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빅터 매이너드(빌 나이), 나이는 54세, 직업은 청부 살인업자, 커피 한 잔 하겠소?” 소음기 달린 총의 방아쇠를 주저하지 않고 신속하고 정중하게 당기는 남자, 매이너드는 명문 킬러 가문의 후손으로 타겟을 놓친 적 없는 프로이자, 미혼의 싱글남이다. 그리고 어느 날, 한 여자에 대한 청부살인 청탁을 받게 된다. 그 여인의 이름은 로즈(에밀리 블런트), 부동산 업자로 위장한 갱단 두목에게 가짜 렘브란트 자화상을 팔아 거액을 챙겼다. 그녀를 죽일 기회를 엿보며 미행하던 매이너드는 번번이 기회를 놓치고 주시하던 중, 제멋대로인 그녀를 살해한다는 것에 대해서 저항감을 느낀다. 심지어 그녀를 구하려다 죽을 위기에 빠진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작스럽게 등장한 청년 토니(루퍼트 그린트)가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한다.
1993년에 제작된 동명의 프랑스 영화를 리메이크한 <와일드 타겟>은 ‘말괄량이 길들이기’에 나선 ‘레옹’의 사연을 그린 듯한 로맨틱 코미디다. 목표물을 사랑하게 된 킬러, 킬러가 사랑한 말괄량이 그리고 순진한 청년, 이 세 캐릭터가 뒤엉켜 이루는 좌충우돌의 전복적 상황과 끝 모를 사연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자기 생활에 엄격하며 결벽이 있는 중년의 킬러와 밥 먹듯 소매치기를 하고 무책임하게 주의를 벌려놓는 여인 그리고 때때로 모자라 보일 정도로 순진하지만 킬러를 꿈꾸는 청년, 저마다 뚜렷한 성격을 지닌 세 인물이 같은 배를 탄 운명이 되어 벌이는 우여곡절의 항해는 우스꽝스러운 가운데서도 귀엽고 훈훈한 감정을 발화시킨다.
영국 배우의 관록을 대변하는 빌 나이를 비롯해서 스타로 떠오른 신예 에밀리 블런트와 루퍼트 그린트 그리고 <셜록>을 통해서 보다 확실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마틴 프리먼까지, 실력 있는 영국 배우들로 채운 캐릭터들은 영화에 다양한 감정을 채색하고, 영화는 이로써 감상적인 흥미를 확장해낸다. <와일드 타겟>은 비범한 야심작이라기 보단 깜찍한 소품에 가깝다. 로맨틱 코미디가 줄기를 이루는 가운데, 액션과 스릴러의 잔가지가 쏠쏠하게 영화를 장식한다. 엉뚱하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이야기의 예상범위를 곧잘 벗어나곤 하는데 때때로 스토리텔링의 논리를 어긋나게 만드는 우연적인 상황이 발견되긴 하나 그마저도 위트로 연결된다. 그 모든 요소가 깨알 같은 애정을 부르는, 깜찍한 로맨틱 코미디다.
좀처럼 가릴 수 없는 매력으로 존재감을 발산하는 배우들과 달리 어떤 배우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신비로서 마음을 사로잡는다. 에밀리 블런트, 바로 그녀가 그렇다.
매우 어린 나이부터 런던의 남녀공학 사립학교 ‘Ibstock Place School’에서 교육을 받던 소녀가 심각한 말더듬이 증세를 겪게 된 여덟 살부터였다. 교사였던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엄격한 교육보다도 치유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갖은 방도를 동원해도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하지만 12살 무렵, 소녀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한다. 연극을 지도하던 한 교사는 그녀에게 지금까지의 목소리와 다른 악센트를 지닌 캐릭터 연기를 주문한다. 그녀의 불안은 따뜻한 격려로 녹아내렸다. “진심으로 널 믿는단다.” 이는 교묘하고도 영리한 처방이었다. 그 무대에 오른 이후로 소녀의 말더듬이 증상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소녀는 그 무대에서 미래를 만났다. 그 소녀의 이름은 에밀리 블런트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에게 불어온 바람을 그저 지나쳐 보내지 않았다.
사립학교의 삭막한 분위기를 견디기 어려웠던 블런트는 다양한 예술인재를 육성하는 2년제 식스폼 칼리지 ‘Hurtwood House’로 진학한다. 그곳에서 승마와 첼로, 보컬 등 풍부한 끼를 인정받기 시작한 그녀는 2000년 에든버러 축제에서 공연하는 블랙코미디 연극 무대에 발탁된다. 이 무대에서의 연기는 한 유명 에이전트를 사로잡았다. 헬렌 미렌의 에이전트이기도 한 켄 매크레디는 블런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녀의 공식적인 첫 무대를 마련한다. 사실 이는 대단한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말의 경력도 없는 신인을 대배우 주디 덴치의 상대역으로 무대에 올려 보낸다는 건 결코 쉬운 판단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블런트는 데뷔작 <로얄 패밀리>를 통해 이브닝 스탠다드 어워드의 신인상마저 거머쥐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성공적인 데뷔전 이후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한번 더 무대에 올라 연기적 재능을 입증한 그녀 앞에 TV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배우로서 경력의 입지를 마련한 것이다.
