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워> 단평

cinemania 2013. 1. 1. 18:42

솔직히 촌스럽다. 웃기고 울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찰나가 그런 정황 속으로 끼어들어가도 될 거라 판단한 연출적 감이 기가 막힌다. 말 그대로 그냥 웃기고 울리는 순간을 나열하면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촌스러움이 <타워>를 붕괴시키는 한방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와 완성도 높은 CG가 이런 단점을 상쇄시킨다. 거대한 주상복합주택의 화재 안전성은 현재에도 여러 차례 제기되고 있는 문제라 CG의 완성도로 인해서 보다 현실적인 공포로 치환된다. 고의적인 악역의 설정도 눈에 빤하지만 우리네 일상에서 마주치는 파렴치한들의 수준이 그만한 것이라 딱히 뭐라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어쨌든 인재에서 비롯된 거대한 재난의 수순은 인정할만하다. 재난의 이미지는 완벽하고 그 안의 끔찍한 그림도 여럿이라 붕괴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결말부까지의 참혹함은 진짜처럼 와 닿는다. 다만 한강 너머에서 바라보이는 여의도의 타워 스카이는 사실 누가 봐도 9.11의 유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같아서 남의 비극을 상업의 도구로 활용한 것 같다는 일말의 거부감도 든다. 그 이미지를 권유할 마음도 없지만 말릴 마음도 없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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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갈라지다 이내 꺼진다. 달아날 곳조차 없을 정도로 지반 전체가 요동을 친다. 캘리포니아주 전체가 마치 기울어진 접시 위의 팬케이크처럼 바다 속으로 잠겨버린다. 화산도 폭발하고, 쓰나미까지 밀려온다. 지구상의 대륙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사람이 발붙이고 설 땅이 없어진다. 말 그대로 전지구적 재앙이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2012>는 재난이란 이름으로 명명되는 이미지들의 합집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재앙 블록버스터의 총아다. 재난이라면 보여줄 만큼 보여준 할리우드가 아예 끝장을 보자는 심산으로 영화를 제작한 것마냥 보일 정도로 막대한 규모를 전시하는, 진정한 블록버스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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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의 숫자가 빼곡히 적힌 종이엔 인류의 운명이 걸려있다. 그 숫자들은 인류에게 찾아올 재앙을 예언하는 암호와 같다. 1959년 메사추세츠의 초등학교에서 개교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묻었던 타임캡슐로부터 50년 만에 발견된 종이엔 지난 50여 년간 전세계에서 발생한 모든 재앙을 예언한 숫자들로 채워져 있다. 문제는 그 외의 숫자들이다. 지난 50년 간 발생했던 재앙을 지목하는 숫자들 외에 다가올 재앙을 가리키는 숫자들이 있다는 것. 다가올 재앙의 정체를 반신반의하는 사이 끔찍한 예감은 실재가 된다. 재앙이 발생하고 사람들이 죽는다. 예언이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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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잉> 단평

cinemania 2009. 4. 11. 10:45

모든 것은 이미 의도된 순서대로 이뤄진다. 모든 것은 의미나 의도가 없는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대비적인 두 주장은 인과관계에 대한 근본적 탐구로 맞닿아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을 근거로 둔다 해도 그 결과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건 매한가지다. <노잉>은 그 결과값에 대한 이야기다. 예상되는 결과를 안다는 것이 무력해지는 순간이란 단지 안다는 것만으로 어떤 변화를 이룰 수 없는 거대한 재앙 앞에 섰을 때에 해당된다. <노잉>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대재앙 앞에 선 인간이 그 무력함을 어떤 방식으로 수긍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음모론에서 출발하는 영화는 종말론으로 종착하며, 지식을 동원하던 추리는 성찰을 도모하는 영험으로 나아간다. 극복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길길이 날뛰기 보단 어떤 방식으로 그 운명을 수긍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전해진다.

 

다소 당황스럽겠지만 <노잉>은 어느 재난 블록버스터와 다른 방식으로 숭고함을 묘사한다. 극복이 아닌 체념으로, 그리고 삶이 아닌 죽음을 각오하는 자들의 운명을 그린다. 유희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비명이 선연한 재난은 <노잉>을 온전히 실존적인 문제제기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결말부에 다다르면 그 모든 것이 비단 스크린 너머의 결과물로서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다. 그 즈음에서 어쩌면 생각해야 한다.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사과 나무 한 그루를 심을 수 있을까? <노잉>은 블록버스터의 탈을 쓴 철학입문서처럼 깊은 사유를 부른다. 물론 압도적인 영상은 끔찍할 정도의 스펙터클을 부여한다. 하지만 그 광경을 마냥 체험하기란 어렵다. 짜릿하기 보단 끔찍하다. 그 너머에서 우린 새로운 세계를 목도한다. 자신의 멸망을 통해서 희망을 얻을 수 있다면 그 희망을 긍정할 수 있나? 역시나 어려운 물음이다. 하지만 이는 분명 오늘날에 있어서 현명한 물음이기도 하다. <노잉>은 보기 드물게 현명한 블록버스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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