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엘르>를 넘기는 당신은 여자 아닌가? 빤한 질문 아니냐고? 그렇다면 혹시 <엘르> 보는 남자본적 있나? 이것도 빤한 질문인가?
남자들은 <엘르>를 보지 않는다. 이게 무슨 자폭 테러이고 자학 공갈인가 싶겠지만 경험상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렇다. 궁금하다면 한번 직접 물어보시라. “<엘르> 챙겨봐”라고 말하는 남자가 얼마나 있는지. 물론 전제조건이 있다. 질문을 받을 그가 일단 패션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 혹은 산업적인 관련이 없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잡지보는 것 자체를 낙으로 자처하는 남자 역시 여기서 말하는 그 ‘남자’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남자’의 자격이란 최소한 손을 뻗어서 닿는 위치에 놓인 잡지를 한번쯤 훑어볼 정도로 잡지에 완벽하게 무관심하지 않은 남자를 의미한다. 감히 장담하건대, “몇 번 본적 있어”라고 말하는 남자를 만나기가 생각보다 어려울 거다.
<엘르>를 읽지 않는 그들은 흔히 여성 패션지라고 일컫는 대부분의 매거진을 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여성’ 혹은 ‘우먼’이란 단어로 수식되는 매거진 대부분이 마찬가지다. 그들은 여자들이 주독자층을 차지하는 잡지에 관심이 없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보이시한 여자’는 있어도 ‘걸리한 남자’는 없다. 남자 옷을 입은 여자가 패셔니스타 대접을 받을지 몰라도 여자 옷을 입을 수 있는 남자는 구경거리가 되고도 남는다. 정말 왜소한 체격의 남자가 아니고서야 골격의 구조상 입을 수 있는 옷조차 드물다. 단적으로 남자는 치마를 입지 않는다. 물론 당신은 “마크 제이콥스는 치마를 입잖아!”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솔직하게 답해보시라. 당신의 애인에게 치마를 입힐 자신 있나? 혹시 스코틀랜드의 전통의상인 킬트(kilt)로 딴지 거는 사람은 반사. 게다가 남자들은 립스틱이나 코스메틱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다. 마찬가지로 그 아이템과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이 아니라면 말이다.
반대로 여자들 중엔 남성 패션지를 본다는 심지어 즐겨본다는 여자가 생각보다 적지 않다. 그리고 그건 그녀들이 남성복을 입을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관심이 많다. 그럼 남자가 여자한테 관심이 없냐고? 그럴리가. 다만 서로에게 갖는 관심이나 호기심이 다를 뿐이지. 예를 들자면 여자는 남자에게 넥타이를 매줄 수 있다. 남자도 여자의 집업 드레스의 지퍼를 올려줄 순 있지만 그건 엄연히 다른 행위다. 남자가 남자의 넥타이를 매주는 거 봤나? 웬만해선 시도하지 않는 행위다. 하지만 여자는 여자의 지퍼를 올려줄 수 있다. 남자의 복식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는 동성인 남자보다 이성인 여자에게 주어진다. 여자가 남자의 영역을 침범하는 건 자연스럽단 말이다. 그리고 그러고 싶어한다. 대부분의 여자는 자신의 남자를 자신의 기준대로 변화시키는데 능하다.
반대로 남자는 여자의 취향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최소한 그 취향이 눈뜨고 볼 수 없는 재앙이거나 집안 기둥뿌리 뽑아먹는 재난이 아닌 이상에야 그렇다. 대부분의 남자는 자신의 여자를 변화시키고 싶은 욕망이 없다. 선물을 하는 방식에서도 그런 차이가 보인다. 남자는 대부분 그 여자가 갖고 싶은 것이나 갖고 싶을 만한 것을 선물한다. 후자일 땐 대부분 값비싼 것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자신이 선물하고 싶은 것을 찾는다. 자신의 남자가 자신의 취향대로 변신할 수 있길 기대한다. 정리하자면 여자는 남자에게 입히고 싶은 것을 선물하고, 남자는 여자를 벗길 수 있는 것을 선물한다. 이성에 대한 남녀의 욕망이 대단히 다르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모른다. 그러니 그들에게 바라는 걸 영리하게 어필해보시라. 그게 그의 주머니 사정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만 아니라면 그에게도 대단히 편안한 일일 테니까. 물론 그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전제하에서. 그리고 당신이 아까 앞에서 언급한 그런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전제하에서.
‘최초’와 ‘여성’이라는 단어는 손쉽게 수식된다. 최초의 여류사진가로 꼽히는 이모젠 커닝햄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녀에게 중요한 건 ‘사진가’라는 아이덴티티, 그 자체였다.
