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석이 처음 무대에 올랐던 것도 어느덧 10년 전 일이다. 그래서 올해엔 데뷔 10년을 기념하는 무대에 올랐다. 그 무대에서 소년이 됐다. 어색하지 않았다. 조정석은 아직 소년이다. 소년처럼 꿈꾸는 배우다.
2년 전, 조정석은 꼭
다시 무대에 오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난 해 조정석은 팬들에게 약속했다. 내년엔 꼭 무대에서 만나자고. 올해 조정석은 뮤지컬 <블러드 브라더스>로 무대에 올랐다. 팬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사실 이는 본인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조정석은 10년 전 서울 양재동에 있는 서울문화교육회관의 무대에
올랐다. 데뷔 무대였다. <호두까기 인형>이란 뮤지컬이었는데 쥐나 깡통로봇과 같은 비인간 1인 다역을
도맡았다. 객석에 앉아 있는 그 누군가였다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한 역할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조정석에겐 실로 특별한 순간이었다. “감회가 새롭다는 말이
실감났다. 조정석이란 이름을 걸고 데뷔하는 날이었으니 얼마나 떨렸겠어요. 그런데 <블러드 브라더스>
무대에 처음 오를 때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 왔어요. 기분 좋은 설렘? 친정으로 돌아왔다는 걸 실감했죠.” 3년 만에 오른 무대에서 10년 전 자신을 돌아봤다. 그리고 자신의 데뷔 10주년을 기념하는 무대에서 자신의 오늘을 이끌어준 무대를 향한 사명감도 잊지 않았다. “내가 즐길 수 있는 공연을 하고 싶었고, 뮤지컬을 사랑하는 관객들에게
쇼의 요소보단 이야기 자체가 훌륭한 작품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작품이 <블러드 브라더스>였다.”
7살 남짓의 소년으로 무대에 등장해서 청년으로 성장하는 인물을 연기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등에 업고
3년 만에 무대에 처음 올라섰을 때, 그가 느낀 건 떨림보단 설렘이었다. 세포가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무대 체질이라는 걸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조정석이 무대에 다시 오르기까지 3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던 건 그를
기다리는 새로운 무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3년간 조정석은 다섯 편의 영화와 두 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건축학개론>으로 시작된 영화 경력은 개봉을 앞둔 <나의 사랑 나의 신부>까지 포함해 다섯 편으로 늘었다. 처음으로 상투를 틀고 도포를 입은 <관상>과 처음으로 칼을 휘두르며 액션을 했던 <역린>에선 날고 기는 배우들 사이에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영화의
흥망과 무관하게 조정석은 반짝였다. 아마 조정석의 ‘화양연화’가 있다면 지금일지도 모른다. 그의 화양연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신민아와 함께 주연을 맡은 로맨틱 코미디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이명세 감독이 1990년에 발표한 동명 원작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필연적으로 원작과 다른 시대성과 세태를 담고 있지만 원작이 품고 있었던 결혼에
대한 보편적인 관념과 특별한 성찰을 고스란히 끌어안았다. 다양한 에피소드로 구성된 원작의 옴니버스식
설정을 그대로 흡수하며 원작에 경의를 표한다. 특히 조정석에겐 자신이 생각하는 결혼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결혼이란 게 마냥 행복하고 달콤할 거 같지만 막상 해보면 벗어나고
싶거나 구속된다는 기분을 느낄 때도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충돌과 갈등을 뛰어넘는 새로운 행복도
존재할 거라 생각해요.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죽을
때까지 함께 할 동반자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저희 영화가 그런 느낌을 전달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조정석이 꿈꾸는 인연이란 어떤 것일까. “저는 운명론자는
아니에요. 스스로 개척하고 일궈나가야 한다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봐요.
그러니까 어떤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는 걸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 여자와의
관계도 새로운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가고 개척해나간다고 생각하는 쪽이죠.”
어느덧 30대 중반의 나이로 접어든 조정석에게 결혼이란 막연하면서도
가까운 화두다. “결혼 생각은 하지만 특별히 그런 생각에 쫓기면서 살고 싶진 않아요.” 당장 급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함께 어울리며 자라온
친구들은 대부분 결혼의 문턱을 넘었고, 그렇게 아버지가 됐다. 지금도
한 동네에 사는 덕분에 시간이 날 때마다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는 친구들은 애 아빠가 됐어도 그에겐 위안을 주는 존재들이다. “친구들을 만나면 기운을 얻어요. 걔네들도 제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서 용기를 얻는 것 같고요. 동네에서 소주 한잔 하면서 얘기하다 보면 리프레시된대요. 그런 얘길 들으면 저도 기분이 좋죠.” 오랫동안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는 건 어쩌면 조정석 역시 쉽게 변하는 사람이 아니라서일지도 모른다. 그에겐 뚜렷한 주관이
존재한다. “사실 제가 안 좋은 사람은 아닌 거 않아요. 최소한
어리석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할 사람은 아닌 거 같단 말이죠. 주관이
뚜렷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선택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손쉽게 놓을 수 있어요.” 쉽게 포기한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갖기 위해 무리하는 대신 정말 자신이 쥐어야 할 것을 확실하게 선택한다는
말이다.
