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랑한 이랑
TALK SONG
말을 하다 보니 노래를 하게 됐다는 이랑은 그림도 그리고, 연출도 하고, 글도 쓴다. 낭랑한 목소리에 담긴 범상치 않은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오다가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부서졌다. 유쾌했다.
내일 해외에 나간다면서요?
일본에 가요. 앨범이 나오거든요. 1집 <욘욘슨>과 2집 <신의 놀이>가 한꺼번에 9월에 발매돼서 현지 레이블과 디자인 상의하고, 인터뷰도 해요. 여행도 갈 거고요.
<신의 놀이>는 4년만의 신보에요. 초판 1천장이 다 매진됐다던데.
아마 지금 인쇄 중일 거예요.
그런데 CD 대신 다운로드 코드번호만 있더군요.
앨범을 제작한 음반사 ‘소모임’ 대표가 밴드도 하는데 1집 앨범을 내면서 패키지에 공을 많이 들였대요. 그런데 막상 아무도 CD를 안 듣더란 거에요. 그래서 제 신보는 그냥 CD 없이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대요.
음원서비스를 하지 않은 이유가 있나요.
열심히 만든 책이 너무 예쁘니 다들 책을 사서 만져봤으면 하는 마음에 미뤘죠. 음원을 다운 받으면 음반을 사지 않을 테니까 책 자체가 있는지도 모를 거라서.
아무래도 음반보다는 책을 한 권 산 기분이에요.
1집처럼 손 글씨로 가사집을 써볼까 했는데 그러기엔 가사가 길었어요. 그래서 타이핑하고 보니까 글을 더 붙이고 싶어졌고, 가사에 어울리는 글을 구성하다 보니 책처럼 만들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작가인 데이비드 실즈의 양장본 원서와 커트 보네거트의 얇은 에세이를 제시하면서 이런 걸 만들고 싶다고 하니 대표님도 동의하면서 그렇게 결정됐어요.
작곡가들은 악상을 떠올린다고 하는데, 악곡보단 가사가 더욱 중요하게 느껴지는 군요.
원래 악상 같은 걸 떠올릴 수 없는 사람이라(웃음). 항상 일기를 고르는 걸로 노래 만들기를 시작해요. 노래를 처음 부를 땐 음이 거의 없어요. 혼잣말하면서 기타를 치는 식이죠.
구어체 가사의 말맛이 느껴져서 장기하의 여자 버전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반야심경 같기도 하고(웃음). 말 자체에 있는 음악적 리듬이 중요하죠. 노래를 한다기 보단 말을 좀 더 크게 하는 느낌이랄까요? 창법 자체를 생각해본 적도 없고.
처음 음반을 낸 계기가 궁금하네요.
집에서 만든 데모 음원을 싸이월드에 올렸더니 제 친구가 소모임 음반사 대표님께 소개시켜줘서 미팅을 했는데 제 음반을 내고 싶어 했어요. 사실 소속 뮤지션 하나 없는 곳이라 음반을 낼 수 있다는 근거가 없었는데 보는 눈이 있더라고요. 노래에 재미있는 구석이 있지만 이건 웃긴 사람의 노래가 아니라 슬픈 사람의 노래라고. 사실 제가 슬플 때만 음악을 만들었거든요.
<신의 놀이>에선 신과 죽음이란 단어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거 같아요. 마치 자신을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이 느껴지기도 하고.
재수 없게 들릴 수도 있는데 저는 남들 위에 서서 모든 것을 조종하고 싶나 봐요. 심지어 제 자신도 관전하듯 보거든요. 스스로를 이랑이라는 캐릭터로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렇게 이랑이란 캐릭터를 관찰하는 동시에 이랑이란 캐릭터로서 고민도 하고.
1번 트랙인 ‘신의 놀이’에는 ‘어쩌면 난 영화를 만드는 일로 신의 놀이를 하려는 지도 몰라’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감독으로서의 철학이 느껴졌어요.
한예종에서 이창동 감독님의 연출 수업을 들었는데 카메라 앞에서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게 좋은 연출이라며, 그게 신의 연출이라 하셨어요. 결국 감독은 자기 세계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조종해 자연스럽게 조작하는 역할이잖아요. 남보다 위에 올라서 있는 느낌인데 저는 이런 느낌을 즐기는 거 같아요. 이번에 웹드라마 <게임회사 여직원들>을 4회 정도 연출하면서 ‘신브레이크다운’이란 걸 처음 해봤는데 파트별로 20여명의 사람들이 제가 쓴 대본을 두고 둘러앉아 질문하는 거에요. 소품의 형태나 음악 등 준비할 것들을 물어보고 제가 대답만 하면 다들 알아서 준비해요. 배우들은 연기하고, 소품팀은 소품 챙기고, 연출부는 연출과정을 일일이 짚어주고, 촬영팀은 콘티까지 다 짜서 촬영하고, 끝나면 편집기사님이 편집하고, 믹싱기사님이 믹싱하고, 솔직히 제가 할 일은 별로 없어요. 그런데 제 작품으로 나가잖아요. 결국 이 모든 걸 제가 컨트롤하는 셈이니 신기한 위치인 거죠.
웹드라마 <출출한 여자>의 에피소드 연출을 제안했던 윤성호 감독과의 인연으로 <게임회사 여직원들> 연출에도 참여했다던데 윤성호 감독은 어떻게 알게 됐나요?
한예종에 와서 수업을 했어요. 친해질 기회가 생겼죠. 짧은 콩트를 찍는데 도와달라 그래서 대본 외우고 연기한 적도 있었어요. 그러다 제 졸업작품이 재미있다고 칭찬하더니 <출출한 여자>를 같이 하자고 해서 참여했고, <게임회사 여직원들>도 하게 됐죠.