이모젠 커닝햄의 이름은 그녀의 아버지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심벌린>의 공주 이모젠으로부터 빌려온 이름이다. 그는 자신의 딸이 남다른 운명을 타고 났다고 믿었다. 그녀가 그 운명에 눈을 뜬 건 시애틀 워싱턴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06년경이었다. 등록금 원조의 명목으로 식물 사진 슬라이드 제작에 참여했던 그녀는 사진에 매료됐다. 훗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예술 위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내가 대단한 예술적 재능을 지녔다고 믿으며 예술학교에 진학시켰다. 하지만 사진가가 되길 원하진 않으셨다.” 왕이었던 아버지 심벌린이 점지해준 고귀한 신분의 남자 대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스스로 선택한 공주 이모젠처럼 이모젠 커닝햄은 아버지의 바람과 다른 길을 걸었다.
이모젠 커닝햄은 70년의 세월을 카메라 뒤에서 살아왔다. 사진의 프레임을 회화의 캔버스처럼 인식한 회화주의적인 인물사진으로 경력을 시작했던 그녀는 점차 사실적인 즉물주의로 나아가며 본격적으로 셔터를 눌러나갔다. 이모젠 커닝햄은 피사체의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응시하고 추구하는 작가였다. 그녀가 바라본 뷰파인더 너머에는 이 세계의 맨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관능적인 클로즈업으로 다양한 식물들을 스펙터클하게 포착하거나 다양한 남녀의 나신을 고요하게 응시한 사진들은 이모젠 커닝햄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모젠 커닝햄이 수많은 식물들을 근접해서 찍었다는 사실은 벌거벗은 인간의 육체를 과감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필름에 담아냈다는 점과 맞닿는다. 그녀의 누드는 섹슈얼리티가 아닌 오리지널리티에 가깝다. 그녀는 인간의 나체에 탐닉하는 대신 인간의 원형, 즉 육체를 드러냄으로써 자연적인 가치를 복원한다. 또한 그녀가 클로즈업한 식물들의 형태는 우리가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바라보던 그 작은 형태 속에 담긴 세밀한 세계를 광대하게 비춘다. 이 말없는 피사체들의 나신이 저마다 하나의 우주로서 완성된 세계임을 인식하게 만든다. 원초적인 형태 자체가 이미 하나의 미학적 완결체임을 깨닫게 만든다.
“사진에 관한 나의 흥미는 미학과 관계가 있고 모든 것엔 작게나마 미적인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모젠 커닝햄과 에드워드 웨스턴, 안셀 아담스, 소냐 노스코비악 등과 함께 참여한 F64 그룹은 극도로 사실적인 형태의 이미지를 추구하는 즉물주의와 사실주의의 미적 가치를 발전시켜나갔다. 대형 카메라 조리개의 최대값을 의미하는 F64 그룹은 정밀 묘사가 가능한 카메라의 기계적인 특성을 이용해서 사진의 새로운 방향을 찾았다. 사진 예술의 심도를 끌어올리는 방식이 새로운 가능성이라 제시했고 이모젠 커닝햄은 그 그룹에 속한 유일한 여류사진가에 머물지 않고 비전을 제시하는 중심으로 자리했다.
화학 전공으로 사진 인화에 정통했던 이모젠 커닝햄은 <여성을 위한 직업으로서의 사진술>이라는 책을 출간하며 여성이 단순히 남성성에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를 위해서 전문적인 경력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초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 그녀는 페미니스트의 영역을 넘어서 자립적인 인간이자 자존적인 작가로서의 삶을 꾸려나갔다. 그리고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식물을 찍었다는 걸 벌써 잊어버렸을 거다. 빛에 노출되는 모든 것을 사진에 담아낸다는 생각으로 최고의 작품을 사람들에게 팔고자 하니까.” 1976년 9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이모젠 커닝햄은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최초의 여류사진가로서가 아닌 사진가 한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으로 셔터를 눌렀던 그녀는 여성을 넘어선 진정한 사진가였다.
The Poetry of Form : Imogen Cunningham
이모젠 커닝햄 展
5월 17일부터 6월 23일까지 청담동 유진갤러리에서 이모젠 커닝햄의 사진전이 열린다. 1993년에 출간된 커닝햄의 도록의 제목을 차용한 이번 전시회는 12점의 빈티지 프린트와 디지털 프린트 20점이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된다.
