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방 안에 앉아 있는 소녀에게는 그득한 불길함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 불길함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현실로 박차고 나온다. 아내의 유산이 두 딸에게 고스란히 넘어간다는 것에 대한 의붓아버지의 분노는 학대적인 행위로 번진다. 그리고 폭력적인 그를 피하려던 소녀는 위기에 놓인 여동생을 보호하고자 총을 든다. 손가락 끝에 걸린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총구로 총알이 튕겨져 나온다. 하지만 의붓아버지를 스치고 지나간 총알은 여동생을 관통한다. 여동생의 죽음과 함께 경찰에게 연행된 소녀는 의붓아버지의 동의 하에 정신병원에 인도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베이비돌(에밀리 브라우닝)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처참한 일상에 직면한다.
일단 앞서 설명한 서사의 줄기를 읽은 당신이라면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예고편에서 줄기차게 등장하는) 거듭되는 액션 시퀀스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울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써커 펀치>에서 등장하는 액션 시퀀스는 소녀 베이비돌의 상상 속에서 구현되는 판타지 혹은 망상이다. 소녀가 정신병원에 수감되기까지의 과정을 별다른 대사 없이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션으로 중계하던 영화는 어떠한 예고나 조짐도 없이, 어느 한 찰나에 급작스러운 시공간의 점프컷을 이행한다.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소녀는 퇴폐적인 물랑루즈의 쇼걸로 전락한다. 공간에 대한 정보가 모호한 이 영화는 캐릭터들의 행동과 심리를 액션 시퀀스로 연동시키는데 주력하는 반면, 그 캐릭터들이 속한 체제의 현실감을 완전히 무력화시킨다.
사실 이는 연출자 개인의 야심이 강력하게 피력된 일종의 수단에 가깝다. 잭 스나이더는 <써커 펀치>를 완전한 자기 취향의 전시적 행위 혹은 전리품으로 인식한 것처럼 보인다. 장단은 그 지점에서 등장한다. 스팀펑크적 모티프를 배경으로 한 아날로그적인 전투 시퀀스, 거대한 사무라이 로봇이 등장하는 일본식 무협, 미래적인 테크놀로지의 이미지가 눈에 띄는 SF액션, 거대한 드래곤이 등장하는 판타지까지, <써커 펀치>는 재패니메이션을 비롯해서 망라한 만화적 취향이 총동원된 액션물이다. 또한 바디수트와 가터벨트, 망사팬츠, 세일러복까지, 일본 망가의 미소녀 캐릭터가 연상되는 여전사 이미지는 스테이지 형식으로 진전되는 단계적인 액션 시퀀스와 함께 완전한 버추얼 게임의 속성을 띠기 시작한다.
단계적인 게임 스테이지의 속성을 띤 <써커 펀치>는 <인셉션>과의 구조적 비교가 가능하며 야심 또한 유사한 영화다. 꿈과 현실이라는 단면을 재료로 다양한 액션 시퀀스 연출이 가능한 신을 마련하기 위해 구조적인 합의를 구축해나간 <인셉션>과 마찬가지로 <써커 펀치>는 현실과 무의식 속의 상상을 구체적인 이미지의 시퀀스로 세워나간다. 하지만 <써커 펀치>는 <인셉션>에 비해 이성적인 구조로 설정의 무리수를 설득해내는 영화가 아니다. <써커 펀치>는 무의식 속에서 스펙터클하게 확장되는 파편적인 액션 시퀀스들을 전시하고 수집하는, 무리수를 스스로 감당해낼 수 있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영화다. 이는 대단한 야심이기에 그만큼 위험한 방식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이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동시에 강력하게 밀어붙이는데 여념이 없다. 그렇기에 이런 연출 방식은 의도 자체로서 성공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그런 의도가 완벽한 설득을 이루고 있는가라는 지점에서 또 한번의 문제가 발생한다.
<써커 펀치>는 잭 스나이더라는 어느 개인의 취향이 총아를 이루는, 지극히 개인적인 작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취향이, 오락적인 자극의 역치를 이루는 액션 시퀀스들이 즐비한 이 영화를 고립시킨다. CG로 범벅이 된 이 영화의 액션 시퀀스는 여러 모로 눈여겨볼만한 완성도를 자랑하며 그 가짓수만큼이나 흥미도 확대될만하다. 하지만 거듭되는 버추얼 액션 시퀀스가 자극의 역치를 높이는 반면 상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현실은 급속도로 흥미를 반감시키고, 동시에 반복되는 액션 시퀀스의 자극의 역치 또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버리는 측면이 있음을 간과하기 어렵다. 이 영화가 품은 의도나 태도에 대한 이해 여부에 따라 작품 자체가 존중 받을 길은 있으나 결과적으로 이런 연출적 형태로 완성된 영화가 완벽한 자신만의 이상향에 다다랐다고 말하기에도 석연찮은 덕분이다.
비주얼리스트로서 할리우드에 자신의 입지를 구축한 잭 스나이더에게 <써커 펀치>는 그의 세계관을 대변하는 소품에 가깝다. 디스토피아적인 정서와 여전사의 면모를 지닌 걸캐릭터들, 그리고 화려한 액션 시퀀스의 화력과 톤다운된 화면의 질감, 비트가 강한 일렉트로니카와 락넘버들, 이 자극적인 요소들로 점철된 <써커 펀치>는 그 대단한 화력을 무기로 삼아 감상을 초토화시킨다. 여기서 감상의 초토화란 영화에 장악 당한다는 의미일수도 있고, 반대로 지나친 자극이 영화적 몰입의 장애물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전자보다는 후자로서의 가능성이 더욱 커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개인적인 야심과 취향이 매력적인 유혹을 일으키지만, 오르가슴을 공유하지 못하고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한 섹스뿐인 상대와의 관계는 불화로 나아갈 가능성이 농후한, 치명적인 약점 아닐까.