조정석은 어려서부터 승부욕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어릴 때 태권도를 배웠는데 체육관에서 겨루기를 하다가 다운을 받으면 앞에선 티를 내지 않았지만 집에 와선 분해서 울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다음 심사 땐 걔를 꼭 다운시켰죠.” 그는 배우로서의 승부욕을 감추지 않는다. 다만 자신만을 위한 승부욕을 고집하는 게 아니다. “배우에겐 승부욕이 있어야죠. 다만 승부욕이 드러나는 순간 배우를 그만 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그 욕심이 연기에서도 드러나거든요. 연기를 할 땐 그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나을 버리려고 노력해야죠.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나가듯이 캐릭터를 만들어내야지, 배우로서 돋보이려고 하면 그저 욕심이 드러나는 거죠. 그런 욕심이 드러나면 안되죠.” 그러니까 조정석이 말하는 승부욕이란 배우 개인의 머리를 들고자 하는 욕심이 아니라 완전히 작품에 녹아 들어가겠다는, 프로로서의 마음가짐이다. 자신과의 싸움인 셈이다. “자신감과 자만심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사실 저는 누구보다 자신감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 연기할 수 있었을 테고요. 이런 자신감은 열심히 노력했던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봐요. 물론 정말 잘하는 배우들을 보면 좌절감을 느끼는 순간도 있죠. 그래서 항상 나를 새롭게 전환시킬 수 있는 새로운 호흡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사실 지금 조정석은 그 누구보다 바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블러드 브라더스>의 공연이 끝나면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의 홍보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고, 차기작인 영화 <시간이탈자>의 프리프로덕션에 참여해야 한다. 게다가 곧 부산국제영화제도 시작된다. 3년째 맡고 있는 대만 홍보대사로서 대만에도 다녀와야 한단다. 혹시 워커홀릭일까.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일이라면 놓치고 싶지 않아요. 만약 흥미가 생기지 않는 일이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시나리오만 봤다면 당연히 하지 않았겠죠.” 조정석은 지금 궤도 위에 올랐다. 궤도 위에 올랐으니 궤도 위를 돌아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건축학개론>이 2012년에 개봉됐으니까 제대로 이름을 알린 건 사실 얼마 안됐잖아요. 사람들에게 아직 소년처럼 어린 존재처럼 느껴질 수 있잖아요. 성장기로 보자면 소년의 시기를 지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소년답게 야망을 품어야죠. 배우로서의 야망을 품고 계속 노력해나가는 게 중요할 거 같아요. 그럴수록 저를 아끼는 이들이 많아질 거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조정석은 소년처럼 활짝 웃었다. 2년 전에 보았던 것처럼 단단하고 푸른 웃음이었다.
열정적인 폭발력과 훈훈한 외모로 무대를 누비던 조정석은 지금 대중 앞에 한 발 다가섰다. 나약할 리 없는 집념으로, 보다 섹시하고 강렬하게.
조정석을 만난다고 하자 생각보다 많은 여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에게 뭔가 특별한 매력이 있나? 그가 평소와 달리 수염을 길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풋풋한 청년의 얼굴을 지우는 대신 강렬한 남성의 인상을 그려넣었다. 도발적인 여인 앞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남자의 야심. 그렇게 조정석을 위한 화보 밑그림이 완성됐다. 촬영 당일,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촬영 장소를 찾은 조정석은 마냥 사람 좋아 보이는 시원한 미소의 소유자였다. 잠시 후, 모든 준비가 끝나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장난기 가득하던 청년의 얼굴에 강인한 인상이 들어찼다. 역시 배우는 배우다.
조정석은 뮤지컬계의 스타였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지만 아는 사람만 알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밤하늘의 별처럼, 공연장을 찾지 않은 이들에게 조정석이란 이름은 그저 생소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 반짝이고 있었다. 단지 가리킬 손가락이 필요했을 뿐이다. <건축학개론>의 납뜩이와 <더 킹 투하츠>의 은시경이 가리키는 대로 수많은 이들이 고개를 들어 비로소 별을 봤다. 5:5 가르마를 탄 납뜩이의 정곡을 찌르는 대사에 포복절도했던 관객들은 극장에서 집으로 돌아와 TV를 켰다. 핏이 딱 떨어지는 제복 혹은 수트를 입은 말끔한 외모와 강직한 성격의 훈남 은시경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대부분 처음엔 몰랐다. 그리고 갸우뚱하다 뒤늦게 놀랐다. “인물 자체가 다르니까 “얘가 얘야?”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더라. 어떻게 두 캐릭터를 같이 연기했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보여지는 시기가 비슷하니까 오해하는 분들이 많았다.” 일찌감치 촬영을 마친 첫 영화가 그 뒤에 제작된 첫 번째 공중파 드라마와 맞물린 시기에 개봉했다. 영화와 드라마가 함께 주목받았다. 진정한 ‘골든 타임’이었다. 운이 좋았다.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 하지 않던가.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무대에서 조정석을 눈여겨본 이들이 있었다. 곧 뮤지컬 지망생들의 도전을 그린 드라마 <왓츠업>에 그가 캐스팅됐다. “드라마 촬영 일정상 공연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드라마에 집중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막상 편성이 보류되면서 1년 동안 지난한 촬영 스케줄이 이어졌고, 경력에 구멍이 생겼다. 주변에선 시간을 탕진하고 있다며 우려했지만 조정석은 시간을 투자하며 담담하게 때를 기다렸다. “지금이야말로 영화나 드라마를 해볼 수 있는 시간이라 생각했다. 시간에 쫓기고 싶지 않았다.” 결국 <건축학개론> 오디션으로 기회를 잡았고, 2011년에 방영된 <왓츠업>을 본 이제규 감독은 그를 <더 킹 투하츠>에 불러들였다. 믿음으로 얻은 수익이었다. 더 큰 이윤을 요구할 차례였다.