시어머니는 말한다. ‘남편 군대 보내놓고 노래가 나오나?’ 친아버지도 말한다. ‘한 번 시집갔으면 죽어도 그 집 귀신이다.’ 순이(수애)는 그저 묵묵히 듣는다. 남녀의 관계질서가 군대의 위계질서만큼이나 일방적이던 시대상이 순이를 둘러싼 언어들만으로도 뼈저리게 감지된다. 사랑하지 않는 남녀가 부부라는 이름으로 맺어지는 것이 대수롭지 않던 시절, 순이는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를 즐겨 부르곤 한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 순이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절절한 가사는 순이의 현실과 지극히 동떨어진 낭만이라 기이하다. 베트남으로 향하는 순이의 ‘남편 찾아 삼만리’ <님은 먼곳에>는 순이가 즐겨 부르는 ‘님은 먼 곳에’가 대변하는 그녀의 본심을 찾아가는 로드무비다. 결말부에 다다르는 순간까지 궁극적 야심을 엄폐한 채 서사를 전진시키는 <님은 먼곳에>는 남아선호사상과 가부장제가 사회와 가정의 기저를 완벽하게 억누르던 대한민국 사회로부터 멀리 떨어진 베트남에서 남근 지배적 체제의 졸렬함을 착실하게 구현함으로써 그것의 정곡을 찌른다.
밴드가 꾸려지고 공연이 펼쳐진다는 공통분모덕분에 <님은 먼곳에>는 일찌감치 <라디오 스타>와 <즐거운 인생>의 계보를 잇는 이준익 감독의 음악3부작이란 꼬리표를 달았다. 물론 굳이 그 수식어를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다. 원래 이준익 감독의 영화에서 유희는 행위로써 작동하는 궁극적인 주제의식이나 다를 바가 없으며 <님은 먼곳에>에서도 그 기능성은 중시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 유희적 행위, 즉 연주와 무대의 기능성이 내포하는 방향성을 염두에 둔다면 <님은 먼곳에>는 마땅히 전자들과 다른 지점에 서 있는 작품으로 구분돼야 온당하다. <님은 먼곳에>의 무대는 <라디오 스타>나 <즐거운 인생>이 꿈꾸는 것과 상반된 지점에 놓여있다. 다만 동전의 양면처럼 동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라디오 스타>와 <즐거운 인생>에서 무대가 이루는 정서적 효과란 비루한 현실로부터 남성들을 차단함으로써 그들을 위무하는 속성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으로 현실에 선을 긋는 것일 뿐, 현실은 고스란히 그네들의 삶에 다시 적용된다. <님은 먼곳에>의 무대 역시 남성들을 위한 것이다. 남성성으로 무장된, 혹은 남성성이 강제된 군인 신분의 남자들 앞에서 홍일점의 밴드가 무대에 오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 무대가 남성들을 위한 여성성의 소비에 주력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무대는 지난한 현실에 갇힌 남성들을 도피시키는 환각제로서 기능하기보단 그들을 둘러싼 현실을 환기시키는 각성제로서 작동한다. 도처에 깔린 죽음의 부호들에 짓눌리거나 혹은 때로 그것에 무감각해진 남성들에게 그 무대는 일시적으로 위안을 주지만 동시에 자신들이 얼마나 참혹한 현실로 끌려왔는가라는 대명제를 각성시키는 계기로서 이뤄지는 것이다.
그 무대는 그 자리에 존재하는 남성들 스스로가 채워 넣을 수 없는 유희의 결핍성을 충족시키는 외부자들의 자리다. <라디오 스타>와 <즐거운 인생> 혹은 <왕의 남자>와 <황산벌>에서 발견되는 유희의 작용방향이 그것을 작동하는 주체를 위한 위무적 기능으로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면 <님은 먼곳에>에서 그 기능성은 외부를 향한 것이며 그 주체는 오로지 무대의 홍일점인 순이로부터 발산되는 것이다. <님은 먼곳에>에서 이뤄지는 무대의 유희는 남성들에게 철저히 결핍된 것이며 그들이 이룰 수 없는 궁극의 판타지다. <님은 먼곳에>에서 베트남에 상주하는 한국남성들은 무대의 주체가 될 자격을 상실한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로할 수 있는 여지가 없음을 잘 안다. 그들이 베트남에 도착하는 순간, 그들에겐 스스로를 치유할 수 없는 속죄양이 발생한다. 폭력을 안고 개입한 외부자의 참전행위는 결과적으로 그 대열에 들어선 (한국)남성들에게 죄의식을 부여한다. 스스로를 척박하게 밀어 넣는 환경에 대항하는 유희는 그 땅에서 결코 이뤄질 수 없다. 그들의 목적은 베트콩 대장의 말처럼 ‘돈을 버는 것이기’ 때문이다. 환전의 가치와 양심을 교환한 남성들의 졸렬한 역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남성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죄의식의 수렁에 내몬 셈이다.
