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 하지만 상영하는 곳이 없다. 개봉한지 한 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지난 2월 27일, LA 코닥극장에서 열린 제8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대에 오른 장 뒤자르댕(Jean Dujardin)의 탭댄스가 생중계됐다. 조지 클루니, 브래드 피트, 게리 올드만과 같은 할리우드의 초신성급 배우들을 제치고 헬리 혜성처럼 나타난 장 뒤자르댕은 오스카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할리우드의 수많은 스타들은 무대에 오르는 낯선 프랑스 배우의 뒷모습을 보며 박수를 보냈다. 21세기에 등장한 무성영화 <아티스트>의 출현만큼이나 드라마틱한 반전이었다. 지난 해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였던 <아티스트>는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의 주요부문을 휩쓸며 아카데미 5관왕에 올랐다.
이 소식은 한국 관객들의 호기심마저 당겼다. <아티스트>가 재미있다고? 그러나 상영관을 찾기가 힘들다. <아티스트>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이 태평양을 건너온 건 28일 오전이었다. 전국 58관의 상영관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개봉 당시에는 90관이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사이트에 명시된 국내 총 상영관은 2312관이다. 스크린 점유율 약 1.6%. 물론 아카데미의 지원사격으로 <아티스트>는 좀 더 국내상영관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29일 경 95관으로 확대 개봉됐고, 3월 7일 경에는 100여 관 안팎을 오갔다. 개봉 이후, 한 달이 지난 3월 16일에는 29관에서 상영되고 있다.
<아티스트>의 북미 개봉일은 2011년 11월 25일이었다. 미국 내 전체 상영관은 36000여 관 정도로 추산된다. 4개관에서 개봉됐다. 점유율로 보자면 한국보다 더욱 심각한 셈. 하지만 과연 그럴까? 미국에서 개봉 네 달에 다다르는 3월 15일경, <아티스트>는 1500여 개의 스크린을 확보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개봉작의 상영관 확보 방식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와이드 릴리즈(wide release)와 리미티드(limited). 대규모 단위로 상영관을 확보하는 와이드 릴리즈는 거액을 들여 제작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단기간에 최대의 수익을 내기 위해서 상영관을 대거 포섭해 관객의 선택을 유도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리미티드는 그 반대다. 저예산으로 제작된 영화들은 많은 상영관을 확보할 수도 없고, 한 편으로 그럴 필요가 없다. 영화를 배급한다는 건 상영관에서 영사될 필름을 공급한다는 것이다. 필름을 제작하는 것도 자본의 소요다. 저예산 영화들의 수익구조 안에서 필름 제작에 자본을 소모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리미티드 방식의 배급은 불합리라기 보단 효율적인 선택이다.
한국과 미국은 배급사와 극장주의 수익 배분 구조도 다르다. 한국은 제작사와 극장주가 정확히 반반으로 나눈다. 공평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극장이 온전히 절반을 먹는다면, 제작에 관여한 제작사와 배급사 휘하의 모든 이들이 그 절반을 나눠먹는 구조인 셈이다. 제작사를 도매상으로 보자면 폭리를 취하는 소매상을 만난 격이다. 미국에서는 수익 구조가 유동적이다. 일반적으로 미국 극장들은 흥행이 기대되는 영화에게 80% 가량의 지분을 준다. 블록버스터들이 이에 해당된다. 반대의 경우, 상황은 역전된다. 극장이 8을, 제작사가 2를 가져간다. 흥행 여부가 불확실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주의 입장을 안배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 영화가 높은 수익을 올린다면? 상황은 다시 변한다. 수익 배분 구조 또한 역전된다. 2를 가져가던 영화사가 8을 가져가는 구조로 변한다. 그리고 흥행성이 확인된 영화의 상영관 또한 늘어난다. 리미티드에서 와이드 릴리즈로 전환된다. <아티스트>가 그랬다. 1월 20일, <아티스트>는 미국 내 662개 스크린을 확보하며 와이드 릴리즈됐다. 미국의 영화시장은 한국 못지 않게 대자본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다. 하지만 시장의 영향력도 그만큼 막강하다. 영화의 제작과 배급의 구조가 분리된 덕분이다. 국내 상황이 이와 다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하나다.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고 극장까지 소유한 대기업의 지배 상황이 공고한 까닭이다. 극장을 소유한 제작배급사의 위력은 2차 판권 시장이 초토화된 국내 시장에서 더더욱 강력해진다. 익명을 요구한 어느 제작사 대표는 말했다. “만약 DVD 같은 2차 판권 시장이 존재했다면 지금과 같은 불합리한 배급 구조가 이뤄지진 않았을 거다.”