다시 한번 원점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하자면, 블런트는 10년이 조금 넘은 경력을 지닌 배우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블런트의 경력을 현시점에서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그녀는 분명 입지전적의 상승세를 타고 온 배우다. 물론 10년 여의 경력이 짧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그녀가 단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에서 앤 해서웨이를 향해 비아냥거리던 얄미운 동료비서 에밀리를 연기하며 갑작스럽게 세간에 얼굴을 알린 할리우드 조연배우의 성공사례는 아니라는 말이다.
블런트의 매력을 보다 제대로 설명하려면 그녀의 영화 진출작 <사랑이 찾아온 여름>(2004)을 통해야만 한다. 영국 아카데미를 비롯한 유수의 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얻은 이 작품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모범적으로 자라났지만 일탈을 즐기는 소녀 탐신 역을 맡은 그녀는 와이드한 스크린의 너비만큼이나 광활한, 자신의 숨겨진 매력을 마음껏 발산한다. 블런트는 이 작품으로 빼어난 첼로 연주와 승마 솜씨를 선보이는 기회를 얻었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건 이 영화가 블런트가 지닌 진정한 매력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도전적인 눈빛에 감춰진 나약한 심성, 대범한 행동성 속에 감춰진 자기보호적 본능, 반항과 굴종의 심리가 부조리하게 얽힌 캐릭터의 이중성을 표현해내는 건 영화의 완성도와 직결된 것이었으며 이를 완벽하게 소화해낸 블런트는 영화가 얻은 찬사를 고스란히 자신의 성과로 가져갔다.
이중성은 블런트의 캐릭터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분명 메릴 스트립과 앤 해서웨이의 영화였다. 그럼에도 블런트의 존재가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건 일단 비중을 막론하고 캐릭터들의 매무새를 잘 어루만진 각본과 연출의 힘일 것이다. 하지만 역시 배우들의 능력을 간과할 수 없다. 메릴 스트립의 압도적인 연기와 앤 해서웨이의 설득력 있는 면모가 이 영화의 구조를 지탱하고 있다면 블런트를 비롯한 조연들은 그 구조를 빛내는 장식과 같다. 악마 같은 편집장의 시중을 견뎌온 베테랑 비서 에밀리는 실수 연발인 신참 비서 앤디를 향해 냉소적인 눈빛을 날리지만 이는 끝내 편집장의 신임을 얻은 신임과의 역전된 처지 속에서 구겨진 자존심이 반영된 질투로 변모한다. 에밀리를 연기한 블런트는 냉혹한 사회 조직의 질서 속에서 자존심을 통해 스스로를 방어하다 끝내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한 여인의 심연을 특유의 눈빛으로 소화해냈다. 특히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에밀리가 남몰래 눈물을 쏟아낼 때 밀려오는 처연함은 좀처럼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의 고충을 연민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었다. 남편과의 반목을 이겨내기 위해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 여인들에게 천착하는 <제인 오스틴 북 클럽>(2007)의 프루디나, 성인이 되어서도 자립하지 못하는 열등감으로 방황하는 <선샤인 클리닝>(2008)의 노라 역시 켜켜이 쌓인 내면의 상처를 숨긴 인물의 내면을 통해 연민을 자아낸다.
대영제국의 황금기를 주도한 빅토리아 여왕의 로맨스에 주목한 <영 빅토리아>(2009)는 블런트의 새로운 면모를 선보인다. 이 작품은 여왕의 치적을 나열하는 대신, 우아한 왕실의 풍경 속에 감금된 여왕의 인간적인 로맨스에 주목한다. 그녀는 권력자로서 고독을 감내해야 하는 운명에 매서운 눈빛으로 맞서기도 하지만 사랑을 갈구하는 심약한 여인의 초상을 수용하며 보다 섬세한 감수성을 연출해낸다. 반대로 얌체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달콤, 살벌한 여인’ 로즈로 등장하는 <와일드 타겟>(2010)은 블런트가 지닌 발랄한 면모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자신이 죽여야 하는 여인에게 사로잡혀 버린 킬러의 딜레마를 우습지만 귀엽게 그려낸 이 영화에서 블런트의 백치미는 ‘귀여운 여인’ 그 이상이다. 가리거나, 드러나지 않거나, 쉽게 가늠할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블런트의 매력은 정의될 수 있으며 그 사이에서 엿보이는 이중성의 면모가 때때로 그녀를 신비스럽게 치장한다.
때때로 <울프맨>(2010)이나 <걸리버 여행기>(2010)와 같이, 장르적 소품과 같은 작품 속에서 소모되는 시행 착오적 경험을 건너기도 하지만 블런트는 이제 영국과 할리우드를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는 세계적인 배우다. 맷 데이먼의 운명적인 뮤즈로 등장하며 시종일관 뛰어다녀야 했던 <컨트롤러>(2011)도 그녀의 매력을 간과하고 있다. 하지만 온몸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현대무용수로서 신비로운 몸놀림을 연출하는 그녀의 면모는 운명에 맞서서 한 여인을 선택한 남자의 심경을 공감시키고도 남을만한 것이다. 심각한 말더듬이였던 탓에 말하는 대신 지켜봐야 했던 소녀였던 블런트를 전세계가 주목하는 배우로 도약하게 만든 것도 어쩌면 그 덕분일 것이다.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 신비로운 매혹의 뮤즈, 에밀리 블런트는 그렇게 자신만의 빛을 드리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