린다. <머니볼>은 야구 영화라기 보단, 야구가 등장하는 휴먼드라마에 가깝다. 이는 과거의 경험에 기인해서 직접 경기를 관람하지 않는 빌리 빈의 심리적 트라우마를 관객이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되는 효과를 낳기도 하는데 이처럼 <머니볼>은 빌리 빈이라는 인물의 개인적인 서사 속에 내재된 심리를 관객의 감상에 투영해내는데 여념이 없는 작품이다. 탁월한 임기응변과 제스처로 자신의 공기를 만들어내는데 능한 빌리 빈이 텅빈 그라운드가 바라보이는 객석에 홀로 앉아 고독한 상념에 잠겨있을 때, 그 단적인 풍경 만으로도 인물의 심리적 간극과 고충이 오롯이 와닿는다. <머니볼>은 리드미컬한 서사적 운용과 탁월한 공간감의 활용을 통해서 인물의 심리를 역동적으로 추적하고, 광활하게 펼쳐놓는다. 아론 소킨의 스토리텔링을 베넷 밀러가 유연하게 세우고 맞춘다.
배우들의 공헌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다. <머니볼>에서 브래드 피트는 지휘자와 같다. 마치 더 이상 근사한 외모로서 언급되길 거부하듯이 유려한 연기력과 압도적인 장악력을 드러낸다. 또한 빌리 빈을 보좌하는 경제학도 세이버메트릭스 전문가 피터 브랜드 역의 요나 힐과 오클랜드의 감독 아트 하우 역을 맡은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극적인 흐름에 긴장과 흥분을 불어넣는 스페셜리스트의 위치를 점한다. 또한 모든 배우들은 훌륭한 화음을 자랑하는 관현악단과 같이 자신의 파트를 군더더기 없이 연주해낸다. <머니볼>은 팀워크가 뛰어난 영화다. 그랜드슬램 한방보다도 팀 배팅을 통해서 끊임없이 진루타를 치고 나가며 출루율을 높여나간다.
<머니볼>은 개혁과 진보에 관한 영화지만 결국 그 과정을 이겨내는 한 인간의 의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신의 실패를 경험적 밑천으로 삼아서 새로운 사고를 실행으로 작동시킨 남자는 결국 그 신의 변화를 주도해내고 갈등과 불화를 견디며 새로운 답안을 정착시킨다. 물론 그 방안이 완벽하게 성공한 것은 아니다. 빌리 빈의 정책에 따라서 오클랜드는 5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결국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했다. 또한 빌리 빈의 방식을 응용한 다른 팀이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빌리 빈의 방식에 대해서 마냥 우호적이지 않은 듯한 영화적 시선은 어쩌면 공정한 것이다. 의외성의 플레이를 인정하지 않고 통계에 기대는 기계적인 운영을 통해서 시즌 운영의 성공을 거둘 수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의 승리를 얻어낼 수 없다는 건 결국 아이러니다. <머니볼>은 결국 그 거대한 아이러니에 관한 영화다. 자신의 성취로 환호했던 그라운드의 적막을 홀로 차지한 채 드러누운 빌리 빈의 모습이, 독보적인 스카우팅으로 게임을 지배한 덕분에 거액의 스카우팅 제의를 받게 된 빌리 빈의 선택은, 어떤 통계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의외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결국 이 영화를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소셜 네트워크’가 뭔지 잘 모르는 당신이라 해도 당신은 이미 소셜 네트워킹 중일 게다. 적어도 인터넷에 취미가 없지 않은 이상 미니홈피, 블로그, 트위터 등등에 올려놓은 당신의 계정을 통해 이미 당신은 이 사회의 구성원들과의 접속을 경험해봤거나 진행 중인 셈이다. 그리고 207개국의 5억여 명의 회원이 이용한다는 ‘페이스북’은 대표적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이며 250억 달러의 가치를 지닌 글로벌 기업이다. 페이스북의 개발자이자 창립자인 마크 주커버그는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 자리에 오르며 소셜 네트워크 시대의 신화로 등극했다. “Facebook me”라는 신조어를 유행어로 만든 페이스북의 열풍이란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소셜 네트워크>는 바로 그 전세계적인 현상의 중심에 있는 페이스북의 성장과 이를 개발한 주커버그가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에 이르기까지의 전기적 서사를 담아낸 작품이다. 하지만 단순히 <소셜 네트워크>는 페이스북의 성공 신화라는 단순한 주제로 요약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일단 ‘소셜 네트워크’는 ‘페이스북’에서 비롯된 용어가 아니다. 페이스북은 ‘소셜 네트워크’를 대변하는 하나의 현상이었다. 무형의 사이버스페이스 속에서 활발하게 이뤄지는 개인간의 접속과 이를 통해 형성되는 거대한 장의 마련은 이미 페이스북 이전부터 웹이라는 공간의 형성과 함께 존재하던 것이었다. 페이스북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의 제목이 <소셜 네트워크>라 명명된 것에는 뚜렷한 의미가 있는 셈이다.
