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자라기 보단 방랑자에 가깝다. 맞선다기 보단 궁금해서, 김지운은 항상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정복자가 아니라 개척자로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삶을 산다. 그 여정을 즐긴다.
블랙코미디, 호러, 필름
누아르, 웨스턴, 싸이코 스릴러 등, 영화감독 김지운은 언제나 한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듯 매 작품마다 새로운 장르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결국 어떤 장르에든 김지운이라는 인장을 찍었다. “<달콤한 인생>은 내면으로 침전하는
영화였기 때문에 외향적인 영화가 떠올라서<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처럼 호쾌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시각적인 스펙터클은 좋았지만 밀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어서 밀도가 빽빽한<악마를 보았다>를 쥐어짜듯이 만들게 됐죠.그러고 나니 괴롭고 우울한
느낌이 강해져서B급 코드의 유머를 펼칠 수 있는<라스트 스탠드>까지 닿게 된 것 같습니다.항상 지금 내가 느끼는 모순이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거나 이를 바꿔보고 싶다는 욕망들이 다음 작품에 반영되는 것 같아요.”
김지운 감독은 국립현대무용단 창단 5주년을 기념하는 <어린왕자> 가족무용극에서 구성대본과 영상연출을 담당했다. 영화감독이 무용극의 연출에 참여한다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거다. 다만
그가 김지운 감독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영화계에서 이름 석자만으로 이목을
끌 수 있는 감독은 많지 않다. 김지운은 바로 그런 감독이다. 그런
그가 스크린에 영사되는 영화 대신 무대에서 펼쳐지는 무용극에 참여한다니 필연적으로 그 계기가 궁금했다. “2005년도에
안애순 예술감독의 무용극 <세븐 플러스 1: 복수는
가슴 아픈 것>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한
에피소드의 대본을 썼고, 영화에서 사용하는 특수효과를 무대 위에 구현했죠. 그야말로 잠깐 도와드린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기획 단계부터 참여하게 됐죠. 그러다
본격적인 연출 제안을 받게 돼서 전체 구성을 잡고 대본을 쓰게 됐는데 지난 2월쯤 올해 미국에서 진행하려
했던 작품의 스케줄이 꼬이면서 동시에 국내에서 100억대의 장편영화 의뢰가 들어왔어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어린왕자>
공연일자와 그 장편영화 크랭크인 날짜가 겹치면서 총연출은 포기하고 대본 구성과 영상 연출을 맡게 됐습니다.”
사실 김지운이 지금과 같은 영화감독이 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무대 덕분이다.
그는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그는 ‘영화를
더 잘 알고자 드라마의 기본부터 다지고 싶어서’ 연극과에 들어갔다. 유년시절부터
워낙 영화를 좋아했던 그에게 연극은 영화로 닿기 위한 디딤돌이었다. 연극배우의 길로 나아간 친누나 덕분에
연극과 가까워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알게 모르게 누나의 동료들과 친하게 어울릴 수 있었고
연극을 자주 보게 됐습니다. 당시엔 공연 자체보단 보헤미안처럼 자유로운 연극인들의 삶을 막연하게 동경하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그만큼 무대에 그렇게 무지한 편은 아니었단 말이죠.”
그렇다면 그에게 무대 연극이란 어떤 흥미로 다가왔을까? “제한적인
공간에 수많은 시공을 담아내야 하면서도 어떤 것은 생략하고, 어떤 것은 함축하고, 어떤 건 일부만을 보여주면서 결국 그 전체를 이미지로 연상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무대 미학에 어렴풋이 열광하고
감동했던 기억이 있어요. 본래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의 물질적인 보다 저런 제한적 환경을 미학적
상상력으로 채워나가고 박진감 넘치게 표현하는 무대미학이 훨씬 예술에 가깝다고 느꼈던 적도 있고요.” 이런
그에게 무용극은 또 어떤 흥미로 다가왔을까? “연극을 통해 표현성의 발생과 기원을 찾게 됐는데 무용에선
몸을 움직이는 가장 원초적인 행위나 기원적인 몸짓, 제의적인 동작이 춤의 형태로 어울려 보인다는 것이
흥미로웠던 것 같습니다.”