조정석을 쏘아 올린 신호탄이 된 납뜩이를, 조정석이 납득하긴 어렵지 않았다. 다만 이용주 감독의 주문처럼 관객을 웃길 수 있을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집에서 TV로 보는 건 대수롭지 않지만 커다란 스크린으로 처음 영화를 보는데 내가 나올 때마다 미치겠더라. 중반부터 긴장이 풀렸다. 납뜩이가 제 역할을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했었는데 사람들이 내가 나올 때마다 웃는 거다.” 납뜩이가 없는 <건축학개론>이란 얼마나 심심했을까. “어떡하지, 너?” 같은 납뜩이의 명대사가 조정석의 애드리브였단 사실은 그의 캐스팅이 진정한 신의 한 수였다고 믿게 만든다.
<건축학개론>과 <더 킹 투하츠> 이후로 조정석은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코믹한 시대극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의 촬영을 마쳤다. <방가! 방가!>의 감독 육상효의 새로운 연출작으로 80년대 미군문화원을 점거한 대학생들의 에피소드를 그린 이 코미디물에서 그는 ‘민중가요계의 조용필’로 불리며 기타를 치고 노래했다. 조정석은 일찍이 클래식 기타리스트가 꿈이었다. 하지만 연기자가 되면 어떻겠냐는 교회 전도사의 권유로 한 달간 개인 레슨을 받고 시험을 친 서울예전에 합격했다. 일종의 계시였다. 후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중퇴했지만 그에겐 이미 또렷한 길이 열려 있었다. ‘가족 대부분이 부정적’이었지만 조정석은 ‘자신을 굳건하게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결과를 명예처럼 간직한다. “기본적으로 내가 한 작품들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지난 작품들을 모두 기억한다.”
무대에 데뷔한 2004년부터 2010년 초까지 조정석의 시간에는 빈틈이 없었다. “일복이 많아서 쉴 틈이 없었다. 작품 끝나면 바로 작품하고, 작품 하면서도 다른 작품을 했으니까.” 단 한 번, 연습도 공연도 없었던 2주를 통째로 쉬었던 걸 제외하면 6년간 최소한 이틀에 한 번꼴로 무대에 올랐다. 6개월간 일주일에 8회 공연 그러니까 200회 가깝게 공연된 <스프링 어웨이크닝>에서 모리츠 역으로 단독 캐스팅됐을 때도 6개월간 매일 일정한 시간마다 그 무대에 올라 모리츠가 되어 목숨을 끊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매일 죽는 남자’다. 조정석의 믿음이란 그런 성실함과 집념을 담보로 둔 것일지 모른다. “하고 싶으면 확실히 해야 된다. 칼을 한 번 꺼냈으면 제대로 휘둘러야 되니까.” 공연이 끝나고 자신이 느낀 문제나 새로운 욕심들을 기록해 둔 ‘배우일지’도 그 칼을 제대로 휘두르기 위한 칼집이다. 그는 단단한 욕심으로 스스로를 단련해왔다.
<건축학개론> 이전에도 영화에 출연할 기회는 두 번 정도 있었다. 오디션에 합격했던 <바람피기 좋은 날>과 조승우의 추천으로 캐스팅이 유력했던 <고고 70>이 바로 그것. 하지만 공연 중인 작품들과 스케줄이 맞지 않았다. “공연 같은 경우, 오래전부터 공연장 대관을 준비하고, 출연 계약도 일찍 한다. 그 정도 의리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바람피기 좋은 날>은 <헤드윅> 때문에, <고고 70>은 <이블 데드> 때문에 포기했다. 영화를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당장 해내야 할 일을 팽개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공연을 하면서 겪어온 순간들을 무시할 수 없다.” 그에게 무대란 고향이자 뿌리다. 공연에 입문한 초기 시절 또한 잊을 수 없다. “2005년에 <그리스> 할 때 공연 끝나고 선배들과 술 한잔하다가 택시비가 없으니까 막차 끊기기 전에 뛰쳐나와서 막차를 타거나 막차를 놓치면 찜질발에서 잤다. 생생하게 기억난다.”
“잘 웃고 장난기도 많지만 눈물 흘리는 건 싫어한다.” 강하게 보이고 싶은 게 아니다. 단지 스스로가 약해지는 게 싫을 뿐이다. 12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홀로 지쳐 쓰러져 울면서도 누군가의 앞에선 의연해야 했다. “어차피 앞으로 겪어야 할 경험을 조금 일찍 경험했다. 그래서라도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싫었다.” 일흔이 넘는 어머니를 모시면서 기울어가는 가세를 지지해야 했던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일지 모른다. 2004년, 데뷔작 <호두까기 인형>에서 ‘사람도 아닌 1인 다역’을 연기하는 조정석의 무대를 처음 본 그의 어머니는 눈물을 쏟았다. “처음으로 내 공연을 보셨는데 보고 나서 우시더라. 이렇게 힘들게 일해서 돈을 버는구나, 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는데 당황스러웠다.” 그 뒤로 아들의 출연작을 모두 챙겨본 어머니였다. 가끔 촬영이 없는 날 어머니와 함께 <더 킹 투하츠>를 볼 때면 TV 속 아들의 얼굴에 미소를 띄우시는 어머니를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결혼에 대한 생각이 많은 것도,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인생의 큰 목표’인 것도 어쩌면 그래서다. 하지만 ‘당장 누군가를 미친 듯이 사랑할 자신이 없는’ 지금은 ‘아직 아닌 거 같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다. <우아한 세계>의 감독 한재림이 연출하는 고려시대 사극 <관상>에서 조정석은 송강호, 김혜수, 이정재와 함께 촬영을 준비 중이다. <건축학개론>을 본 한재림 감독은 ‘괜찮은 배우가 있다’며 조정석을 추천했고 <더 킹 투하츠>를 본 송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오디션을 거치지 않고 선택받았다. 그것도 그가 좋아하는 감독과 배우들과 함께. “이제 다시 출격이다. 출격.” 설렘이 가득한 미소로 내뱉는 단단한 각오. 그것 참, 결코 약해질 리 없는 관상 아닌가.
