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은 방은진의 세 번째 연출작이다. 그녀는 배우 시절부터 줄곧 영화 현장에 자리했다. 그리고 어느 새 카메라 뒤에 서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 됐다.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내 작품’이라고 말하는 느낌은 다를 것 같다.
배우로서 아무리 연기를 잘했다 해도 영화의 완성도가 기대에 못 미쳐서 관객의 외면을 받게 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반대로 배우가 열심히 했는데 작품이 기대 이하라면 감독으로선 그게 다 죄책감이 된다.
아무래도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니까.
영화를 처음 만들면서 ‘영화는 감독의 것도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관객의 것이더라. 관객의 대중성을 정확히 판단할 순 없으니까 보편화시킬 수 있는 감정을 만드는 건데 결국 관객들의 반응을 통해서만 내 의도가 성공했는지 알겠더라.
98년도 즈음부터 연출을 생각했다던데.
단순한 이유였다. ‘카메라 너머에선 내 연기가 어떻게 보일까? 그 너머에서 영화의 공정을 지켜보면 좀 더 연기를 잘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연기적 욕심의 연장선상이었나 보다.
그것도 그렇지만 영화를 굉장히 사랑해서 그 주변에 머무르고 싶었던 거랄까. 지금이야 여배우들의 활동 연령대가 좀 더 높아졌지만 90년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98년엔 내가 30대 중반이었는데 역할이 많이 좁아지는 게 느껴졌다. TV로 넘어가서 아침드라마라도 해야 할까 싶었지만 내가 워낙 연극 베이스였고, TV 자체를 잘 보지 않아서 TV가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다. 그 당시 IMF가 터지면서 준비 중이던 뮤지컬 제작이 무산됐고, 가열차게 출연을 거절했던 영화들이 상업적으로 대성공하면서 시나리오를 보는 눈에 대한 의심도 생겼다. 그럴 때 과감하게 시점을 바꿔보면 어떨까 싶었다.
진짜 감독이 돼야겠다 마음먹은 건?
2000년쯤? 내가 원래 의상 전공인지라 영화를 배워야겠다 생각해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명계남 선배님이 제작자협회에서 가져온 시나리오를 열심히 각색하기도 했다. 그렇게 감독이 되겠다고 출사표를 던지고 상업영화의 주류 장벽을 넘는데 5년 정도가 걸렸다. 그런데 원래 대부분의 감독들이 데뷔하기까지 곡절이 많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없었나?
그렇게 5년을 보내는 동안 덜컥 마흔이 됐다. 이창동 감독님이 “나는 마흔셋에 데뷔했다”고 하시는데 앞에서 말은 못했지만 ‘당신은 어차피 소설가잖아’라고 생각했다(웃음). 그만 두자니 쪽 팔리기도 하고 도망간다는 게 부끄럽기도 해서 망하더라도 한번 해봐야겠다고 두 눈 질끈 감고 견딘 시간이 5년이었지.
연출데뷔작 <오로라 공주>(2005)는 강렬한 데뷔작이었다. 여성 감독으로서 장르영화로 데뷔했다는 것도 신선했고.
여자 감독이, 여자가 사람 죽이는 영화를 만들었으니까(웃음). 엄정화 씨의 파격적인 변신도 흥미롭게 보였나 보더라.
두 편의 전작은 모두 허구였지만 <집으로 가는 길>은 실화 바탕의 영화다.
스토리텔링의 토대가 무엇이든 거기에 입힐 장르를 명확하게 생각하면 된다. 한 여자의 이야기로 풀 것인가, 가족의 이야기로 풀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가족의 이야기를 선택했고 그 여인의 억울한 옥살이에 방만하게 대응한 대사관을 안타고니스트(antagonist)로 세우면서 영화의 모양새가 보다 확실해졌다. 실화의 서사를 정확히 지키면서도 다양한 내러티브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선택한 내러티브로 무엇을 전달할 것인지 결정하고 실제 인물의 팩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부분들을 구별하고 허구의 살을 붙여나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이 그냥 픽션을 만드는 것보단 좀 더 공정이 많아지는 것 같긴 하더라.
실제 인물에게 허락을 받는 과정도 있었을 텐데.
엄밀하게 따지면 꼭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다. 법률적으로 명시된 권리는 아니니까. 하지만 향후에 당사자들에게 어떤 상황이 닥칠지도 모르니까 허락을 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친구>도 실제 인물에게 허락을 받아서 만들었다. 그러면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어쨌든 다신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영화화를 허락했던 것처럼 나 역시 이래선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영화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근거는?