김지운 감독은 항상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직접 써왔다. 그런
의미에서 무용극 대본을 쓰는 건 익숙하면서도 낯선 작업이었다. “원작을 다시 읽고 새롭게 느껴지거나
말을 건다고 느껴지는 부분 그리고 우리가 ‘어린왕자’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내게 작용하는 느낌을 따라 써내려 갔습니다.” 물론 만만한 과정은
아니었다. “영화 시나리오처럼 구체적으로 써야 하는지, 시처럼
여백을 두고 써도 되는지, 헷갈렸죠.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그냥 스스로 제한을 두지 말고 쓰는 대로 써보기로 했어요. 세부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면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추상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면 역시 그대로 자유롭게 썼어요. 그런데
무용단원들이 워낙 자유분방한 구성에 단련된 덕분인지 일관성 없는 대본을 알아보기 쉽게 구성표도 만들고 장면 진행표도 만들어 오더군요. 마치 타짜들이 화투패 깔듯이.”
영화는 감독이 관객에게 보일 시점을 통제한다. 하지만 무대는 온전히
관객에 의해서 시점이 선택된다. 하지만 김지운 감독은 그런 차이가 되레 같은 방식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신기하게도 드넓은 황야를 배경으로 둔 와이드숏을 봐도 대형 화면 한쪽 구석의 작은 점 하나가
커다란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결국 영화의 쇼트 안에서, 무대 위에서, 무언가를 어떻게 배치하고 어떻게 힘을 안배하느냐에
따라 같은 결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다양한 쇼트와 시선으로 변증법적인 충돌과 관계로 신을, 시퀀스를 만들며 스토리와 감정을 정교하게 구축해나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대는 영화에서 보여진 다양한 조각의 쇼트들을 쭉 펼쳐놓고 끊어지지 않게 이어나가며 스토리와 감정을 구축해나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죠.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 영화와 무대극 사이의 이질감을 좁혀 나갈 수 있습니다.”
사실 지금 김지운 감독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가족무용극 <어린왕자>연출에 참여하는 동시에 오는 10월에 크랭크인에 들어갈 새로운 영화 <밀정>의 촬영을 앞두고 시간을 쪼개서 로케이션 헌팅이 한창이다. 일제
치하 독립군에 관한 이야기인 만큼 상해 등지에서의 촬영도 예정돼 있다. 해외 영화사들로부터 작업 제안도
심심찮게 전달되고 있다. 전세계적인 인기를 모은 SF 재패니메이션 <인랑>의 실사화도 그의 손에 달려있다. 그를 즐겁게 만들 물음표는 아직 무궁무진하다. “A부터Z까지 딱 떨어지게 계획하며 작업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들이 생겨야 점점 명확해지는
편이에요.배우가
들어오고,의상이
들어오고,공간이
생기고,그런 과정을 통해 점점 이야기가 맞춰져요.하루키의 말처럼 나는 프로그래머인 동시에 게이머인 셈이죠.어떤 결과를 프로그래밍하지만
게이머로서 더 좋은 아이디어가 주제로 굳어가는 과정을 즐깁니다.” 불확실한 여정 가운데
서있다는 것. 그것이 김지운을 나아가게 만든다.
음악을 꿈꾸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음악이 길이 되고, 생이 됐다.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은 음악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새로운
삶을 만난다. 그리고 이 세계보다도 넓은 음악적 여정을 꿈꾼다.
