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으로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본 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정확히 6년 전이었지요. 하얀 말티스였는데 정말 귀여웠습니다. 처음으로 개를 키운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살다 보니 보통 일은 아니었습니다. 영역 표시를 열심히 하는 탓에 하루에만 침대 이불을 두 번이나 갈아야 했던 적도 있고, 갈갈이 찢긴 휴지 조각을 열심히 주워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잘못 떨어뜨린 꼬치전을 집어 물고 도망가서 삼켜버린 탓에 이쑤시개가 그대로 위에 걸려서 개복 수술을 받기도 했습니다. 수술을 받고 누워있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요. 그리고 수술비를 결제할 때는 정말 억장이 무너지더군요.
아마 애견가라면 혹은 반려동물에게 관심이 많은 이라면 ‘올드독’이란 이름을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올드독’은 일러스트 작가인 정우열 작가의 분신 같은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키우는 두 마리의 폭스 테리어 ‘소리’와 ‘풋코’를 닮았지요. 정우열 작가의 블로그나 SNS를 통해서 소리와 풋코의 일상을 접해본 이들도 많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요. 덕분에 한번도 직접 보진 못했지만 굉장한 애정이 생겨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개를 그리다>는 지난 10년간 동고동락한 소리와 풋코와의 일상을 직접 찍고, 그리고, 쓴 ‘올드독’ 정우열 작가의 일러스트 에세이입니다.
“개와 함께 살면서 배운 세상을 담았다.” <개를 그리다>를 여는 첫 문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면 당신은 아마 진정으로 동물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개를 혹은 반려동물을 키워준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고요. <개를 그리다>는 개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지 자랑하는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사는 그 삶의 소중함이 그만한 각오와 책임이 뒤따르는 덕분에 가능했음을 설명하고 설득합니다. 그리고 그 동행을 통해서 생명 자체에 대한 존중을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보다 확실하게 깨닫고 행하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키우는 개나 고양이 그밖의 반려동물들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복무하는 도구나 상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자각하게 됩니다. 그만큼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예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사실 인간들은 동물들이 살아갈 영토 대부분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차지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인간의 영역에 침범한 것처럼 길에 들어선 동물들을 구박하고 가혹하게 대해왔죠. 길고양이를 비롯해서 주인 없는 개들은 사실상 인간에 의해서 살아갈 터전을 잃어버린 피해자일지도 모릅니다. 그밖에 세상의 동물들 대부분이 그렇죠. 그러므로 인간은 기본적으로 그 대상들 모두에게 미안함을 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자신이 먹이를 주는 반려동물일지라 해도 그들이 살아가기 좋은 곳은 고층 아파트도, 잘 꾸며진 주택도 아닙니다. 그러니 지나치게 생색을 내진 맙시다. 오히려 그런 환경에서도 잘 살아가는 반려동물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지요.
한편 현재 이 책이 출간된 이후로 소리가 심각한 뇌종양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소리가 힘을 내서 일어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소리에게 줄 좋은 간식을 사 들고 당장이라도 뛰어가고 싶을 거예요. 부디 간식을 살 수 있게 되길 기원합니다.
그저 지켜주고 보호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5년을 함께 하니 알겠다. 그저 나만 주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집안의 풍경도, 삶의 태도도, 우리 강아지 하늘이로 인해서.
어느 날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대화하는 목소리가. 어머니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마치 애한테 말을 걸 듯 오냐, 오냐, 하셨다. 상대는 말이 없었다. 그저 두 눈 동그랗게 뜨고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을 뿐. 강아지였으니까. 원래 어머니께선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으셨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려동물을 집에 들이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런 어머니께서 강아지와 어느 순간부터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엄밀히 말하자면 혼잣말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건 2008년 2월 즈음이었다. 생후 3개월 된 말티스가 집에 온 건 정확히 2월 12일이었고. 누나가 어머니께 잠깐 집에 데려다 놓을 거라 말했던 것도 어느덧 5년을 넘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강아지 키워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이름은 하늘이다. 뭔가 좀 더 시크하거나 세련된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는데 처음 태어났을 때 불린 이름이 하늘이라 해서 그냥 동일한 이름을 불러주기로 했다.
요즘 집에서 강아지 키우는 게 한두 집도 아닌데 별일이냐고 묻는다면 나에겐 별일 맞다. 나이 서른에 다다라서야 반려동물을 집안에 들인다는 건 때때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처음엔 대부분 우여곡절이었다. 강아지는 좌변기를 사용할 줄 모른다. 그럴 수가 없지. 그러니 녀석의 뒤처리(?)를 직접 ‘핸드 메이드(?)’로 해줘야 한다는 건 대단한 도전이었다. 길들이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화장실이 가까운 마루 한 부근을 하늘이의 화장실로 내줬다. 하지만 침대 이불에서 하늘이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이 잦아졌다. 부아가 치밀어서 도끼눈이 된 내 시선을 바라보는 천진난만한 표정 덕분에 사리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일단 전문가의 조언을 따르자면 그 흔적을 치우기 전에 강아지를 그 흔적이 보이는 곳 앞에 데려다 두고 가리키면서 신문지를 말아서 바닥을 치면서 혼내던가, 가끔 코를 때리는 것도 효과가 있다고 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된 상태라면 역효과만 생길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발견하는 것도 관건이라 했다.
