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말의 교감과 우정을 그린 <워 호스>를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했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워 호스>는 스필버그의 총아라 할만한 것들로 채워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소년, 교감, 믿음, 우정, 가족, 전쟁 그리고 휴머니즘까지, 스필버그가 믿는 모든 것들이 <워 호스>에 있다. 또한 인간과 인간보다 숭고한 비인간적인 존재와의 교감을 그리고 그들의 주변부에 놓인 인간들의 세계를 목격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더욱 스필버그적이다. <E. T.>나 <A. I.>처럼 외계인과 로봇을 통해서 휴머니즘의 정서를 끌어내는 아이러니는 본래 스필버그의 장기이자 재능이었다. <워 호스>의 주인공이라 해도 좋을 말 조이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다.
<워 호스>는 기적 같은 이야기다.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객기를 부르듯 사온 말 한 필에게 마음을 다하는 소년 알버트, 이 두 존재의 인연이 가난한 집에서 처참한 전장까지도 이어져 결국 원점으로 회귀하는 동안의 서사는 그야말로 기적적이다. 알버트와 조이의 만남과, 이별과, 재회가 서사적인 큰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영화의 시선은 대부분 전장에서 겪는 조이의 고난을 응시한다. <워 호스>는 제목처럼 전장을 전전하는 말 조이에 관한 영화다. 조이는 이 영화에서 시선을 끌어들이는 대상에 가까운데, 그 시선을 통해서 목격하게 되는 건 조이의 주변부를 채운 대부분의 상황들, 즉 전장 속의 인간들이다.
영국군 장교의 말로 프랑스 전장에 나아갔지만 독일군과 프랑스군 사이를 전전하다 끝내 영국군 소속으로 회귀하게 되는 조이의 여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서사다. 영국군과 독일군과 프랑스군 진영을 넘나들게 되는 조이의 여정은 전장에서 서로에게 총을 겨눈 양진영의 실상을 추적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하나의 육체로 엮는 작업처럼 느껴진다. 그 두 작품의 제작자이자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같은 제2차 세계대전 배경의 전쟁물을 연출하며 적극적인 휴머니즘을 피력해온 스필버그는 전선에서 대립하던 두 진영을 오가는 말을 통해서 선악의 구별 대신 그 보편적인 비극성을 스크린에 채운다.
물론 <워 호스>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같이 참혹한 전장의 이미지를 전시하는 작품이 아니다. 이 작품은 전쟁의 비극성을 전시하는 대신 조이가 떠도는 그 전장에 놓인 인간들의 평범한 면모를 드러냄으로써 보편적인 인간애, 즉 너른 휴머니즘의 정경을 아우른다. 제3자의 눈에 포착된 인간성의 폭력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불가피한 상황 속으로 내몰린 인간들의 나약한 군상을 포착하며 애정 어린 시선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전장의 중립지대를 내달리다 철조망에 뒤엉켜 쓰러진 조이를 구출하기 위해서 전선에서 대립하던 두 병사가 우연히 마주치는 광경은 스릴과 유머를 동시에 품고 있는, 최고조의 감동을 전한다. 거대한 관념의 충돌로 빚어진 전쟁이 개개인에게 얼마나 맹목적이며 그만큼 비극적인가를 단명하게 직시하도록 만드는 명장면이라 꼽을 수 있다.
순차적인 감정적인 흐름이 인위적으로 조작되고 있다고 느껴질 만한 기승전결임에도, <워 호스>는 의심을 무장해제시키고, 끝내 받아들이게 만드는 진심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어쩌면 스필버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가장 진심을 담아서 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석양이 지는 풍경 아래서 맞이하는 엔딩은 그야말로 고전적인 아날로그의 향수를 체감하게 만드는, 백미에 가까운 마침표다. 마음을 울리는 것을 넘어서 스크린의 체온을 느끼게 만드는, 마성의 드라마다.
(조이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