누구나 심지어 나도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만약 재정적으로 난처한 상황에 놓였을 때 누군가가 400만원을 주겠다며 그런 제안을 하면 솔깃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해서 이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만약 내가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영화에 관심도 없었을 거다.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최대한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했다.
초반부 가족의 설정은 어디까지가 허구였나?
10년 넘은 친구에게 빚보증 사기를 당한 건 실화다. 그 친구가 밥 얻어먹으러 왔다가 후에 자살한 것도 사실이고. 다른 건 실제론 부부가 함께 프랑스로 가려고 했다고 들었다. 영화상에서와 직업도 달랐고.
배우 시절에서 경험해보지 못했던 첫 번째 해외 로케이션이는데?
해외 로케이션 경험이 있는 스태프들의 도움이 컸다. 현지로 미리 넘어가서 스태프들을 뽑고, 여타의 엑스트라들을 스탠바이시키고 장소 섭외하고. 물론 차질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염두에 뒀던 장소 섭외가 불가능해졌거나, 이틀간 촬영하려 했던 신을 현지 배우 사정으로 하루 만에 끝내기도 하고. 촬영 당시 한국은 겨울이었지만 도미니크는 30도가 넘는 곳이었고, 시차도 커서 힘들었지. 아마 배우들이 가장 힘들었을 거다. 여담이지만 여유가 생겨서 도연 씨와 호텔 수영장에서 2시간 정도를 누워있었는데 촬영장에서의 햇빛과 호텔 수영장에서의 햇빛은 정말 다르더라(웃음).
한국과 프랑스, 도미니크 공화국을 오가며 촬영했다.
한국에서 촬영을 시작하고 프랑스로 넘어가서 대사관과 구치소 외관만 스케치한 후 도미니크 공화국에서 교도소 신을 촬영한 뒤 프랑스로 다시 넘어와서 오를리 공항신과 정연의 이송신을 찍고 한국으로 돌아와 해외 세트 분량을 촬영했다. 순차대로 지구 한 바퀴를 돈 셈이다. 그 전에 헌팅을 나갔다 온 것까지 더하면 한 바퀴 반 정도 돌았겠네.
공항에서 시간이 모자라서 계획했던 촬영을 다 못했다던데?
입국 심사장 직원의 시점으로 정연의 뒷모습을 보는 장면이 콘티에 있었는데 카메라를 넘겨서 찍으려는 순간 공항 직원이 막더라. 정해준 시간에서 5분이 남았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절대 비켜주질 않았다. 사실 프랑스 공항에서 촬영하는 게 어려운 편은 아니다. 아예 담당부서까지 있고, 담당직원 자리엔 유명한 감독이나 배우와 함께 찍은 사진도 걸려있다(웃음). 원래 2회차 분량을 찍으려 했는데 돈을 더 준다고 해도 12시간 안에 찍어야 한다고 해서 콘티까지 다 수정했다.
프랑스령인 마르티니크 섬의 교도소를 대체한 나야요 여자 교도소는 도미니크 공화국에 있다. 어떻게 도미니크 공화국까지 알아봤나?
최초에 PD 혼자 헌팅하던 시기가 있었다. 사실 마르티니크에서 찍고 싶었고 실제로 헌팅까지 했지만 비용이 8배나 차이가 났다. 도미니크는 처음 봤을 때 스페인풍의 느낌이라서 반대했는데 실제 교도소에서 찍을 수 있다는 메리트가 있었다. 다만 교도소가 너무 작고 편안해 보여서 촬영감독이 반대하기도 했지만 다른 교도소들을 타진해보니 여자교도소 자체가 남자교도소만큼 험하지 않더라.
전도연을 캐스팅한 건 이 영화에서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전도연 씨는 원래 이 작품의 태동부터 있었던 배우였다. 제작이 지지부진해졌다가 결국 내가 최종 각색을 한 뒤 프로포즈했다. 사실 하고 싶어하는 배우는 많았다. 배우라면 도전하고 싶은 역할이었겠지. 애 엄마라는 점만 빼고(웃음). 하지만 전도연 씨를 제외한 배우는 생각나지 않았다. 영화를 촬영하면서 서로 믿어주길 바래왔던 관계였던 것도 같다.
배우 출신 감독으로서 배우들과 소통하는 방식의 기준이 있을까?
