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패스벤더는 긴 시간 무명의 세월 속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수면 위로 떠오른 그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기다림은 증발했다. 패스벤더는 지금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
“그동안 스스로 의무감을 지니고 있었던 ‘전면 누드’를 대신해준 마이클 패스벤더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조지 클루니의 수상 소감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패스벤더는 지난해 <셰임>으로 과감한 전면 노출을 선보였다. 클루니는 자신과 함께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 후보로 오른 패스벤더의 연기를, 그간 ‘섹시한 배우’로 언급되던 자신에 빗대 질투심 담은 장난끼로 표현한 것이다. 마치 클루니가 패스벤더에게 자극을 받았다는 의미로도 들린다. 사실 패스벤더는 아직 낯선 배우다. 현재 그는 정점으로 올라서고 있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출신인 패스벤더는 두 살 무렵, 가족과 함께 아일랜드 남서부 도시 킬라니로 이사했다. 중학교 시절, 처음으로 연기 수업을 받게 된 그는 영국과 미국의 영화들을 섭렵해나가며 자신의 길을 찾게 된다. 졸업 후, 연기 공부를 위해 런던으로 간 패스벤더는 학업을 중단하고 극단의 투어에 동참한다. 그의 자리는 무대 위가 아니었다. 극이 끝난 뒤, 무대를 정리하고 짐을 옮기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배역이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바텐더 일을 하면서 오디션장을 전전한 건 그 무렵이었다.
“그저 본능에 충실했다.” 캐릭터 선택에 관한 패스벤더의 답변이다. 그런 본능이 쓸모 있는 것임을 증명한 건 스티븐 스필버그와 톰 행크스가 제작한 TV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스>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생생하게 그린 이 작품은 패스벤더가 내세울 만한 첫 경력이었다. TV시리즈를 비롯해서 갖은 경력을 쌓아오던 그는 <300>(2006)에서 선명한 식스팩을 자랑하는 스파르타 전사의 일부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스크린 속의 머릿수를 채우는 역할로, 기억을 채울 만한 인상을 남기는 역할을 차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당시까진 그랬다. 영국의 작가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소설을 영화화한 프랑수아 오종의 <엔젤>에서 주연으로 등장한 건 그 다음 해였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패스벤더는 자신의 연기 인생을 좌우할만한 첫 번째 전환점을 만난다.
스티브 맥퀸의 문제적인 단편 연출작 <헝거>(2008)는 아일랜드 독립투쟁을 전개하던 IRA 단원 바비 샌즈의 옥중 투쟁 실화를 스크린에 재현한 작품이다. 아이랜드의 독립투사인 마이클 콜린스의 피를 물려받은 패스벤더가 이를 연기한 건 어쩌면 운명이었다. 물론 만만한 역할은 아니었다. 단식 투쟁을 전개하고 끝내 목숨을 잃을 때까지도 이를 멈추지 않았던 바비 샌즈가 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굶주림을 견뎌내는 수밖게 없었다. 그리고 패스벤더는 이런 가혹한 방식을 스스로에게 납득시켰다. “나는 약 14kg을 감량했고 결국 59kg까지 빠졌다. 그것이 (내 연기가) 설득력을 얻고자 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런 노력은 칸영화제의 신인감독상이라 불리는 황금카메라상 수상 등으로 이어지며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패스벤더는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바 있는 영국의 여류 감독 안드레아 아놀드의 <피쉬 탱크>(2009)에 출연하며 또 한번 칸 레드 카펫을 밟았다. 아놀드에게 또 한번 칸 심사위원상을 안겨준 이 작품에서 패스벤더는 쉽게 뭇 여성들의 호감을 얻을 만큼 매력적인 미소를 지닌 남성으로 등장한다. 고행에 가까운 연기를 펼쳤던 <헝거>와 달리 일상적인 캐릭터를 연기하고 그런 평범한 캐릭터에 감춰진 추악한 단면을 담담하게 드러내는 그에게서 새로운 표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헝거>와 <피쉬 탱크>는 패스벤더가 연기적 긴장과 이완의 너비가 넓은 배우임을 드러내는, 극단의 스펙트럼을 증명하는 포트폴리오나 다름없었다.