페이스북은 유기체와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다. 유저 스스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관계를 발전시키고 네트워크의 확장을 구축해나가던 기존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다른 차원의 진화적 체계를 갖춘 새로운 양식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다. 페이스북은 스스로 다른 유저에게 접근을 도모하고 접속을 시도해야 하는 기존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달리 시스템의 알고리즘을 통해 유저와 유저의 연결을 유도하고 접근성의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마이스페이스’와 같은 기존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메일 주소를 통해 유저와 교류가 있었던 주변인들을 검색해서 리스트를 제공함으로써 관계망 구축을 위해 유저 스스로가 주변인들을 검색하는 수고를 덜어준다. 이런 접근의 편의성은 페이스북이 구축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차별화된 전략이었으며 이를 토대로 페이스북은 자가증식을 유도하는 시스템 안에서 끊임없이 분열해 나가는 유저들의 선택을 통해 전세계적인 네트워크망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소셜 네트워크>는 주커버그(제시 아이젠버그)를 중심으로 그가 페이스북의 성공을 이끌어내기까지의 서사에 관여했던 다섯 명의 인물을 비중 있게 다루거나 주목한다. 주커버그와 함께 페이스북을 공동으로 설립한 왈도 세브린(앤드류 가필드), 페이스북의 확장에 큰 기여를 한 냅스터의 창시자 숀 파커(저스틴 팀버레이크), 마크 주커버그에게 아이디어를 빼앗겼다며 대립선에 서게 되는 윈클보스 형제(아미 해머) 그리고 마크 주커버그의 과거 애인인 에리카(루니 마라)까지, 이 다섯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셜 네트워크>는 세 갈래의 서사 속에서 중첩적인 사연을 만들어내면서도 엇갈리는 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진전되는 이야기다. 기본적으로 영화의 현재 시제는 주커버그를 둘러싼 두 개의 법정 드라마다. 그리고 이는 <소셜 네트워크>의 줄기가 되는 사연, 즉 하바드대 2학년 생이던 주커버그가 페이스북을 창립하고 성공을 이룬 뒤, 소송에 시달리기까지의 서사를 이어나가는 매듭이자 그 모든 서사의 종착역과 같다.
이처럼 <소셜 네트워크>는 다층적으로 구성된 서사 구조를 저마다의 시점으로 나열하고 있는 작품이나 퍼즐을 맞춰나가듯 머리를 싸매고 볼 작품은 아니다. 동시에 엄청난 대사량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통해 방대한 정보량을 쏟아내지만 이 모든 것을 이해해낼 정도의 지적 능력을 준비한 채 상영관에 들어설 필요도 없다. <소셜 네트워크>는 방대한 서사를 심플하게 정리하고 긴밀하게 구성해내는 스토리의 운용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약간의 변주가 가미된 곡조에 강렬한 리프와 스트레이트한 훅을 담아 능수능란하게 연주해 나가듯 흥미를 자아내고 몰입을 발생시키고 감상을 점층시키는 드라마다. <조디악>과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통해 관조적이고 유려한 연출력을 선보이며 대가로서의 경력에 들어선 데이빗 핀처는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의 이런 능력을 보다 극대화시킨다. 캐릭터의 내면을 깊숙하게 살피는 동시에 인물의 주변부를 세심하게 조망하고 이를 둘러싼 시대의 공기를 긴밀하게 포착해낸다. 동시에 <소셜 네트워크>는 플래쉬백을 동원한 서사의 재구성을 통해 방대한 이야기를 압축해내면서도 그 안에 담긴 정보량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각색과 편집의 요소에서도 탁월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할만한 작품이다.
사건 자체보다도 그 사건 속에 놓인 인물의 심리에 집중하는 방식은 사건 자체의 진전만으로 이룰 수 없는 역동적 리듬을 발생시킨다. 자신의 애인이었던 에리카와 헤어진 주커버그가 하버드대의 커크랜드 기숙사방으로 돌아와 기숙사 사이트를 해킹한 뒤 여학생들의 외모를 비교해서 투표하는 ‘페이스매쉬’라는 사이트를 만들고 이로 인해 큰 이슈가 되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의 도입부는 이 에피소드 하나만으로 주커버그라는 인물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이해시킨다. 일종의 ‘너드(Nerd)’에 가까운 컴퓨터 천재 주커버그는 상황에 대한 판단력과 이성적인 사고를 지닌 인물이지만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좀처럼 친밀함을 형성할 수 없는 인물이다. <소셜 네트워크>는 주커버그의 이런 성격에서 기인한 인간관계의 갈등과 충돌을 극적 감정의 요소로서 활용해나간다. 특히 속사포처럼 단어들을 쏟아내는 주커버그의 대화 방식은 막대한 정보량을 방출하고 있음에도 그 빠른 대사가 주는 리듬감을 통해 극 자체에 활기와 흥분을 일으킨다. 이런 특성은 단지 주커버그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소셜 네트워크>는 주커버그의 페이스북에 연관된 인물들의 주요한 서사들을 효율적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종종 극의 구성을 위한 유효한 장식처럼 활용하며 영화의 시야를 보다 광대하게 확보해냄으로써 극의 흥미를 넓혀나간다.