이용주 감독의 두 번째, 사실은 진짜 첫 번째 영화 <건축학개론>이 완공되기까지, 그 긴 기다림에 대하여.
(아래 기사는 지면 상의 분량 사정으로 삭제된 텍스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사랑이 다시 찾아온다는 건 일종의 판타지다.
판타지지.
첫사랑은 언제였나?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아직도 연락한다.
진짜?
학교 다닐 때 모임에서 만난 친구라서 아직도 연말에 망년회할 때 본다.
당신이 좋아했다는 걸 아나?
우린 사귀었으니까.
아~!
난 승민이 같은 경험은 없다. 결국은 사귄다, (웃음)
실제로 건축 일을 했다던데.
대학 졸업 후 4년 정도 설계사무소를 다녔다. <건축학개론>은 오래 전부터 준비한 작품이다. 기획 당시만 해도 영화인의 정체성보다 건축인의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컸다. 사실 건축일 할 때 주택 한 채를 설계해보고 싶었다. 결국 못했지. 주택 프로젝트가 흔치도 않았다.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의 대사처럼 그런 의뢰를 받을 위치도 아니었고.
주택?
여러 건물을 설계했지만 주택이 가장 쉬운 듯 어렵다. 설계사무소도 안 하려고 한다. 공력은 오피스 짓는 것과 비슷한데 돈이 안되니까. 주택은 사실 모든 설계사들의 꿈이다.
‘구성원을 이해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짓고자 하는 건축주가 건축가에게 의뢰하면 건축가가 그 사람의 취향에 맞춰주는 게 건축이다. 그러니 상대방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오피스나 관공서 같은 건물은 여러 사람이 사용하니까 개인의 취향이 반영되면 오히려 반칙이다. 주택에는 개인의 취향만 존재한다. 그러니 그 사람을 정말 잘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서 집주인이 문 열고 들어가자마자 욕실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면 흔하지 않은 방식이라 해도 그렇게 해야 된다. 그에 따른 모델을 제시하는 게 순서다.
<건축학개론> 시나리오는 언제부터 썼나?
2003도였다.
꽤 오래 걸렸다.
너무 장대했다. (웃음) 한 세 번 엎어졌나. 첫 제작사에서는 캐스팅이 안됐다. 다음에는 캐스팅이 됐지만 제작이 안됐고, 또 다른 곳에서도 비슷했고. 사실 <불신지옥> 이후에도 미련이 남아서 시작했다가 한번 더. (웃음) <건축학개론>과 30대를 보냈다. 애초에 미련을 버렸으면 진작 입봉했을 거라 생각도 했다. 주변에서도 많이 말렸다. 괜히 시간 날리지 말라고. 결국 해냈다고 표현하는 건 이상하고, 다시는 이렇게 오래 걸리는 작업은 하지 않겠다는 교훈은 얻었다. 개인적인 집착이 빚어낸 비극인데, 다행히도 영화를 찍어서 마무리됐다. 10년 걸려서 할 일은 아니었다. 순진했으니까 할 수 있었던 거다.
<건축학개론> 시나리오에 흥미를 지닌 사람이 많지 않았나.
많았다. 하지만 엄한 제작자가 흥미를 가지면 시간을 투자해야 하니까 나도 고생한다. 제작 능력도 없으면서 시나리오 좋다고 덤벼드는 사람 많거든. 처음에는 시나리오 좋다 하면 감격했다. (웃음) 그 생활을 3~4년 하니까 순수해질 수가 있나. 누군가 세팅을 해야 가능하다는 걸 그때 깨달았지.
어쨌든 찍었다.
명필름 심재명 대표님께서 우연히 시나리오 보시고 하자 하셨다. 만약 심대표님이 아니었으면 안 했다. 처음에는 시나리오 좋다 하면 감격하고 그랬다. 하지만 제작 능력도 없으면서 시나리오 좋다고 덤벼드는 사람 많거든. 여러 제작사를 전전하면서 투자도 안되고, 캐스팅도 안되고, 그런 꼴을 한두 번 봤어야지. 게다가 <불신지옥>으로 입봉했지만 흥행에서 망한 감독이라 그 이후에도 힘들었다.
<불신지옥>에 대한 평가는 좋았는데.
어리둥절하더라. 그때는 입봉 자체가 목표였다. 영화 감독 되려고 이 판 들어와서 10년을 보냈는데 영화 한편 못 찍고 주저앉느니, 은퇴하더라도 영화 한편은 찍어야지 싶더라. 약간 변질된 느낌이지만 사실 영화판에 그런 케이스가 많다. 멜로는 A급 배우가 붙여줘야 비로소 투자가 되는데, A급 배우는 입봉 감독과 하지 않으려 하고, 캐스팅 트라우마가 생길 지경이었다. 그래서 캐스팅 부담이 덜한 장르로 접근했다.
공포 영화가 감독들의 입봉 수단이란 말도 있지.
옛날에는 그랬지만 요즘은 공포가 워낙 안되니까. 나 역시 쉽게 입봉했다 말할 수 없고. 아는 후배가 한다 그러면 말릴 거다.