아무래도 주변에서 뭔가를 제안하는 사람이 많은 거 같아요.
사람들에게 많은 걸 보여주고 말해주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지금 이걸 이렇게 할 거야’란 식으로. 조금 더 발전되면 또 얘기하고. 노래 만들기 시작했을 때도 매일 학교 식당 앞에서 불렀어요. 당시에 학교 작업실에서 살 때였는데 방에서 부르면 심심하니까 앰프 갖고 나가서 부른 건데 애들도 좋아해 주니까. 그렇게 공짜로 많이 풀었어요.
7번 트랙인 ‘평범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노래처럼 느껴지는데 그 위로의 대상엔 본인도 들어갈까요?
첫 앨범을 내고 인터뷰를 한 덕분에 몇몇 매체나 브랜드랑 친분이 생기면서 공짜 선물을 받거나 행사에 초대받는 경험을 했는데 그게 무서웠어요. 쉴새 없이 선물을 받고, 매일 같이 행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멋지고 아름다운 것을 무감각하게 받고, 쓰고, 자랑하면서 그게 이상하다는 걸 잊어버릴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노숙자도 무섭거든요. 표정이 없잖아요. 질문하는 걸 까먹은 사람 같아요. 자기 모습을 잊어버리고, 수치심조차 없어진 사람. 결국 그런 두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남들과의 차이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가 위로하고 싶은 평범한 사람들인 거죠. ‘왜 나는 저렇게 될 수 없지?’라며 누군가와의 차이를 생각한다는 건 최소한 자기 위치에 대한 생각이란 걸 하고 사는 사람이니까,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아서 스스로를 연민하는 그런 마음을 위로하고 싶은 거에요.
자신을 잃어버릴까 봐 두렵나 봐요.
맞아요. 한번은 파티에 초대됐는데 TV에 나오는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게 무섭더라고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이건 언젠가 써먹을 수 있는 장면이라며 스스로를 관전하고 있고(웃음). 어쨌든 그런 걸 즐기다가 그런 기회가 사라졌을 때의 우울감을 예측하니까 정신차리는 거죠. 본연의 모습도 아닌데 본래 갖고 있던 아름다움마저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게 싫어요. 결국 그런 상실감 때문에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처지를 비난하다 자살할 수도 있잖아요.
유명세가 오히려 결핍이 된다면 아이러니하겠네요.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제 친구한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어요. ‘좋아요’ 같은 거 더 받으려고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지금 할만한 일을 하라고. 저는 유명해지고 싶어한다는 그런 마음이 제일 무섭게 느껴져요. 아마 유명한 상태가 되면 유명하다는 느낌조차 무감각해질 거에요. 돌이켜보면 지금이 제일 유명한 때일 수 있잖아요. 가장 유명한 때인데 정작 유명한 걸 즐길 수 없는 거죠.
그런데 ‘평범한 사람’에서 등장하는 멋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조금 유치할 수 있는데 제가 모델 김원중을 좋아하거든요. 김원중 사진을 보다가 김원중은 거울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생각했어요. 아침에 일어나도 멋있을 거 같고, 자기 전에도 멋있을 거 같고(웃음).
8번 트랙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제목 자체가 비참하면서도 결연하게 들려요. 경험이 반영된 노래일까요?
경험에서 가져온 것도 있죠. 제가 겪은 미움이라던지, 가족이나 죽음에 대한 생각 등 제 경험을 확장한 부분들이죠. 그걸 노래로 하기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져서 생기는 사건은 제대로 설명해도 왜곡되고 가십으로 소비되지만 쓰고 부르는 건 이야기로 불리니까 나한테 생긴 일을 일일이 알진 못해도 그런 정서를 노래함으로써 공유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러니 일일이 설명하고 이해 받는 것보다도 노래를 해서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좋은 일 같아요.
음악적인 평가에 대해서 신경 쓰이진 않나요?
보긴 하지만 솔직히 신경 쓰이진 않아요. 저는 결과보단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는 편이기도 하고요. 책도, 만화도, 대본도 막 끝냈을 때 혼자 기뻐서 울고 난리가 나요.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이 된 거 같아서 셀카도 찍고(웃음). 그런 과정이 결과물을 보는 것보다 재미있어요. 그래서 완성된 곡을 다시 부르는 것도 솔직히 재미가 없어요. 오늘 <게임회사 여직원들>도 마지막화까지 공개됐는데 역시나 그러려니 하게 되더라고요. 아무래도 결과물에 대한 평가도 그래서 신경 쓰이진 않나 봐요. 그나마 <신의 놀이>는 책을 읽으면 노래만 듣는 것보단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도 음악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런 평가가 새로운 동기부여가 되진 않나요?
2년 전부터 지인들이 일하는 모습을 찍어왔는데 일본에 사는 친구 어머니가 베틀 짜는 모습도 찍었어요. 그리고 며칠 전 뮤직비디오 촬영에서 베틀을 짜는 모습을 마임으로 보여달라고 주문했어요. 다양한 직업군의 행위를 촬영한 것을 바탕으로 무용을 만들었죠. 그래서 베틀을 짜던 친구 어머니에게 그 뮤직비디오를 빨리 보여주고 싶어요. 덕분에 이런 걸 만들었다고. 그럼 기뻐하실 거 같거든요. 그런 게 제겐 재미있는 일이에요. 수만 명이 ‘좋아요’를 눌러주는 것보다도.
(ELLE KOREA SEPTEMBER 2016 NO.287 'ELLE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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