패스벤더는 일찍이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1992)을 연극 형태로 기획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에 출연한다는 건 특별한 경험이었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역할은 아니었지만 독일 출신인 그가 독일어에 능통하지 못한 미국 군인으로 등장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농담이자 유머였다. 제9군단에 관한 전설적인 실화를 각본화한 닐 마샬의 <센츄리온>(2010)은 혹평을 얻었지만 로마의 백인대장을 연기한 패스벤더에겐 터프하고 진중한, 전형적인 남성성을 선보이는 기회로서 손색이 없었다. 물론 그 중간중간에 <타운 크릭>(2008)이나 <조나 헥스>(2010)와 같이, 작품 자체가 어떠한 인상을 주지 못한 범작에서도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2011년은 패스벤더의 경력에 방점을 찍은 한 해다. <제인 에어>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데인저러스 메소드> 그리고 <셰임>까지, 지난 한 해 그는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경력을 쌓아 올렸다. 샬롯 브론테의 동명 고전을 중후한 고딕 로맨스물로 완성한 <제인 에어>에서 로체스터를 연기한 패스벤더는 완고하면서도 로맨틱한 매력을 전하는 동시에 여심을 자극할 만한 연민을 지닌 남성으로 자신을 각인시킨다. 한편 패스벤더의 인지도를 수직 상승시킨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서 그는 차갑고 냉소적이지만 다혈질적인 분로를 발산하는 매그니토를 연기하며 캐릭터의 매력적인 기원을 선사한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심리분석학자 프로이트와 칼 융, 그리고 융이 치료한 신경증 환자 사비나, 이 세 사람의 의문스러운 관계를 살핀다. 무엇보다도 키이라 나이틀리의 열연이 눈에 띄는 이 영화에서 패스벤더는 기품 있는 태도를 견지하던 융이 음흉한 심리를 드러내는 순간의 이중성, 즉 희열과 절망의 아이러니를 표현해냄으로써 극적인 의도에 완벽하게 복무한다. 맥퀸의 새로운 연출작이자 클루니의 질투마저 유발한 패스벤더의 <셰임>은 그의 경력을 정점으로 끌어올렸다. 파멸적인 쾌락을 즐기는 남자와 함께 고통스러운 과거를 공유한 여동생, 그 남매의 흔들리는 일상을 그린 작품이다. <셰임>으로 패스벤더는 제68회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의 명예까지 얻었다. “그는 한 세대 안에서 허락된 단 하나의 배우다. 남자 중의 남자이나 여성성과 나약함도 드러낸다. 그런 점이 대단히 매력적이다.” 패스벤더에 대한 맥퀸의 찬사다.
올해에도 패스벤더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최근 스티븐 소더버그의 액션물 <헤이와이어>로 한 해를 시작한 패스벤더는 오는 여름을 기다리고 있다. <에이리언>(1979)의 프리퀄로 잘 알려진 리들리 스콧의 <프로메테우스>가 개봉을 앞두고 있따. “알다시피, 나는 많은 시간을 날려먹었다. 이제 태양이 떴으니 건초를 만들어야지.” 기다리던 태양처럼, 지금 마이클 패스벤더가 빛나고 있다.
세 편의 시리즈와 한 편의 스핀오프에 이은 프리퀄.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낡은 시리즈의 심장을 되살리는 할리우드의 심폐소생술 공식을 충실히 따른 결과물이다. 하지만 어떠한 기획 의도와 무관하게 이 작품은 시리즈의 갱생을 위한 성공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다.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의 성장 과정, 그들의 만남, 그리고 결국 그들이 갈라서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창세기적인 서사의 흥미만큼이나 ‘엑스맨’이라는 유닛의 개성과 이 시리즈의 장점이 어디 있는가를 잘 아는 작품이다. ‘페이스오프’되거나 업데이트된 돌연변이 캐릭터들의 신선한 활약상을 전시하는 것만으로도 감각이 짜릿해진다. 유머와 서스펜스, 드라마와 액션이 탁월하게 배합된 이 영화의 감각은 매튜 본이 브라이언 싱어 못지 않게 재능 있는 연출가임을 설득시키고도 남는다. 무엇보다도 이 매력적인 돌연변이들의 근원을 소개하는 근사한 기회가 마련됐다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의 가장 뚜렷한 성과일 것이다. 시리즈를 위한 단단한 뿌리가 생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