‘내가 이 극장에서 공연할 수 있는 날이 올까?’ 20년 전, 파리 유학 중 우연히 지나가던 샤틀레 극장 앞에서, 나윤선은 생각했다. 그리고 2013년
나윤선은 샤틀레 극장에 있었다. 객석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 서있었다. 1600석이 넘는 좌석을 빈틈 없이 꽉 채운 관객들 앞에서 노래했다. “놀랍게도
꿈이 실현됐으니 그때 제 기분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었죠. 그것도 전석 매진이 되는 상황이라 더욱 감회가
깊었습니다.” 1860년에 지어진 파리의 샤틀레 극장은 파리의 예술가들에겐 그야말로 꿈의 무대다. 나윤선은 그렇게 꿈의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같은 해, 재즈의 성지라고 일컬어지는 뉴욕의 ‘블루노트’로부터 초청을 받아 이틀 동안 네 차례의 공연을 펼쳤다. 재즈의 본고장
미국 안에서도 최고의 재즈 뮤지션들을 배출한 재즈의 산실 블루노트에서 말이다. “재즈 뮤지션에게 미국
시장은 언제나 숙제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미국 활동에 할애하려
해요. 어쨌든 미국에서의 첫 숙제는 비교적 잘 마친듯해서 매우 만족하고 있어요.”
간절함과 절실함만으로 무언가를 이룬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마주치게 되는 운명의 좌표가 등장한다. 뒤늦게야
그것이 마냥 지나치던 일상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을 향해 가리키던 지표의 연속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린
그걸 재능이라고 부른다. 재능은 삶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나윤선이
재즈 보컬리스트가 된 것도 어쩌면 그래서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패션회사에 지원했어요. 입사 경쟁률이 높은 회사였고, 합격해서 운이 좋다고도 생각했죠.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회사를 그만
뒀을 무렵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주인공 역을 맡게 됐죠.” 혹시 뮤지컬 배우로서의 꿈이 있었던
것일까?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어요. 당시
음악을 하던 친구가 제 노래를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를 뮤지컬 연출자인 김민기 선생님께 들려드렸더니 선생님께서 경험이 일천한 저를 주연으로 캐스팅하셨어요. 그 뒤로 두 편의 뮤지컬에 더 출연했어요. 정말 우연의 극치죠.” 하지만 그 ‘우연의 극치’가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이란 미래를 발굴한 셈이다.
뮤지컬 무대에서의 경험은 나윤선의 유전자에 잠재된 재능을 흔들어 깨웠다. 음악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클래식 합창단 지휘자인 아버지와 뮤지컬 배우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나윤선은 ‘공연장의 백스테이지가 놀이터 같은’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녀에게 음악이란 매일같이 열고 닫는 방문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녀는 문턱을
넘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워보고자 결심했다. 다만
그것이 재즈여야 했던 이유는, 프랑스로 유학을 가야 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무언가를 배우기엔 이른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클래식을 공부하기엔 조금 늦은 것 같았고, 친구의 권유로 재즈를 선택했어요. 그런데 미국이 아닌 프랑스 유학을
선택한 건 제 전공이 불문학이었기 때문이에요. 개인적으로 샹송을 매우 좋아하기도 했고요.” 단순하지만 명확했다. 그렇게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고,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의 역사가 시작됐다.
사실 나윤선의 공연에선 재즈 보컬리스트로서의 일관성보단 다채로운 음악적 영향력이 감지된다. 나윤선의 무대는 록과 팝, 일렉트로니카, 포크, 국악 등 다양한 음악적 자장을 재즈로 흡수해버리는 장이다.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재즈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음악에 관심이 있어요. 대부분의 재즈 뮤지션들도 저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고요. 재즈는 어떤 장르의 음악이라도 자신만의 것으로 재해석하는데 적합한 음악이거든요.” 어쩌면 그건 그녀의 곁에 좋은 음악적 동지들이 존재하는 덕분일지도 모른다.
벌써 7년째 함께 무대에 오르고 있는 기타리스트 울프 바케니우스는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최정상급의 연주자다. 그리고 아코디어니스트 뱅상 뻬라니와 콘트라베이시스트인 씨몽 따이유도 재능을 인정
받는 연주자다. 이처럼 재능 있는 연주자들과 함께 ‘나윤선
콰르텟’이란 이름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건 나윤선에게 그들을 매혹시킬만한 실력이 있다는, 역설적 증명이다. “좋은 연주자들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는 건 자신의
역량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과 같아요. 그런 면에서 지금 함께 활동하는 뮤지션들은
정말 제게 최고의 가능성이라 할 수 있겠죠.”
