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 to the real way
카메라가 꺼지고, 라이트의 잔영마저 사라지면 배우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아내의 자격>의 윤서래에서 자연인 김희애로 돌아온, 그녀가 지워가는 여운과 다시 맞이한 일상 사이에서.
<아내의 자격>에서 윤서래가 윽박지르는 전남편의 머리를 내려치는 장면에서 속이 뻥 뚫렸어요. 다들 그 얘기하세요.(웃음) 출연 동기가 궁금하네요. 안판석 감독님께서 항상 언젠가 꼭 같이 하자 하셨어요. 안감독님을 신뢰했고 대본도 재미있어서 두려움 없이 시작했죠. 지금까지 이렇게 편안한 현장은 처음이라 하셨더군요. 드라마 특히 미니시리즈 같은 경우, 방영 당일까지 촬영하기도 하고,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듯 촬영하잖아요. 지금까지 병원을 들락거리면서 해야 끝내는 거라 알고 살았는데, 너무 순조로웠어요. 촬영이 밤 12시를 넘긴 게 두세 번 정도? 보통 9시나 10시? 일찍 모이지도 않았고요. 이렇게도 가능한 건지 의구심이 들면서도 경이로움까지 느껴졌어요. 이런 의미였죠. 프리 프로덕션이 철저했나 봐요. 감독님께서 3년 정도 준비하셨대요. 작가님과 충분한 교감도 이뤄졌고, 모든 게 딱 맞춰진 채 작업이 진행됐죠. 대치동 교육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이기도 했어요. 중학생 자녀가 있는 어머니 입장이라 더욱 남다르지 않았나요? 아이들이 정말 불쌍하죠. 저도 정말 이런가 싶을 정도였는데 더한 분들도 있다 하네요. 아무래도 저는 일하는 엄마니까 자식 교육에 올인하는 분들과 수준이 다르겠죠. 그런 엄마도 능력이 돼야 해요. 저 같은 사람은 알아서 잘해주길 바랄 뿐이에요. 부모로서 조바심은 들지 않나요? 공부가 억지로 시켜서 될 일도 아니고, 본인이 해야 머리 속에 들어가는 거죠. 저는 뭐든 한 발 늦어요. 예를 들면 학원 선택도 뒤늦게 아이가 해보고 싶다 할 때 그러자고 하니까요. 한발 먼저 간다고 인생을 먼저 사는 것도 아니고 아이마다 특성도 다른데 뭐가 더 낫다 말할 수 없겠죠. 사실 김희애 씨와 윤서래는 굉장히 닮은 여자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이번 작품이 좀 편안했던 걸 보면 저랑 크게 벗어난 인물은 아니었나 봐요. 주인공이 처한 환경도 비슷하니까요. 결혼해서 아이가 있잖아요. 작품이 끝나면 캐릭터에 대한 여운이 남을 텐데, 지금은 어떤가요? 4개월을 윤서래로 살았고, 집보다도 세트장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으니, 아무래도 남아 있죠. 하다못해 친구랑 3박 4일 여행을 갔다 와도 여행의 잔상이 남잖아요. 그래도 지금은 거의 빠져 나왔어요. 저는 애들도 있는 엄마니까, 일상으로 돌아와야죠. 일상으로 돌아오니 허전하지 않았나요? 배우로서 살다가 현실로 확 들어가면 당황스럽기도 하고 힘들죠. 그래도 허당처럼 붕 떠있지 않고, 정신 없이 일상으로 되돌아가서 빨리 회복될 수 있었어요. 배우로서 높은 기대감에 부응해야 한다는 게 부담되진 않던가요? 저를 그 배역으로서 최고라 생각하고 선택한 건데 배신하지 말아야죠. 좋은 배역을 연기하고, 개런티도 받고, 시청자들도 저를 기대하는데 대충하면 안되잖아요. 한국어로 연기하고, 한국 사람을 위한 연기라면, ‘그 역할만큼은 내가 세계 최고’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해야죠. 그런 각오로 최선을 다하면 진심이 보인다고 믿어요. 물론 지나치면 부담스럽게 보이겠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해야죠. 1993년에 개봉한 <101번째 프로포즈> 이후로 영화에는 출연하지 않았어요. 그러게. 마땅한 기회가 안 생기네요.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좋은 분들께서 좋은 작품으로 불러주신다면 언제나 잘할 수 있죠. 그리고 모든 건 인연이 맞아야죠. 혹시 해보고 싶은 캐릭터는 없나요? 좋은 작품 속에 한 사람의 소품으로 들어가는 걸 좋아해요. 제가 직접 그림을 그리고 싶진 않아요. 배우란 게 뜻대로 된다기 보단 선택을 기다리는 직업이니까요.