장르물에 도전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다른 멜로 영화 각색에 참여한 적도 있었는데 제대로 써본 건 <건축학개론> 하나였다. 작가나 감독이란 타이틀을 달고 멜로 외에 다른 걸 쓸 수 있을지 두렵더라. 그래도 입봉하려면 뭔가 쓰긴 써야 했고, 다른 걸 해보고 싶기도 했다. 멜로는 감정극이니 상황극을 해볼까 생각하면서 시작했다. 두렵기도 했지만 쓰면서도 재미있었고,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불신지옥>이 짓기 위해 지은 집이라면 <건축학개론>은 짓고 싶은 집인 셈이다. 초고와 영화 사이의 차이가 궁금하다.
현재 부분이 많이 달라졌다. 과거는 비슷하다. 10년간 각색하면서 현재를 다루는 게 힘들었다. 시작할 때가 서른 넷이었고, 지금이 마흔 넷이니까, 나이 먹으면서 생각이 많이 달라지더라.
여자 때문에 울어본 적 있나?
물론. 얘가 사귀자는데 왜 싫다는 거지? 속상해서 많이 울었다. (웃음)
연애는 얼마나 했나?
많이 했다. <건축학개론>은 일종의 반성문이다. 대학 시절 소개팅하고 다섯, 여섯 번 봐도 안 맞으면 헤어진다. 그 헤어지는 형식에 대한 비겁함이랄까. 예를 들어서 여자가 연락을 기다리는데, 연락 안 해주면 그대로 페이드 아웃. 굉장히 비겁한 거지. 어릴 때는 더더욱 그렇고. 그에 대한 반성?
90년대 학번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영화였다. 90년대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가득하다.
내가 90학번이다. 사실 영화의 배경인 96년도에는 취업해서 직장 생활하고 있었다. 대학 입학할 때 주변에 컴퓨터 있는 친구도 없었고, 삐삐 같은 것도 없었다. 대학교 2학년 즈음 노래방 생기고, 클럽 생기고 그랬다. 급격하게 디지털화되면서 IT라는 단어도 처음 생기고, 인터넷은 좀 나중인가. 중고등학교 시절보다 뭔가 빠르게 변했다. 90년대를 특별하게 생각한다기 보단 그 시절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많다. 그 시대를 관통한 한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접근한 셈이다.
촌스럽지만 반갑더라.
5년 전만 봐도 촌스러운데 10년이면 엄청나지. 10년 동안 <건축학개론> 준비하면서 어떤 습관이 생겼다. 예를 들어서 지금 드림콘서트 보면 되게 촌스럽다. 최근에 98년에 데뷔한 핑클 멤버들 메이크업이나 헤어스타일 본적 있나? (웃음) 시간이 그렇다. 그래서 정겹기도 하고.
처음 컴퓨터를 가진 건 언제인가?
94년도? 입대하기 전에 교양수업을 듣는데 교수님이 리포트를 워드로 제출하라는 거다. 손으로 쓰면 안 된다나? 학교 앞에 손으로 쓴 리포트를 타자 쳐주고 출력해주는 인쇄소 비슷한 게 있어서 돈 주고 맡겼다. 짜증났지. “이런 걸 왜 해?” 막 이러면서. 그런데 군대 다녀오니까 죄다 컴퓨터로 하더라.
다른 건 몰라도 삐삐는 정말 유물 같더라.
그런 첨단기기가 시간의 척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서 예전에 내 친구가 시티폰 쓸 때는 웃기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웃기잖아. 나는 사실 삐삐를 안 좋아했다. 카페에서 ‘호출하신 분!’ 부르고 그러면 되게 이상해 보였다.
옛날 물건들 가진 거 있나?
알바해서 처음 산 CDP가 아직 있다. 그런 거 모아놓는 편이다. 시절에 대한 추억이기도 하고, 버리긴 아깝다. 지금도 작동되고.
손 탔던 물건 못 버리는 편인가?
그런 건 아닌데 부피만 크지 않으면 기념이 될만한 물건은 두고 본다. 대학 다닐 때 갖고 다니던 학생수첩도 아직 갖고 있다. 그 당시 썼던 전화번호부 보면 내가 예전에 친하게 지낸 사람들도 떠오르고. 자주 보진 않지만 그 정도는 남겨뒀다. 큰 건 너무 짐이고.
영화 준비하면서 자주 꺼내봤겠다.
개봉하고 영화 내리면 정리 좀 할거다. 너무 오랫동안 그 짓을 했더니 지겹다. (웃음) ‘기억의 습작’도 못 듣겠다.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은 원래 좋아하던 곡인가,
좋아했지. 시나리오 쓸 때부터 염두에 뒀던 곡은 아니다. 시나리오를 만지면서 곡도 계속 바뀌다가 나중에 ‘기억의 습작’이 어울려 보였다. 노래도 좋고.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더라. 김동률 씨가 대학 과후배거든. 만나본 적이 없다. VIP시사회에 잠깐 왔다던데 인사도 못했다. 나나 그 친구나 건축도 안 하는데 학과 선후배가 무슨 소용이냐.
조정석의 재수생 연기가 압권이다. 주변에 재수했던 친구는 없었나?
내가 했다.
재수할 때 연애했었나?
난 모범생이었다. (웃음) 연애하면 대학 떨어진다고 믿고, 공부만 했다.
재수까지 해서 연대 건축공학과에 갔다. 원래부터 건축을 좋아했나?
고3때 연대 건축과 썼다가 떨어졌다. 그림 그리기 좋아하고, 성격도 약간 꼼꼼하고,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은 엄마한테 이사 가자고 조르지 않나. 본인이 사는 공간에 불만이 있는 거다. 나도 그랬다. 오래된 중복도식 아파트였는데 내 방은 창이 밖으로 나지 않고 복도로 나있었다. 창에 대한 갈증이 많았지. 어릴 때 어머니한테 그런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시더라. 집을 그저 부가가치,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생각하신 거다. 그런 불만은 그저 사치였다. 나는 공간의 질이 대단히 중요했다. 그래서 건축과에 간 거 같다.