소녀는 꿈을 꾼다. 그리고 꿈은 언제나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소녀는 어머니의 사고가 있던 날의 기억을 잃었다. 그래서 정신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던 중이다. 하지만 비로소 퇴원했고, 자신을 데리러 온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엔 반가운 언니가 있지만 반갑지 않은 새엄마도 머물고 있다. <안나와 알렉스: 두자매 이야기>(이하, <안나와 알렉스>)는 그 자매와 새엄마 사이의 갈등을 다룬 이야기다. 안나(에밀리 브라우닝)와 알렉스(아리엘 케벨)는 아버지(데이빗 스트라탄)의 새로운 연인 레이첼(엘리자베스 뱅크스)을 경계하고 그녀를 주시한다.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을 리메이크한 <안나와 알렉스>는 분명 모체의 유전인자를 무시할 수 없는 골격과 외양을 지닌 작품이다. 이는 분명 <장화, 홍련>을 환기시키기 좋은 자질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안나와 알렉스>는 서정적인 감수성과 원초적인 기운이 얽힌 호러적 연출로 분위기를 장악하던 <장화, 홍련>과 전혀 다른 결과물이다. 자신의 유전적 영향력을 어필하기 보단 독자적인 개성을 공고히 다지려는 산물에 가깝다. 폐쇄적인 공포가 동화적 순수와 결합돼 발생시키던 중의적인 심리적 의문을 미스터리의 중추로 밀고 나가던 <장화, 홍련>과 달리 틴에이저 스릴러의 이미지와 함께 병리학적 콤플렉스 증세를 설명하며 물리적인 실체로서의 미스터리를 설득시키려 한다.
<안나와 알렉스>에서 중시되는 건 인과적 내러티브다. 나열된 정보는 위장을 통해 관객의 의문에 혼선을 더하고 호러적인 연출을 덧씌우며 그 근본지점에 대한 추리를 차단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그 인과관계는 분명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영화의 반전은 시점의 착시를 통한 눈속임과 허위적인 정보 제공으로 이뤄진 결과물에 가깝다. 명확한 인과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설득시키지만 결과물이 주는 쾌감은 효과적이지 않다. 그 인과관계가 뛰어난 구조적 자질을 통해 구축된 것이 아니라 시야를 제한하고 엉뚱한 것으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거짓 정보의 향연으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발생시키는 다양한 정보들은 결국 안나의 심리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착란에 불과하다. 결국 관객은 그 모든 진실과 무관한 풍경을 보는 셈이다. 결국 그 진실을 목도하게 되는 순간에 충격을 느끼기 보단 뒤늦게 진실을 대면할 뿐이다. 놀라운 반전이라기 보단 속임수에 가까운 잡기다.
연출적 야심은 평범하고 복선들은 쉽게 허무해진다. 설득력은 있지만 놀라운 구석을 찾기도 힘들다. 하지만 때때로 평범하다는 말은 단점이 되기도 하지만 장점이 되기도 한다. <안나와 알렉스>는 그런 케이스의 영화다. 때때로 연출되는 호러적 이미지들이 식상하긴 하지만 이야기를 쫓아가는 재미는 적절하게 보장된다. 최소한 전개될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장화, 홍련>에 매혹된 관객에게 하대 받을 가능성은 크지만 독자적인 영역에서 보자면 야심에 걸맞은 결과물이라 평할 만하다. 분위기보단 설득에 치중했다는 점에서도 두 작품의 대비는 동서양의 정서적 차이로 읽힐만한 구석이 있다. 그런 점에서 <안나와 알렉스>는 타당한 면이 있는 결과물이다. 다만 좀 더 확실한 건 <안나와 알렉스>가 <장화, 홍련>보다 괜찮은 작품이라 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전자와 전혀 다른 야심을 지녔다 해도 그 그릇의 자질엔 분명 차이가 있다.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을 리메이크한 <안나와 알렉스: 두자매 이야기>(이하, <안나와 알렉스>)는 모체의 유전적 영향력을 어필하기 보단 자신만의 개성을 공고히 다지려는 산물이다. 물론 유전인자를 무시할 수 없는 골격과 외양은 전자의 기억을 소환하기 좋은 자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안나와 알렉스>는 서정적이며 원초적인 호러로 분위기를 장악하던 <장화, 홍련>과 달리 물리적인 실체를 동원해 미스터리를 설득시킨다. 폐쇄적이고 음습한 기운이 동화적인 순수와 결합돼 중의적인 심리를 풍기던 전자와 달리 후자는 전형적인 틴에이저 형태의 이미지에 병리학적 컴플렉스 증세를 더하며 인과적 내러티브를 완성해나간다. <장화, 홍련>의 분위기 자체에 매혹된 관객이라면 <안나와 알렉스>를 그만큼 하대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독자적인 영역에서 보자면 야심에 걸맞은 결과물이라 평할 만하다. 다만 연출적 자질은 평범하고 관객의 혼선을 도모하려는 복선들은 쉽게 허무해진다. 설득력은 있지만 놀라운 구석을 찾기도 힘들다. 평범하다는 말은 때때로 장점이 되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한다. <안나와 알렉스>는 아무래도 그 중간 즈음에 머문 영화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