결국 남성들이 상실한 유희의 영토를 수복하는 건 여성, 즉 써니로 이름을 바꾸고 무대에 오른 순이다. 이준익 감독의 전작들에서 비루한 남성의 뒷바라지를 하거나 암묵적으로 그들을 보살피던 모성적 배후는 <님은 먼곳에>에 이르러 자신들을 보호할 유희적 마지노선마저 상실한 남성들을 구원하는 여신으로서 유희마저 구현한다. <님은 먼곳에>는 결국 남성이 어떻게 여성으로부터 구원받아왔는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이준익 감독의) 신파적 지침이다. 베트남에 고립되어 스스로에게 도피처가 될 유희적 행위조차 박탈당한 남성들을 위문하는 순이는 매번 써니로써 무대에 올라 여신으로서 강림하고 그들에게 위안을 안긴다. 하지만 그 유희를 발생시키는 홍일점의 기능성은 때로 그 세계의 폭력성을 온몸으로 체감하는 시선으로서 작동하기도 한다. 눈 앞에서 사살당하는 베트콩 소녀 테러리스트를 바라보면서, 위문공연 중인 부대를 습격한 폭격 현장의 목격을 통해서, 그리고 자신들을 생포한 베트콩들이 미군으로부터 사살당하는 상황을 바라보며 순이는 베트남전의 폭력적 상황을 지켜보는 유일한 (대한민국) 여성의 시선으로써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 과정에서 순이는 위문공연을 통해 한국군의 죄의식을 덜어내고, 정만(정진영)을 비롯한 밴드의 일행을 노래로서 죽음의 수렁으로부터 건져낸다.
살육의 전장에 끌려오거나 스스로 걸어 들어간 남성들은 스스로를 폭력으로부터 방어할 유희적 자격을 상실한 채 끝없는 소모적 일상 속에서 죄의식에 노출될 뿐이다. 순이는 왜 베트남에 갔을까, 라는 질문의 답은 그 지점에 있다. 유일하게 베트남에 한국여성으로서 존재하는 순이는 단순히 그 전쟁을 관찰하는 시점으로써 뿐만 아니라 그 전쟁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그 자리를 지킨다. 순이가 상길을 만나러 가는 여정은 순이를 변모시키고 그녀를 남성의 반려자로 간택된 여성에서 탈피시킨다. 동시에 그녀를 이용해 돈벌이에 나서려던 정만은 그 여정 속에서 목표를 상실하고 점차 자신의 비루한 욕망이 순이의 순수한 갈망과 대비됨을 깨달아가기 시작한다. 유희를 수단으로 삼아 재물을 탐하는 남성의 졸렬한 욕망은 유희를 통해 남성들의 죄의식을 한 꺼풀 벗겨내는 여성의 순수한 진심에 감화되어간다. 비루한 남성들은 자신들의 욕망에 심취되어 스스로의 환경을 파괴하고 권리로부터 이탈하지만 결국 스스로 삭막해진 삶의 테두리를 여성의 풍만한 자비로부터 발견하고 자신의 내적 상처를 감내한다.
궁극적으로 <님은 먼곳에>의 엔딩은 그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이자 도발적인 훈계에 가깝다. 그 돼먹지 않은 상황을 잉태한 남성의 같잖은 체제적 무력감을 여성의 작은 손길로 후려치고 그럼으로써 모든 것을 용서하고 구원한다. 순이의 손바닥은 과거로부터 계승된 남성권위에 종속 당한 채 무력하게 이끌린 비루한 남성성에 대한 질타이자 그 시대에 맞서지 못한 연민을 공유한 동병상련의 반려자를 향한 배려의 손길이다. 치열하게 베트콩과 대치한 군인들의 전장에서 순이는 무릎 꿇은 상길을 내려다보며 구세대의 가치관에 함께 맞서 연대적 미래를 구축하자는 무언의 격려로 그를 감싸안고 있다. 결국 유희가 거세된 남성들의 비루한 욕망의 터전에서 여성은 그들이 스스로 내친 유희를 복원하고 종래엔 구원하고 포용한다. 좀처럼 감정의 형태를 쉽게 드러내지 않아 되려 감정의 깊이를 구현하는 수애의 모호한 표정은 남성들의 적나라한 욕망의 터전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골고타 언덕의 예수처럼 성스러운 포용적 깊이를 드러낸다. 결국 모든 것을 착취함으로써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던 오만한 남성의 욕망은 여인의 작은 손바닥 앞에 무릎을 꿇는다. 남성 우위의 세계관에 사로잡혀 자신의 앙상한 욕망을 합리화시키는데 급급했던 남성들은 결국 깊이조차 짐작할 수 없는 유순하지만 강건한 여인의 자비심 앞에 스스로 용서를 빌고 구원을 얻는다. 그건 마치 자궁처럼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처럼 청명하여 고요하고 아름답다. <님은 먼곳에>는 한 여인의 풍요로운 자비심을 통해 전쟁터에 놓인 비루한 남성성의 군상을 대비시킨다. 이준익 감독의 새로운 전환점도 여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