어디 살았나?
정릉 토박이인 승민처럼 38년을 동부 이촌동에서 지내면서 초중고 다 나왔다. 지금은 떠났지만 다시 돌아오고 싶다. 어릴 때 뛰어 놀던 공간들을 보면 기억이 살아난다. 사실 다른 동네에서 사는 게 여전히 이상하다. 어머니는 아직 거기 산다.
동네친구도 많았겠다.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동네에 사는 동창들이 많았지. 지금도 연락하고 지낸다. 얼마 전에도 이촌동에서 모였는데 난 바빠서 못 갔다. 한 친구 전화로 일곱 명이 돌아가면서 인사하더라. (웃음) 12년을 한 동네에서 복작복작하던 친구들이니 유대감도 깊다. 초중고등학교를 같이 졸업하고 같은 대학까지 간 친구도 있으니까. 맨날 만나서 농구하고, 레코드점 가서 LP사고, 서로 판 빌려 듣고, 옛날 기억이 선하다. 이촌동은 아파트가 많은 동네인데, 그 아파트들을 보면 여긴 누구네 집이란 식으로 인식된다. 여전히 거기 사는 친구도 많다.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았고, 건축 회사에서 근무했다는 점에서 승민과 닮았다. 개인적인 경험이 캐릭터에서 반영된 것 같다.
맞다. 게다가 승민이처럼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랑 둘이 살았고, 어머니께서 장사도 오래하셨다. 집에 대한 불만도 그렇고, 승민이에겐 내가 녹아있다.
“정릉이 어떤 왕의 능인지 알아?”라는 영화 속 대사 때문에 찔리더라.
대부분 모를 걸. 왕이 아니라 비의 능이지. 별 의미 없지만.
건축학개론 수업 장면에서 교수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건축의 시작은 자기 동네를 아는 데서 시작된다.” 수업 중 들었던 말인가?
내 생각이다.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처럼 지도에 루트를 그리는 건 대학 다닐 때 실제로 친구들과 스터디에서 했던 일이다. 교통지도를 분해해서 전도만한 지도로 조합했는데 나름 재미있다. 통학로나 친구집으로 가는 노선을 지도에 그려보면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길이 다시 보인다.
되는 면이 있다. 일종의 도면화 작업? 그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공간을 재발견하는 느낌이 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에게 고향은 어디일까. 처음 시나리오 구상할 때, 화두는 이거였다. 고향이라 하기에 서울은 너무 넓은 것 같다.
듣고 보니 그렇다.
승민은 태어나면서 한곳에 정착해 살았기 때문에 새로운 공간에서 독립을 꿈꾸는 친구라면 서연은 이 동네 저 동네 부유하다가 정착을 꿈꾸는 친구다. 둘의 만남은 성장통이다. 결국 그 이후에 승민의 공간이 넓어진다면 서연은 비로소 고향에 정착하는 셈이다.
정릉을 배경으로 선택한 이유는?
서울의 한 동네에 오래 살았다는 설정에 어느 동네가 어울릴까 생각하니 정릉이 그렇더라. 내가 원한 건 명확한 구획이 있는 동네였다. 강남은 구획이 안 된다. 길 하나 건너면 다른 동네가 되고, 서로 모르고 사는 사람도 많고. 예를 들어서 이촌동은 한쪽이 한강, 한쪽이 철길, 이런 식으로 완전히 구획화됐다. 마치 섬 같은 여의도처럼. 강북에는 그런 동네가 많다. 그래서 바운더리에 대한 인식도 강하다. 한 가지 더 좋았던 건 정릉에 버스 종점이 많다는 거다. 도시의 끝처럼 보였다. 영화에서 나오는 710번 버스는 정릉에서 개포동으로 이어지는, 서울 강남북을 가로지르는 황금노선이다. 예전에 비슷한 소재로 단편도 찍었었다.
어떤 내용인가?
내가 타는 버스의 반대 방향 종점은 내게 가장 먼 곳이다. 그 당시 동부 이촌동에 38번 버스가 있었는데 월계동은 우리 집 방향의 반대쪽 종점이었다. 30년을 넘게 한 동네에 살면서 38번 버스를 타고 항상 노선도를 봐왔는데 어느 순간 그 월계동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서른 넘어서 버스 타고 종점까지 혼자 가면서 단편을 찍었다.
공간에 대한 호기심이 남다르다.
사실 서울에서 가보지 못한 동네가 많지 않나? 서울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서울에 관심이 없다. 심지어 어떤 동네에 대해서 비하하기도 하고. 심지어 강북을 두려워하는 강남 사람도 있다. 그런 것들이 내 호기심을 당긴다. 시나리오에 그런 생각이 반영됐다. 과거가 거시적인 공간이라면, 현재는 미시적인 공간. 과거의 인물들은 도시를 돌아다니고 교외까지 나가며 경험을 확장하지만 현재의 인물들은 공간으로 파고 들듯 기억으로 들어간다. 느껴질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제주도 풍경이 너무 멋지더라. 어디인가?
서귀포 위미리. 명필름과 제작 합의한 다음에 제일 먼저 집 알아보러 내려갔다. 열 군데 부동산을 돌면서 찾았다. 영화에 어디가 적합할지 보러 다니고 결정한 다음에는 그에 맞춰서 시나리오 각색했다.