한 가지 궁금해지는 대목은 <소셜 네트워크>가 실제 인물을 묘사하는 전기적 드라마라는 방식에서 얼마만큼이나 사실성을 중시한 작품인가라는 지점이다. <소셜 네트워크>는 벤 메즈리치의 미발간소설에서 착안된 작품이다. ‘카드 카운팅’이라는 방식을 통해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거액을 벌여 들인 MIT의 수학천재들에 관한 실화를 소설로 옮긴 <MIT 수학천재들의 라스베이거스 무너뜨리기>를 집필하며 화제가 된바 있는 벤 메즈리치는 20대의 나이에 페이스북을 창립하며 벼락부자가 된 마크 주커버그에 관한 논픽션 소설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 사실에 깊은 관심을 보인 할리우드 제작자에게 직접 건넨 14페이지 분량의 트리트먼트가 <소셜 네트워크>의 출발점이 됐(다고 알려졌)으며 이를 각색한 아론 소킨의 시나리오가 현재의 결과물로 발전된 것이다. –최근 벤 메즈리치는 <소셜 네트워크>와 동명의 소설을 발표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소셜 네트워크>의 제작에 관여한 이들은 이 작품의 초고가 된 벤 미즈리치의 트리트먼트가 다양한 채널을 통한 취재와 조사로서 완성된 이야기인가라는 물음보다도 다른 측면에 대해서 흥미를 느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주커버그는 <소셜 네트워크>가 자신과 무관한 영화라고 스스로 어필한 바 있다. 그가 자신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입힐 수도 있는 영화적 내용에 대한 부정의 의미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펼치는 것일지 몰라도 어쨌든 <소셜 네트워크>가 페이스북이라는 논픽션 현상에 입각해서 완성해낸 허구적 사연이라 이해해도 무방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벤 메즈리치의 트리트먼트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는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데이빗 핀처가 완성한 <소셜 네트워크>라는 결과물을 토대로 짐작해보자면 이 작품은 주커버그라는 실제 인물을 수단으로 실물이자 허상인 소셜 네트워크라는 현대인의 관계 맺기의 아이러니에 포커스를 맞춘 영화처럼 보인다. 이 지점에서 사실성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유효한 것은 페이스북이라는 신화도, 마크 주커버그에 대한 전기적 재현도 아닌, 소셜 네트워크라는 21세기적 관계 형성의 양면성에 있다. 온라인에 거대한 네트워크 제국을 구축한 천재가 정작 현실의 인간관계 안에서 고립된 존재라는 관점이 <소셜 네트워크>라는 작품의 세계관을 이루는 기초적 태도이자 관점으로서 유효한 어필을 한 것처럼 보이며 이는 영화가 완성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중요한 설정으로 작동된 것처럼 보인다.
자신들의 합리를 내건 언어를 통해 치열한 공방이 펼쳐지던 사무실에 홀로 남겨진 주커버그를 비추는 결말부는 <소셜 네트워크>의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결정적 순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온라인이라는 방대한 우주에 거대한 네트워크 세계를 창조해낸 주커버그가 오프라인의 현실에서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 같은 인물임을 드러내는 역설적인 광경, 이는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누르고 웹에 접속하여 자신의 아이디로 로그인함으로서 전세계의 모든 이들과 활발하게 소식을 주고 받지만 가상의 네트워크에서 로그아웃한 뒤, 두 발을 딛고 선 현실 위에서는 정작 깊은 고독을 체감하게 된다는 고독한 현대인의 실풍경에 대한 응시이며 영화는, 그리고 데이빗 핀처는 이런 현실을 사려 깊은 동정의 시선에 담아 투영한다.
<소셜 네트워크>는 어느 개인의 아이러니한 현실을 비추는 드라마 자체로서도 훌륭한 의미를 전달하는 작품이다. 알고리즘을 통해 획기적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창조한 이가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고립된 존재라는 역설 그 자체가 <소셜 네트워크>의 진심인 셈이다. 지금도 전세계의 많은 이들이 모니터 앞에 앉아 몇 번의 클릭을 통해 자신에게 허락된 가상의 공간에서 소셜 네트워크에 몰두하고 있다. 그 수많은 관계의 알고리즘 속을 떠도는 이들의 풍요로운 인간 관계는 과연 얼마나 유효한가. 본질이 사라진 피상의 세계에서 거대한 허상의 네트워크 속을 떠도는 유저로서의 일상을 즐기는 현대인들은 고독한 현실로 회귀해야 한다. 당신은 그를 친구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예, 아니요. 당신의 클릭에, 혹은 상대의 클릭에, 관계의 유무가 결정되는 지금, 당신도 소셜 네트워크하고 있습니까? 아니, 하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의 고독은 치유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소셜 네트워크다. 당신에게 그 관계는 진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