국내에서 영화는 개봉주에 흥행이 되느냐, 안되느냐에 따라서 완벽하게 명암이 뒤바뀐다. 2차 판권에 대한 이익이 미비한 국내 영화 시장의 상황 속에서 제작사들은 상영관 확보에 총력을 기울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 극장을 소유한 제작배급사들이 저마다의 파이를 꽉 쥐고 있는 상황에서 영화의 다양성이 확보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전국 곳곳에 극장 체인망을 확보한 제작배급사는 스크린 점유율이 낮은 영화를 장기상영하며 관객의 입장을 유도하고 경쟁 영화들을 교차상영 방식으로 밀어낸다. 가뜩이나 설 자리가 비좁은 작은 영화들은 자연히 도태된다. 한때 독립상영관이 대안의 형태로 제시됐으나 몇 년 사이 수많은 독립상영관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대부분의 작은 영화들은 집을 잃었다. 시장 구조의 몰락이 가져온 결과다. 우리는 각자의 취향을 소비할 수 있는 권리를 잃었다. 어쩌면 그런 권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어필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건 대자본을 쥔 영화사를 탓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미국과 한국의 시스템을 단순 비교하며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다. 이건 기형적인 시장과 시장 규모의 문제이다. 시장이 넓어야 투자한 자본을 거둬들일 수 있는 경로의 확보도 보다 쉬워진다. 티켓을 살 관객은 모자라고, 흥행을 바라는 영화는 넘친다. 그야말로 바늘구멍에 낙타를 집어넣기. 그런 상황에서 일주일 단위로 영화의 성패가 결정되는 극장에서 제작비의 대부분을 회수해야 하는 수익구조는 심각한 문제다. 극장에서 내려간 영화는 갈 곳이 없다. 어쩌면 당신은 반문할 것이다. 그게 내 입장에서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당장 당신이 보고 싶은 영화가 없다면 상관없다. 하지만 당신이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을 때, 상황은 명확해진다. 그러니까 대체 <아티스트>를 상영하는 극장이 왜 이리 없단 말인가? 영화가 별로라서? 아니다. 그건 정작 당신이 찾기 쉬운 극장에서 딱히 당기지도 않는 영화가 상영하는 것을 별 생각 없이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영관을 찾아 발품을 파는 수고를 스스로 감당하려는 의지가 없을 때, 당신의 취향이 존중될 가능성도 희박해진다. 그저 손쉽게 클릭 한번으로 영화를 소유하는데 만족하는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손쉽게 영화를 소유하는 재미에 탐닉한다면, 그 영화들조차 존재할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근래 몇 년 동안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대작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유심히 지켜본 관객이라면 한국인 스태프의 이름을 심심찮게 발견했을 거다. 할리우드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프로덕션과 스튜디오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출신 VFX 아티스트들은 적지 않은 수를 자랑한다. 이들은 한국 VFX산업의 잠재적인 자산이다. 그리고 지금 영화의 패러다임의 전환이라 불리는 <아바타>에서도 한국인 아티스트들의 손재주를 확인할 수 있다. 텍스처 아티스트(Texture Artist) 전병건을 비롯해 시니어 모델러(Senior Modeler) 장정민, 시니어 페이셜 모델러(Senior Facial Modeler) 이진우, 노응호, 모델러(Modeler) 이선진, 리드 라이팅 임창의, ATD 라이터(Assistant Lighter) Sean Lee, 모션캡쳐 에디터(Motion Capture Editor) 김기현그리고 시니어 애니메이터(Senior Animator) 박지영까지, 총 9명의 한국인이 그 역사적 작업에 손을 보탰다. 그 중 두 명의 아티스트를 소개한다.
외국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를 소개해달라.
전병건(이하 ‘전’):홍대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6년에 샌프란시스코의 AAU(Academy Art of University)로 유학을 갔다. 웨타에 오기 전,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3편의 장편과 1편의 단편 애니메이션 작업에 참여했다. 플레이스테이션 제작사인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와 파라마운트 산하 스튜디오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다. 경력 초반에는 SNK, 액티비전, 소니 등 게임 시네매틱 분야에서 3-4년 일했고, 영화쪽 경력은 2003년부터 시작했다.