제주도에서 증축된 집은 실제로 지었나?
처음 나온 벽돌집은 진짜 집이고 증축되는 건 세트다. 설계하는데 두 달 반 걸렸다. 그런데 명필름에서 진짜로 공사 들어간다. 다만 영화 속 디자인과 똑같이 지을 수 없어서 세트 디자인을 했던 구준회 소장이 다시 설계하는 중이다. 거의 끝났다더라. 5월에 시작해서 가을에 완공 예정이다.
<살인의 추억> 연출부에서 경험을 쌓았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봉준호 감독과 같은 대학 출신이다. 1년 차이 학번이던데, 원래 아는 사이였나?
전혀 몰랐다.
연대 영화 동아리가 유명하다.
한번 가입했다가 이상해서 나왔다. (웃음) 난 사진부였다. 조선희 사진작가가 동기다. 이번 포스터도 선희가 찍었다. 벌써 22년지기다. 서클 선배 감독도 한 명 더 있네. 임상수 감독님. (웃음)
건축학과 출신이니 만큼 세트 제작에 관심이 많겠다.
당연하지. 나는 미술감독 두 명 달라 그런다.
건축일은 왜 그만 뒀나?
재수까지 해서 건축과를 갔고, 그만 두리라 상상한 적도 없었다. 대학 졸업하고 설계 사무소에 들어갔는데 척박한 현실을 각성했다. 내 성향 탓이겠지만 ‘이렇게 못살겠다’는 생각했지. 건축은 좋은데 건축 현장이 불합리하게 느껴져서 싫었다. 회사 생활 2년 즈음 됐을 때부터 흥미가 떨어지면서 겉돌았다.
그럼 영화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는?
컴퓨터에 관심이 생겨서 사진도 찍고 했으니 혼자 관련 책을 사서 포토샵 공부하고, 일러스트레이터 해보고, 이런 낙으로 살았는데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인 ‘프리미어(Premiere)’를 손댄 게 화근이었다. (웃음) 재미를 붙이다가 결혼을 앞둔 절친한 과동기를 위해서 결혼식에 상영할 영상을 편집해줬다. 어릴 때 사진 스캔 받고, 그걸 동영상으로 편집하면서 음악도 깔고, 나중에는 영상 파일을 CD로 구워서 친구한테 보여주고, 그게 내 인생의 첫 시사였다. (웃음) 그러다가 영화를 찍으면 어떨까 해서 아까 말한 단편을 찍었고, 한겨레 문화센터 등록하고, 그러다가 결국 영화하겠다 마음 먹었지.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 포기하기가 쉬웠나?
사실 건축설계사들은 이직이 심하다. 2년 정도 다니면 자연스레 직장을 옮긴다. 그런데 옮기자마자 IMF가 터져서 선배들 잘리는 거 보니 정나미 떨어지더라. 나는 언제 잘릴까 싶고. 앞으로 그 일을 계속 한다는 게 요원하게 느껴졌다. 봉급도 더럽게 짜니까. (웃음) 솔직히 그래서 영화도 엄두가 안 났지.
그런데 왜 선택했나?
IMF 터지고 연봉 재협상하면서 초봉 수준으로 월급이 깎여버렸다. 뭔 차이인가 싶더라. 처음에는 방송 PD하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IMF 터지니 PD도 안 뽑더라. 그런데 MBC에서 기습적으로 공고를 냈다. 그때 사무실이 여의도에 있어서 점심 시간에 방송국까지 걸어가 지원서류를 제출하고 일요일에 여의도 중학교에서 시험을 봤다. 떨어졌다. 그것도 언론고시라서 1년은 준비해야 된다더라. 해볼까 했는데 그 해가 응시 자격 나이 제한에 걸리지 않는 마지막 해더라. 역시 불합리하다. (웃음) 그냥 영화하자 했고,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살인의 추억> 후에도 영화를 계속 해야 되는지 고민했다. 봉 감독님이 할 거면 제대로 하라고 하셔서. (웃음)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삶도 생각했다던데.
입봉을 못하니까. (웃음) 다들 내가 쓴 시나리오에 관심을 갖고 사겠다는 사람도 있는데, 연출하고 싶다 하면 다른 말을 한다.
어쨌든 오랫동안 염원하던 작업을 이뤘다. 후련한 기분도 들겠다.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 장대한 시간이었다. (웃음) 결국 해냈다고 표현하는 건 이상하고, 확실한 건 이제 다시는 이렇게 오래 걸리는 작업은 하지 않겠다는 교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개인적인 집착이 빚어낸 비극인데, 다행히도 영화를 찍어서 마무리됐다. 아무리 좋아하는 이야기라 해도 10년 걸려서 할 일은 아니었다. 상처도 많았고, 창피했지. 순진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다.
“10년 뒤에 뭘 하고 있을까?”라는 대사가 생각난다. 10년 전에 뭐하고 있었나?
10년 전이면 <살인의 추억> 연출부 시절이다.
그때 10년 후를 생각해봤나?
감독이 되면 좋겠다 생각했다. 아마 그때 2009년도에 겨우 입봉할 걸 알았다면 그만 뒀을 거다. (웃음) 2005년 즈음에는 입봉하리라 생각해서 준비했다가 이 꼴 났다. (웃음)
정말 치가 떨렸나 보다.
나이 서른 넘어서 어머니 집에 얹혀 살며 한 달에 모든 생활을 50만원으로 할 때였으니까. 그건 사는 게 아니다, 친구도 못 만나고, 외출도 못하고, 어머니 걱정도 심해지고, 간혹 만나는 친구들도 술 사주면서 걱정 하고.