나윤선은 1년 동안 전세계를 돌며
100회 정도의 공연을 소화한다. 전세계의 수많은 팬들 앞에 서고 노래한다. “다양한 관객을 만날 수 있다는 건 뮤지션에겐 큰 행운이에요. 같은
레퍼토리를 공연해도 관객에 따라 그 느낌은 완전히 달라지니까요.” 하지만 1년에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선 고되고 힘든 여정일 것이다. 하지만 나윤선은 아직도 그 여정을 통해 얻게 될 무언가를 기대한다. “어느
유명 연주자가 인터뷰에서 ‘당신은 어디에 사세요?’라는 질문에
‘호텔에서 살아요’라고 답한 것을 보고 한참을 웃었어요. 실제로 연주 여행을 하다 보면 대부분의 시간을 길 위나 호텔에서 보내게 되니까요. 녹록한 일이 아닌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항상 설레는 마음이 있죠. 저는 항상 제 음악적 여정을 여행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많은 여행을
하며 살아가는 제 모습을 보게 되고요. 낯선 곳에서 만나는 생경한 풍경과 사람들도 제겐 때로 큰 영감으로
다가옵니다. 지금도 항상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라는 설렘으로 비행기에 올라요.”
이미 잘 알겠지만 나윤선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재즈 보컬리스트다.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닿길 염원하는 팬들이 전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한류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전부터 나윤선은
세계를 누볐다. 그런 그녀에게 한국의 무대에 선다는 건 지금 어떤 의미일까. “모든 무대가 소중해요. 하지만 한국에서 공연할 땐 조금 다른 느낌이
있죠. 공연 시작 전엔 좀 더 긴장이 되는데 막상 시작하면 해외에서보다 편안해지는 경향이 있어요. 아무래도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관객과의 정서적 공감이 좀 더 크게 느껴져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여정이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일지도 모른다. 되돌아올
곳이 있다는 믿음으로 보다 멀리 나아갈 수 있다. 나윤선은 모든 공연의 끝에서 ‘아리랑’을 부른다. 그
무대의 끝에서 자신이 돌아올 곳을 되돌아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국보다 세계에서 더 유명한 뮤지션’이란 수사도 그녀에겐 딱히 중요하지
않다. 그녀에겐 보다 넓은 세상이 있고, 더 큰 음악이 있다. “음악 활동을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직도 연습할수록
실력이 느는 것 같다.’ 어느 80대 원로 연주자가 농담처럼
했던 이야기인데 저는 그게 농담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항상 새롭고 젊은 음악을 하는 게 제 음악적 목표에요. 아직 저 앞에 멀리 가야 할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 나윤선은 젊은
뮤지션이다. 아직 서야할 무대가 많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소중하고 큰 의미를 되새길 때가 왔다. 오는 12월, 한국에서의 공연을 앞둔 나윤선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안도감과 정서적 공감을 확인하고 더 넓은 세상을 여행할
계획이다. 내년 3월엔 다시 프랑스 샤틀레 극장의 무대에
선다. 세계보다도 더 넓은 음악적 여정을 향해 나아간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전도연이 처음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건 1997년, <접속>을 통해서였다. 그녀가 <밀양>으로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건 2007년이었다. 정확히 10년 만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라는 빤한 수사의 진짜 주인이 된 게 말이다. 그녀는 그저 묵묵히 한발한발 작품을 내디디며 오늘에 다다랐다. 그녀가 또 한번 발을 내딛는다. <카운트다운>으로, 전도연이 돌아왔다.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이전에도 전도연은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다. 그녀는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누비며 자신의 스펙트럼을 넓혀나갔다. 백지처럼, 캐릭터의 색을 입었고, 리트머스처럼, 작품에 스며들었다. 그녀가 시작부터 자각이 뚜렷한 배우는 아니었다. “그냥 어리다 보니까 호기심이 많았을 뿐이죠. 처음부터 의식을 갖고 연기한 건 아니었어요.” 그녀를 각성시킨 건 <해피엔드>(1999)였다. <해피엔드>는 파격적인 노출신과 베드신을 요구하는 작품이었다. <접속>(1997)과 <약속>(1998)의 연이은 성공과 <내 마음의 풍경>(1999)으로 좋은 연기적 평가를 얻었던 여배우가 선뜻 집어들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다. “그런 결정을 하려면 제 자신을 납득시켜야 하잖아요. 남들 시선보단 내가 원하는 것에 더욱 귀를 기울기게 된 시기였죠.” 그녀는 표현의 한계를 부수고, 연기적인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임을 알았다. 결국 선택했고, 해냈다.
