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도 좋구나. 처음으로 나가는 해외가, 그것도 출장이 피렌체라니.” 한 선배가 말했다. 그렇다. 처음이었다. 하지만 20대 끝자락에 찾아온 생애 첫 출국에 대한 심정이란 1%의 설렘과 99%의 두려움에 가까웠다. 처음으로 떠나는 외국에서 혈혈단신 파리를 경유한 뒤, 로마에서 피렌체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막연했고, 불안했다. 파리 공항에서 로마행 비행기를 경유하기 위해 긴 출입 통로를 홀로 걷다가 문득 뒤돌아봤을 때 아무도 없었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마치 미아가 된 것 같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 하지만 경유를 위해 공항에 홀로 머무르는 동안 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이제 더 이상 나를 알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나쁘지 않았다. 물론 로마 공항에 당도해서 피렌체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표를 끊고, 지하철을 타고, 비로소 기차를 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어찌어찌 헤매다가도 물어물어 방향을 찾았고 그럭저럭 당도했다. 비로소 피렌체에 두 발을 디딘 건 새벽 2시경.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었는데 수중에 담배가 없기에 옆에 서서 담배를 피우던 한 외국인에게 담배 한 대를 빌릴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브라질산인데 조금 독하다는 충고와 함께 흔쾌히 담배 한 대를 건넸고, 잠깐 대화를 나눴다. 이국에 와있음을 실감했다. 그러곤 택시를 잡아타고 피렌체의 피에솔레 언덕 위에 자리한 호텔에 도착해서 피로를 씻어내고 몸을 뉘고 보니 장장 20시간에 달하는 여정이 꿈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날밤 꿈을 꾸진 않았나 보다.
다음날 호텔 관계자와의 미팅과 취재로 하루를 꼬박 보내고, 드디어 피렌체에서 고대하던 단 하루의 자유가 주어졌다. 내가 묵었던 호텔은 지대가 높은 언덕에 있는 덕분에 창밖으로 피렌체 시내가 내다보였는데 멀리서 빼꼼히 머리를 내민 듯한 두오모(대성당)의 돔이 보였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냉정과 열정 사이>에 나왔던 두오모의 돔이었다. 흔히 피렌체의 두오모라고 일컫는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말이다. 피렌체에 발을 디딘 이상, 저 두오모에 올라야만 했다. 서른 살 생일이 되면 돔에서 만나자고 약속할 연인이 함께 있거나 말거나 피렌체까지 왔으니 두오모의 돔에 올라가봤다고 자랑할 수 있는 기억 하나쯤은 안고 가야 할 것 같아서 꼭 오르리라 다짐했다. 물론 다짐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피에솔레 언덕에서 피렌체 시내는 멀지 않았다. 지도 한 장 들고 나서서 피렌체의 골목을 누비며 지도를 훑어보고 마냥 두리번거리는 관광객의 기운을 한껏 뽐내면서 피렌체 두오모를 향해 스텝을 밟았다. 두오모를 향해 다가가며 골목을 지날 때마다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도시의 전통적인 정취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는 것 같았다. 도시를 대변하는 특별한 랜드마크로 가는 길이 아니라 내가 그 길 위에서 보는 것들이 하나하나 이 도시의 결을 이루는 역사이고, 서사였다. 길을 잘못 들어서도 괜찮았다. 길을 지날 때마다 저마다 층위를 이루는 지층을 찬찬히 올려다보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두오모에 당도했다. 일단 성당의 스케일과 디테일에 감탄하는 절차를 밟은 뒤, 두오모 돔에 오르기 위해 입장했다. 두오모 돔에 오르려면 463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고 했다. 당연히 수를 세면서 오르진 않았다. 일단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불이 나는 허벅지를 신경 쓰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두오모 돔에 올랐는데! 응? 도대체 왜 저 건너편에 돔이 보이지?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오른 곳은 두오모 돔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조토의 종루’라는 또 다른 전망대였던 것. 입구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오른 것이 화근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두오모 돔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아마 두오모 돔에 올랐다 해도 다시 이곳에 올랐을 것 같은 예감도 들었다. 두오모 돔과 함께 내려다보는 피렌체 전경은 지금도 내 인생에서 이만한 그림을 본 적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장관이었으니까. 무엇보다 낮은 건물의 붉은 지붕들이 이어지면서 멀리 보이는 산과 하늘의 경계가 살아 있는 유화나 다름없었다.
조토의 종루에서 내려와 잠시 고민했다. 두오모 돔에 올라갈 것인가. 그래도 피렌체까지 왔으니 올라가야겠다 결심했다. 그리고 올라가면서 알았다. 두오모 돔에 오르는 것이 463개의 계단을 꾹꾹 눌러 밟으며 어떤 자랑거리를 만드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음을. 두오모 돔 천장엔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인 조르조 바사리와 그의 제자들이 그린 거대한 프레스코화인 <최후의 심판>이 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서 점차 가까워지는 천장화를 볼 수 있는데 대단한 위엄이 느껴지는 이곳에 오르길 잘했다는 생각을 금치 못했다. 두오모 돔에 올라 볼 수 있는 풍경은 다시 한번 반가웠다. 조토의 종루에서 걸어 내려오는 계단마다 이 풍경을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아쉬움이 터벅터벅 쌓였기 때문에. 그래서일까. 서른 살 생일에 이곳에서 다시 보자고 속삭일 연인이 없어도 상관 없었다. 20대 마지막에 찾아온, 처음으로 발 디딘 이국의 풍경이 이 정도라니 내 삶이 그리 나쁜 건 아닌가 보다, 잠시 생각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두오모에 오를 수 있다면 그때의 내 삶은 또 얼마나 좋아졌을까? 두오모에서 내려오니 잠시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지금도 피렌체의 두오모를 생각하면 꿈을 꾸는 것 같다. 아직도 가끔씩 그 꿈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