배역에 기준을 두고 작품을 선택하는 건 아닌가 보죠? 배우는 어떤 역할을 해도 좋은 작품 속에 들어가 앉으면 빛나요. 빛나는 연기를 하고 싶어도 후진 작품에 들어가면 빛을 잃고 이상하게 보이죠. 저는 배역이 아니라 작품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래도 <내 남자의 여자>나 <마이더스>처럼 기존과 다른 연기를 해냈을 때 나름의 희열이 있었을 거 같아요. 다들 보통 윤서래처럼 자기 주장을 내세우거나 표현하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참으면서 살잖아요. <내 남자의 여자>나 <마이더스> 같은 작품을 하면 대리만족을 느끼죠. 지위도 있고, 돈도 있으니 자기 생각이나 주관대로 할 수 있는 인물을 연기하니까요. 자기는 못하는 얘기를 다른 사람이 하면 대리만족도 느끼고 멋있게 보이잖아요. 원래 그런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어울렸어요. 저도 가끔 어떤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 무심결에 저 사람이 원래 저런가 생각해요. 그러다가 깨달았죠. 남들도 나를 보고 그럴 수 있겠구나. 한때는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어디 있을까 했는데 그게 정상인 거 같아요. 얼마 전에 있었던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행사 MC를 19년 동안 하셨더군요. 특별한 의미라도 두고 계신 건가요? 처음에는 얼떨결에 좋은 프로그램에 동참하자고 했어요. 언제부턴가 사정이 좋지 않은지 어린이날에 하지 않고 아무도 모를 법한 평일 낮에 하더군요. 이제 이러다가 완전히 불씨가 꺼지겠구나, 싶었죠. 누가 MC 맡겠어요. 그래서 그냥 했죠. 그런데 불씨가 살아났는지 재작년부터 어린이날 골든 타임에 하는 거에요. 좋은 행사인데, 다행이죠. 사실 오랫동안 어린이날에 하지 않아서 깜빡해요. 올해도 까먹고 여행 가려다 일주일 전 즈음에 ‘아, 5월 5일!’ 하면서 발권 연기했죠. 여행 좋아하시나 봐요. 가끔 여행도 가야죠. 배우는 스폰지처럼 뭐든 보고 느껴야 해요. 일상에서 현실적으로 사는 것도 배우로서 중요하고요. 연기가 삶의 기준인가요?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늘 하지도 않아요. 일상 속에서 너무 평범하게 살아요. 다만 배우가 직업이니까 문득문득 환기된다고 할까요? 그런 정도이지 빠져있지 않아요. 자기 관리도 철저하실 것 같아요. 일찍 일어나고 일찍 주무실 것만 같아요. 맞아요. 웬만하면 취침 시간 12시 안 넘겨요. 11시 정도면 자고 아침 6시, 7시면 깨요. 모든 만물이 잘 때 같이 자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괜히 피부가 좋으신 게 아니군요. 점점 젊어지는 것 같아요. 에이~, 그럴리가요. 저는 젊었을 때 유달리 멋낼 줄 몰랐어요. 왜 저렇게 꾸미는데 돈 쓰고 낭비하는지, 겉멋이 들었다고 생각했죠. 더군다나 배우인데도요.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 잘 가꾸는 게 기본이구나 깨달았어요. 이런 저런 옷도 입어보고, 자신을 가꾸는 법을 배웠죠. 여자들은요. 꾸미기 나름이에요.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꾸미고 있느냐에 따라서 하늘과 땅 차이죠. 저도 마찬가지고요. 밤샘 촬영도 잦을 텐데. 힘들어요. 12시 전에는 제발 끝나길 바라죠. 다음날에도 영향이 있잖아요. 물론 하다 보면 해요. 새벽에 자면 늦게 일어나면 되잖아요. 그럼 시차만 바꾸면 되니까요. 과거를 돌아보는 편인가요? 돌아보죠. 