“언제부턴가 우등생처럼 빤하게 1등 해서 상 받는 게 당연한 배우로 여겨진 것 같아요.” 전도연에게 <밀양>(2007)은 ‘그런 빤함을 뒤엎어주는 작품’이었다. “너 연기 잘하는데, 그냥 연기를 잘 해.” 이창동 감독의 말은 전도연에게 ‘정곡을 찔리는 기분’을 안겼다. 당시 <너는 내 운명>(2005)으로 비평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전도연은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여배우였다. 이창동은 그런 그녀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 흠잡을 곳 없는 ‘정석적인 배우’ 전도연에게 그 이상의 연기를 요구했다. 그녀는 촬영 내내 온갖 의심에 시달렸다. 결과적으로 칸의 여왕이라는 수식어와 온갖 상찬이 뒤따랐다. 하지만 정작 스스로에게는 떨떠름한 일이었다. “뭔가 스스로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결국 제 자리였어요. 진짜로 달라졌다고 생각하면 나만의 비법을 가진 것처럼 잘난 척도 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니까요. 정말 모르겠어요.”
충무로는 여배우에게 척박한 땅이다.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전달받기란 드문 일이다. 그만큼 경쟁도 치열하다. 실력으로 우위를 점할 수 밖에 없다. 전도연은 작품 작업 중에는 다른 시나리오를 보지 않는다. 밀양에서 <멋진 하루>(2008)에 대한 제의를 받은 전도연은 서울에서 시나리오를 보고 작품을 결정하기로 했다. 비로소 모든 촬영이 끝났다. 그녀는 서울로 올라오며 새롭게 쌓여있을 시나리오들을 기대했다. 하지만 매니저가 건넨 시나리오는 단 하나, <멋진 하루>뿐이었다. “만약 시나리오가 별로였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거에요. 그래서 고마웠어요. 제가 좀 더 빨리 차기작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줬으니까요.” 언론과 대중은 <멋진 하루>의 전도연을 주목했다. 칸에서의 수상 뒤 첫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욕심은 굉장히 많은데, 꿈이 없어요. 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있는 무엇이잖아요. 전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욕심이 많아요.” 목 아래까지 단추를 채우고 반듯하게 몸을 세운 듯한 <밀양>과 달리 옷을 살짝 풀어헤치고 느슨하게 누워있어도 좋을 것 같은 <멋진 하루>는 보다 여유로워진 전도연의 관록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작품이 끝나면 공허하죠. 무언가에 집중하다가 갑자기 하루 아침에 여운도 없이 끝나버리는 거니까. 돌이켜 보면 이 작품이 정말 마지막인 것처럼 보든 열정을 다 쏟아 부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평소에 열정을 쏟아 넣을만한 게 없어서 그럴지도 몰라요. 결국 남는 건 작품이죠.” 그랬다.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전도연은 작품을 삼키듯이 쉬지 않고 연기해왔다. 결혼을 했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과정에서 데뷔 이후로 처음 2년여 간의 공백을 경험한 그녀에게 이제 연기란 무엇일까.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마음 써야 할 게 많아지니 연기가 더욱 절실한 것임을 알게 됐죠.” 그녀의 구미를 당기는 시나리오는 여전히 드물었다. 그 가운데, <하녀>(2010)는 일종의 오아시스였다. 한국영화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김기영의 <하녀>(1960)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에서 전도연은 파격의 옷을 가벼운 깃털처럼 걸치듯 연기했다.