박지영(이하 ‘박’): ‘CalArts(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에서 캐릭터 애니메이션을 전공했고 졸업 후, 인디 영화사에서 2D 키애니메이터(Key Animator)로 일을 시작했다. 많은 2D 애니메이터들이 3D 파트로 전향하던 시기였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3년 전, 제임스 카메론이 <아바타>를 준비한다는 공고를 보고 웨타 애니메이션 팀에 지원했다.
<아바타>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의 역할을 맡았나?
전: 2008년 11월부터 초반 8개월은 CG로 만들어진 캐릭터나 배경, 소품 등에 색상과 질감을 입혀주는 텍스처 아티스트(Texture Artist)로, 나머지 4개월은 완성된 장면에 조명을 더해 최종 이미지를 그려내는 조명 스텝(Lighting Technical Director)으로 일했다. 부서를 옮겨가며 일하다 보니 더욱 폭넓게 <아바타>의 제작과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박:시니어 애니메이터(Senior Animator)로 참여했다.영화에 등장하는 동물과 식물을 살아 숨쉬는 생물체처럼 보이게 하는 일이다.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모든 동식물들은 직접적인 순수 애니메이션 방식으로 탄생됐다.
할리우드의 제작 방식을 경험했을 때 특별하다고 느낀 바가 있었을 것 같다.
박:자본의 적극적인 투자가 이뤄지고, 체계적인 프로덕션 파이프라인 구축됐으며 유능한 프로페셔널 아티스트들이 많다. 투자자본이 많은 만큼 새로운 기술개발 투자가 이뤄지고 그렇게 개발된 신기술들이 바로 영화에 활용된다. 특히 프리 프로덕션이나 기획 단계에 많은 공을 들여서 소프트웨어와 테크놀로지 개발을 진행하고 탄탄한 스토리 구성을 갖추는 등, 효율적인 프로덕션 계획을 철저히 이룬다. 덕분에 철저한 계획에 맞물려 능률적인 작업 환경이 완성되며 시간소비가 줄어든다. <아바타>도 제임스 카메론과 20세기 폭스가 몇 년에 걸친 준비기간 동안 ’Pace Fusion 3D Camera System’이라는 새로운 카메라 기술을 개발했다. 이런 신기술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실력을 지닌 아티스트가 많다는 것도 할리우드 VFX산업의 강점이다.
한국VFX기술의 발전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나?
전:열악한 제작환경 속에서도 여기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상당히 고무적이다. 규모가 적지만 최소한 자국 영화 시장이 있다는 환경적 조건과 함께 열악한 환경을 견뎌내고 현재까지 산업을 이끌어온 한국의 VFX 종사자들의 역할이 크다고 본다. 하지만 비슷한 경제 수준을 지진 타국과 비교했을 때, 한국의 기술이 특별히 월등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러시아에서 만든 <나이트 워치>(2004)나 <데이 워치>(2006)의 VFX수준이나 최근 전세계를 대상으로 <아스트로 보이>와 같은 풀 3D애니메이션을 제작한 홍콩의 사례도 있다.
박:한국영화 관계자들이 VFX의 엔터테인먼트 산업 부흥 효과에 많은 관심을 가진 덕분에 해마다 VFX를 이용한 영화에 대한 투자가 증가하고 덕분에 영화의 소재도 표현력이 풍부해지고 있다. VFX활용도는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과거보다 이 분야를 공부한 전문 인력이 많아진다는 것도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최근 한국 VFX 업체의 외국진출 움직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전:한국 VFX업체의 해외 프로젝트 공동 작업과 해외 진출은 매우 바람직한 방향이고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적은 규모의 시장에서 국내 관객만을 대상으로 산업을 이끌어 나간다면 VFX의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현재 할리우드 제작사에서는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서 할리우드를 벗어나서 많은 프로젝트를 제작하고 있다. 실력만 검증되고 영어로서 커뮤니케이션만 가능하다면 해외의 VFX나 애니메이션 수주를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거다. 문제는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스스로 파악하고 그 문제점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는가다. 한국은 자국 영화와 게임 시장이 존재하고 수준 이상의 전문 인력이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하이엔드 제작 경험을 가진 인력이 부족하고 영어로 커뮤니케이션이 서툴다. 지금 VFX와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미국의 수주를 받는 나라는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싱가폴, 인도와 같은 영어권 국가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