어머니 반대도 있었을 텐데.
2년만 해보겠다고 약속해놓고 어겼지. 좀 더 있으면 감독 될 거 같아, 막 이러면서 속이고. 어느 순간 어머니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인정하신 것 같다. 끝까지 마음에 안 들어 하셨다. 입봉하고 나서 비로소 인정하셨지.
그때 반응은 어땠나?
좋아하셨지. 청룡영화제 각본상 받아서 TV 나오니 인정하시더라. 그 전까지는 안 좋아하셨다.
부모님들은 상 받으면 좋아하지.
TV 나오니까. (웃음)
10년 뒤를 생각하나?
한다. 나는 내일, 이번 주, 1년 뒤 어떻게 살지 습관적으로 계획하는 편이다.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더라. 나중에 알았다. 막연하게 10년 뒤도 생각하고 있다. 일종의 바람도 섞여 있고. 건축설계사 하면서 싫었던 건 1년 뒤, 3년 뒤, 10년 뒤 자리가 정해진 느낌이었다. 사실 영화일은 1년 뒤를 예측할 수 없다. 다른 직업도 그렇겠지만 특히 그렇다. 그러니 동기부여가 더욱 필요한 거다. 그래서 힘들지만 그래서 매력 있다.
예상불가능하기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으니 두렵지만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회사를 다니면 안정적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제로겠지. 안정적이란 말은 결국 딱 그 정도라는 말이잖아. 어쩌면 답답한 일이지.
건축설계를 하는 승민(엄태웅) 앞에 대학교 1학년 시절 알고 지냈던 동창 서연(한가인)이 찾아온다. 불쑥 나타난 그녀는 대뜸 제주도에 집 한 채를 지어달란다. 난색을 표하던 승민은 결국 이를 수락하게 되고 두 사람이 재회한 현재로 인해서 과거의 승민(이제훈)과 서연(수지)이 그들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삐삐로 소식을 전하고, 무스로 머리를 넘기고, 펜티엄 1기가 메모리가 대단하게 느껴지던, 90년대에 그들은 만났었다.
<건축학개론>은 그 누구라도 결코 지나쳐버릴 수 없었던 첫사랑이라는 아릿한 기억에 관한 소묘다. 무엇보다도 첫사랑을 환기시키는 로맨스물의 제목이 <건축학개론>이라니, 생경하지만 그만큼 강렬하다. 건축과 로맨스의 상관관계는 대학 새내기 남녀의 인연이 건축학과의 건축학개론 수업을 함께 듣게 되면서 설계된 데서 비롯된다. 태어나서 줄곧 서울에서 살았던 승민과 대학 진학으로 인해서 제주도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서연은 서울 전도에서 한 점을 차지하는 정릉에서 만나 인연으로 거듭난다. 완벽하게 남이었던 두 남녀는 ‘건축학개론’의 수업을 함께 듣고, ‘정릉’에서 사는 덕분에 남이 아닌 관계로 발전한다.
<건축학개론>은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첫사랑이라는 한 순간에 대한 송가다. 그 배경이 되는 90년대의 풍경은 그 기억을 보다 아련하게 수식하는 미장센이다. 21세기에 이르러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들, 존재하나 점점 밀려나가는 것들 혹은 꾸준히 외면 받듯 주변에 자리하는 것들. “죽은 걸 되살려주는 거잖아.” 영화 속 대사처럼 <건축학개론>이 환기하는 건 우리가 지나온 혹은 지나쳐버린 어느 시절에 대한 기억이다. 영화 곳곳에 깨알 같이 박혀있는, 장치된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자리하며 그 시절의 공기를 채운 그 이미지들은 결국 그 시절의 한 기억을 완벽하게 재생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영화에 복무한다. 단지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지키고 재현함으로써 기억의 환기를 부추긴다는 것.
첫사랑이라는 필연적 비극을 그린 이 영화는 감정을 건축적으로 착실히 쌓아나간다. 호기심에서 시작되어 설렘으로 번지고, 애절하다가 문득 두려워져 끝내 피지 못하는 첫사랑의 기억. 그리고 10여 년을 훌쩍 넘긴 남녀가 각자의 사연을 안고 서로에 대한 인연을 증축해나가며 그 시절에 완성하지 못했던 감정의 도면을 다시 한번 따라가는 순간의 아릿함과 그 끝에서 마주할 아련함.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이라는 인류 공통분모의 기억을 통해서 노스탤지어의 공감을 한껏 자극하는 영화다. 다만 감상적이거나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적인 설계와 이성적인 시공으로 완성한 현재의 멜로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과연 그럴까. 하지만 확실히 “우리 모두는 분명 누군가를 첫사랑했다.” 사랑 받을 수 없었던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사랑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누구나 그렇게 ‘기억의 습작’을 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습작을 넘겨 새로운 기억을 그려낸다. 그렇게 쌓이고 쌓여 인생이 되고 삶이 된다. 우린 수많은 기억의 습작을 지나오고 지나치며 현실을 살고 있다. 그러니 누구라도 그 시절이 그리울 수 밖에. 현실은 언제나 완벽을 바라기에 치열하고, 과거는 그만큼 관대하게 기억된다. 그 그리움은 결국 현실에서 취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영원히 머문 시절로 보존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는 이별한 과거를 여운처럼 돌아보며 현실을 버틴다. <건축학개론>은 그 애잔한 노스탤지어를 향한 성숙한 인사다. 사랑할 수 없었던 과거를 되새기며 현실을 지키고자 사랑한다. 그 시절의 사랑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영화는 그 아련한 기억을 통해서 현실을 되짚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