배우가 갖는 고충에 대해선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최대한 배우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만큼의 득실도 있다.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고 싶은데 배우와 합의가 어려우면 크게 고집하진 않는다. 배우가 자유롭게 선택하고 판단할 수 있길 바란다. 물론 그래선 안 되는 배우들도 있다. 배우마다 특성에 맞게 저마다 다른 디렉션을 준다고 생각했는데 항상 맞아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감독으로서 디렉션을 주는 게 가장 어렵다. 그래도 배우를 부른다거나 배우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면서 디렉션을 해본 적이 없다. 항상 배우한테 가서 배우가 앉아있으면 무릎을 꿇고 디렉션을 한다. 그런데 배우들은 선배 배우라고 생각해서인지 나를 어려워하는 것 같다. 그렇게 아껴주는데(웃음)!
최근 제작보고회에서 다시 배우로 나올 계획이 없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 질문은 꼭 하더라. 사실 예전엔 감히 연기를 했다면 지금은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니까 함부로 연기를 다시 하겠다고 말하기가 무섭다. 그렇다고 연기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옆에 있는 배우들에게 실례 같다. 어쨌든 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 인생이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닌데. 중요한 건 연기를 하면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자고 할 사람이 점점 늘어난다는 거다(웃음).
세 편의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여성들이 고난의 주체로 등장한다.
의도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 그냥 그녀들이 거기서 헤쳐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기더라. 고난을 준다기 보단 그 상황을 주도적으로 끌고 나가는 인물이 여성이라면 능동적으로 헤쳐 나오길 바란다.
세 연출작은 표면을 들춰봐야만 내면의 진실이 드러나는 이야기 줄기를 지녔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코드가 있다. 그게 영화에 입체적인 구조를 형성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배우를 오래했던 사람인 만큼 인간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배우로서 캐릭터를 만들 때 단순화시키면 안되고 인간의 가변성을 꼭 봐야 한다. 이 사람이 유쾌한 사람이라 해서 슬픔이 없는 사람이라 단정할 순 없듯이 이면을 생각하면서 입체적인 구조를 연상해왔다. 나는 늘 그것이 캐릭터의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관객이 돈을 내고 볼만한 영화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회 비판적인 시각도 엿보이지만 직접적인 판단을 지양하는 인상이다.
메시지를 위해서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랬다면 다른 일을 했겠지. 메시지는 관객들이 찾아주는 거다. <오로라 공주>에서 누군가가 아이에게 “너희 엄마 어디 있니?”라고 물어봤으면 과연 그 아이가 유괴를 당했을까 싶은 순간이 있다. 아예 메시지가 없는 영화는 아니겠지만 주장하는 대신 감정적으로 버무려서 호소할 수는 있는 거다.
<용의자 X> 이전에 <이화에 월백하고>라는 섹스코미디를 준비했다던데.
13고까지 시나리오를 만지다가 나왔다. 영화사에서 진행시켜주지 않으니까. 지금은 다른 감독이 만지고 있다는 것 같던데.
그게 두 번째 연출작이 됐다면 이 인터뷰 내용도 완전히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럴지도. 조선시대 과부들이 다니는 학교가 있었다는 허구를 모티프로 일종의 금기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는 여자들이 함몰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낀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어쩌면 그 영화가 대리만족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전작이 워낙 센 작품이어서 예쁘고 발랄한 영화를 하고 싶기도 했고. 그런데 결국 이렇게 됐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게 다른가 보지. 사실 액션 영화를 연출하는 게 꿈이다.
왜인가?
소소한 얘기를 싫어하는 편이라서. 개인적으로 일상에 천착하는 일본 영화도 좋아하지 않는다.
감독으로서의 책임감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작품의 흥행도 신경 쓰이나?
당연하다. 나는 그게 다음 작품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영화를 하고자 연출을 시작한 사람인 만큼 대중적으로 인정받는 게 가장 큰 목표다.
세 번째 연출작인만큼 나름 감독으로서 정착했다는 기분이 들진 않나?
영화는 할수록 어렵다, 점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볼수록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노하우를 찾았다고 생각해도 그 방식이 쉽게 운용되지 않는다. 항상 스태프들이 바뀌면서 새로운 색깔을 입히니까. 관객들은 항상 새로운 걸 찾는다. 그만큼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한다. 항상 만만치 않다.
(ELLE KOREA 1월호 NO.254 'ELLE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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