허종호 감독의 입봉작 <카운트다운>(2011)에서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구가하는 전도연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시나리오를 검토했고, 출연을 결정했으며, 제 역할에 정진했다. 최근의 출연작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대중성이 두드러지는 스릴러물에서 전형적인 팜므파탈을 연기한다. 전도연의 변신이라는 수사가 으레 따라왔다.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변신을 목적으로 작품을 선택해본 적이 없어요. 그저 인물 안에서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기에 작품을 선택했고 그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죠.” 사람들은 그녀에게 묻곤 했다. 지난 번 그 곳은 험준한 봉우리가 아니었냐고, 완만한 능선이 아니었냐고. 하지만 정작 전도연은 다른 곳에 있었다. “여기 오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저를 내리막길에 내려놓기도 하고, 꼭대기에 올려놓기도 했지만 그건 제 자신과 상관없어요. 저는 항상 평행선을 걸어왔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언제나 일정한 걸음으로 연기적 보폭을 넓혀왔다. 길은 열려 있었고, 그저 걸어왔을 뿐이다. 그렇게 다시, 전도연은 발을 내딛는다. 또 한번 길이 열린다.
101번째 영화, 한국영화계에서 임권택 감독의 위치는 숫자만으로도 명확해진다. 하지만 능선처럼 굽이진 대한민국의 근대사를 돌아온 구도자의 발걸음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영화를 꿈꾸고 있다.
임권택은 영화를 '먹고 살기 위해서'시작했다. 18살의 나이에 기차값만 들고 홀홀단신으로 고향을 등진 소년은 부산에서 노가다판을 전전하며 밥벌이를 했다. 그러다가 인연을 맺게 된 군화장사꾼들이 남긴 군화로 장사판에 뛰어든다. 그리고 서울로 상경한 군화장사꾼들 가운데 영화일을 시작하게 된 몇몇 사람이 임권택을 찾았다. 오랜 전란을 지난 사람들이 황폐해진 마음을 영화로 달래던 시기였고, 영화는 좋은 돈벌이가 됐다. 그렇게 임권택은 또 한번 먹고 살기 위해서 서울행을 택한다.
잡역부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다 연출부 생활을 거쳐 비로소 감독에 데뷔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7년이었다. 1962년, 26살의 나이로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발표하며 첫 삽을 뜬 임권택은 그 뒤로 10년여 동안 50편에 달하는 영화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에 대해 누누이 부끄럽다고 고백하며 51번째 연출작 <잡초>(1973)를 자신의 두 번째 데뷔작이라 말해왔다. “내 자신이 나이 들어가면서 삶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가 되니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단 말이오. 미국 영화의 아류나 다름없는 영화들을 찍어대다가 점점 이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생계의 수단으로서 영화를 생산해내며 감독이란 직업을 택했던 그가 비로소 자기 세계를 추구하는 예술인의 삶을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로도 부침이 끝난 건 아니었다. “군사정권 때 반공영화, 생활영화를 많이 찍었는데 정권이 원하는 소재를 영화에 담아내면서 마음 속의 걸림 같은 소리가 들렸지요. 정권이 원하는 국책의 지향점을 영화에 담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를 살았을 때의 이야기에요.” 그는 한국 근대사 위로 풍랑처럼 떠밀려 가던 국내 영화계 위에서 자신의 돛을 펴고 표류하듯 나아갔다. 물론 시대의 큰 흐름에서 완벽하게 이탈할 수는 없었지만 <족보>(1978), <짝코>(1980) 등과 같이 훗날 재평가된 수작들이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건 중요한 대목이다. 그리고 한국영화 최초로 베를린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만다라>(1981)는 구도자의 세계관을 지닌 임권택의 내면을 비춘 첫 작품이었다. 이는 한국영화가 세계에 알려지는데 큰 공헌을 남긴 작품으로도 일컬어진다. 국내에서는 에로영화 취급을 받았지만 <씨받이>(1986)의 주연을 맡았던 강수연이 베니스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도 발생했다. 승려들의 반발로 촬영 도중 제작이 무산된 <비구니>의 아픔이 있었지만 임권택은 <아다다>(1987)나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로 구도자의 길을 보다 깊게 모색했다.