그리고 다신 돌아가고 싶지 않다 생각하고, 지금 너무 행복하다 생각하고요.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만큼 지금 행복해요. 힘든 과거는 미래의 행복에 대한 저축이라 생각하거든요. 힘든 일이 많았지만 지금 무탈하게 사는 것도 감사하다고 느껴요. 어릴 때부터 일도 많고 말도 많아서 힘든 동네에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저축도 많이 해놓은 것 같다 할까요? 만약 배우가 안됐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장사를 하든, 어느 직종에 있었든, 무지하게 열심히 살았을 거에요. 몸이 탄탄해 보이는데, 운동도 하시나요? 꾸준히 해요. 강하게까진 아니고, 쉬지 않고 멈추지 않는 정도? 2주씩 하지 않을 때도 있고, 미니시리즈 들어가면 몇 달씩 거르기도 하지만, 뭐 어때요? 다시 하면 되죠. 멈추지만 않으면 돼요. 대단히 활동적이신가 봐요. 가만히 있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하루 종일 움직여요. 몸도 좀 쉬어줘야 충전되는데, 배터리가 깜빡이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매일 반복하니까 충전하기 전에 방전돼서 병원에 실려가는 게 다반사였죠. 일년에 한두 번씩 꼭 그랬어요. 이제 정신차리고 조심해요. 어머니가 유명인이라는 걸 아이들이 신경쓴다 느낀 적 있나요? 다행히 시대가 많이 변해서 엄마가 배우라는 걸 부끄럽게 생각하진 않는 거 같아요. 하지만 공짜는 없잖아요. 엄마가 유명하다는 게 아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십자가일 거에요. 가끔 애들이 말해요. “엄마가 유명해서 좋아.” 그럼 말하죠. “애들아, 그건 감사하고 좋은 일인데 그 반대편에는 그것 때문에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 있을 거에요. 그러니 그런 좋은 감정을 기억해뒀다가 힘들 때 환기시켜서 마음을 얼른 회복해야 돼요.” 아이들과 대화는 많이 하세요? 많이 하려 하죠. 하지만 애들이 점점…... 중학생 아들만 둘이니 점점 과묵해질지도 몰라요. 가끔 말문 열어주면 너무 고마워서, “그래, 그래, 그래. 토닥토닥.”(웃음) 늦잠 자는 아이들 깨우는 것도 일이겠네요. 큰 애가 몸이 좀 약한데 종종 늦잠을 자요. 그게 다 밤에 안 자니까 늦잠 자는 거에요. 그래서 “엄마가 두꺼비집 내린다!” 그래요.(웃음) 컴퓨터 보다가, 침대에 누워서도 핸드폰 만지작거리다가 어영부영 늦게 자고 아침에 코피 터지고 그러니까요. 잠이 보약인데. 이게 반복되면 다음날 영향을 미치고, 습관이 되면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깨워야죠. 그런데 사실 마음 약해서 잘 깨우지도 못해요. 엄마들은 애들 자는 모습, 노는 모습, 먹는 모습 볼 때 제일 좋을 걸요. 그런데 또 쟤 저렇게 놀다가 숙제도 못하는 거 아닐까, 한편으로 조바심도 내고, 걱정도 하고. 영락없는 윤서래네요. 그럼요. 리얼이에요. (웃음) 행복해 보여요. 돈이 많은 집, 명예가 높은 집, 그래서 저 사람들은 행복할 거 같지만 문 열어보면 다 똑같다고 믿어요. 어떻게 반짝반짝하는 날만 있겠어요. 저 자신은 완벽하지 않아요. 그게 인생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여야죠. 그게 다 마이너스가 되는 게 아니라 곱하기 2를 줄 수도 있다 생각해요. 그럼에도 다른 사람보다 많은 걸 가졌고, 좋은 기회를 얻어왔으니 당연히 행복해야죠. (ELLE KOREA 6월호 NO.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