차츰차츰 하늘이의 흔적을 치우는 게 익숙해질 즈음, 하늘이도 자신이 가려야 할 자리를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알아듣는 말이 늘었다. 어느 날 퇴근 후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께선 갑자기 불러선 ‘이것 좀 보라’고 하셨다. 손가락을 가리키며, ‘앉아!’ 하니 앉았다. ‘손!’하니 손을 내밀었다. 이 기분은 뭐랄까. 자식을 얻은 친구 중에 어느 날 어린 아기가 갑자기 몸을 발라당 뒤집으니까 기분도 갑자기 발라당 뒤집어지듯 미친 것마냥 좋아졌다는데, 이런 걸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얼마 뒤, 어머니는 하늘이의 새로운 능력을 다시 개발해주셨다. 손가락을 가리키며 ‘빵야!’하는 순간, 등을 대고 발라당 누워서 죽은 듯 가만히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돌아!’하면 제 자리에서 뱅글 돌고, ‘굴러!’하면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는 모습을 보니 잠시 군대에서 유격 훈련 받던 기억이 나서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아니하였지만 그래도 대단히 기막힌 기분이었다. 비결은 그저 손에 들고 있는 간식이었다. 그리고 녀석은 점점 머리를 굴려서 간식을 들고 있지 않으면 손가락으로 무슨 짓을 해도 딴청을 피웠다. 문득 기억이 났다. 수의사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 “하늘이가 똑똑한 것 같아요.” 네. 그런 것 같네요.
사실 하늘이는 처음부터 심장이 좋지 않았다. 손바닥보다 조금 컸을 무렵, 심장의 판막 하나가 제 기능을 못해서 혈액순환에 문제가 있을 거란 진단을 받았고, 1년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견해까지 들었다. 혈액 순환을 방해할 수 있는 육류 음식의 섭취는 제한하고, 최대한 뛰지 못하게 하라는 말도 들었다. 전자는 충실히 지키고 있지만 후자까지 막긴 어렵다. 사실 산책을 주기적으로 자주 시켜주는 형편은 못 되는데 하늘이는 집 안에서 기분만 좋으면 장난을 걸고 털이 휘날리게 뛰어다닌다. 처음엔 뛸 때마다 놀라서 막았지만 이젠 5년이란 시간을 보내고 나니 가끔씩은 설마 오진은 아니겠지, 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다. 한번은 대수술을 감행한 적이 있다. 명절에 이쑤시개에 꽂힌 전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을 하늘이가 보고 대번에 삼켜버린 적이 있었다. 이쑤시개가 가로로 걸려서 위에 천공이 생겼고, 낑낑대는 녀석을 안고 병원에 가서 개복수술을 했다.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는 하늘이를 보러 위문을 갈 때마다 측은하게 낑낑거리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추후에 '0'이 무려 6개(!)가 붙은 수술비 및 입원비를 결제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보험 적용도 안 되는 반려동물 병원비에 부가세까지 붙이는 건 정말 너무한 처사라니까.
마루 한 구석에 화장실이 생겼다던가, 언젠가 관절염에 걸릴까봐 점프를 하지 않도록 계단 형태의 스텝을 침대 곁에 뒀다던가, 하늘이가 갖고 노는 장난감이나 인형이 집안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던가, 방 한 쪽에 있는 하늘이 물통을 수시로 살핀다던가, 화장실 문을 꼭 닫아둔다던가, 눈에 띄는 집안 풍경의 변화란 이처럼 소소하다. 하지만 집에 들어갈 때 나를 맞이하는 이가 없지 않다는 안도감이라던가, 집안에서 말을 걸 상대가 하나 늘었다던가, 평소에 하지도 않던 산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던가, 작은 인형 같은 걸 보면 사고 싶은 마음이 든다던가, 말 그대로 일상적인 사고가 변했다. 저 밖의 현관 대문 앞에 서기만 해도 녀석은 놀랍게 알아보고 짖어댄다. 유독 나에게 그렇다. 강아지 좀 키워본 지인은 반갑다는 표시일 거라 했다. 하긴 꼬리를 흔들어대더라니.
하늘이가 집에 오기 전까진 몰랐던 것들이 있었다. 단지 동물을 집에서 키우는 것, 즉 내가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공존하고 있다. 단지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있어서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하늘이는 세상을 떠날 것이다. 내가 몹쓸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지 않는 이상 하늘이는 나보다 먼저 늙고, 먼저 눈을 감을 거다. 요즘은 종종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 처음엔 한 손 위에 올려놓아도 됐던 하늘이는 이제 양손으로 들면 제법 무게가 느껴진다. 그 선물 같은 무게를 느끼지 못할 때가 올까봐 조금 두렵다. 그러니까 일찍 가지 말고 오래 살아줘. 지금처럼 동그란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목욕할 때 말 안 들어도 구박하지 않을 테니까. 물론 이쑤시개 같은 건 다시 삼키지 않는 걸로. 다 널 생각해서 그런 거야. 무려 '0'이 6개라서가 아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