<장군의 아들>(1990)로 흥행감독의 대열에 올라선 임권택에게 90년대에서 가장 중요한 이력이 된 건 아무래도 <서편제>(1993)였다. 백만 관객을 동원하며 당대의 ‘국민영화’가 된 이 작품은 그보다도 임권택에게 보다 확실한 길을 열어준 작품이란 점에서 보다 중요하다. <서편제>보다 앞서서 제작됐던 <태백산맥>(1994)이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무산됐다가 문민정부의 출범을 통해 가능해졌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과거 일본 유학 중에 좌익사상을 익혀서 집에 돌아온 삼촌으로 인해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꼴을 봤던 그에게 이는 큰 시련이었다. “중요한 건 실제로 자기가 인생을 살면서 쌓아가는 직감적인 삶의 체험이고, 또 그런 삶 속에서 생을 바라보는 관점에 철이 들어야 한다는 것이오.” <서편제>는 험난한 근대사의 굴곡을 지나오며 영화적 수난을 감내했던 임권택의 깨달음을 대변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서편제>의 형제나 다름없는 <천년학>(2006)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퇴색되지 않는 장인의 면모를 확실하게 증명한다. 빛을 잃고 득음하게 된 여인의 소리가 논밭으로 변한 포구에 물을 채우고 비상학을 날리는 신비의 선경, 이는 <취화선>(2002)의 칸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만큼이나 값진, 유산과 같은 풍경이다.
“내가 99번째 영화까지 고만고만한 역량을 가지고 찍어왔는데 100번째 영화라 하여 그전보다 더 나은 괜찮은 영화를 만든다는 복안이 있을 턱이 없지 말이오. 그런데 어딜 나가도 100번째라 하니 부담스럽지 않겠소.” 그는 ‘100번째’라는 무거운 기념비를 빨리 내려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임권택 영화다운 것에서 벗어나는 작업”이었던 <달빛 길어올리기>(2011)는 어쩌면 그의 세 번째 데뷔작이라 불려도 좋을 작품이다. 처음으로 디지털 카메라 촬영을 시도한 <달빛 길어올리기>는 한지를 소재로 임권택이 완성한 또 하나의 ‘우리 문화 유산 발굴기’다. 하지만 극영화 속에 소재를 녹인 전작들과 달리 소재에 대한 기록성을 보다 중시한 다큐멘터리적인 요소가 차별성을 이룬다. “나 몰라라 하기에는 너무 소중한 것들이니까요. 그 시대적인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후대의 어떤 이가 나서서 우리뿐만이 아닌 세계 인류에게 다가가게 만드는 일이 생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고. 누군가가 이를 하고 있으면 나도 그만둘 수 있지 않겠소.”
그는 영화를 통해 삶을 꾸려왔다. 그리고 어느 날 감독으로서의 길을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50년 동안 감독으로서 굽이진 세상을 흘러왔다. “찍지 못하는 것보다도, 폐가 될까 걱정이지요. 가령 내가 영화를 찍다가 완성을 못하고 죽거나 갑자기 치매에 걸린다면 감독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임권택은 아직도 생의 끝보다 감독으로서의 끝을 고민한다. 거장, 장인, 거목, 그 거창한 수사들보다도 그에게 어울리는 건 현재형의 시제다. 그는 여전히 마르지 않고 흐르는 강물이다. 현역감독, 임권택은 여전히 영화를 찍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