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작품을 통해 이름을 얻는다. 브라이언 크랜스턴은 50세에 다다라서야 이름을 얻게 됐다. 정말 긴 기다림이었다. 인생의 반환점을 돈 시점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만난 배우의 절정, 어쩌면 이제야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브레이킹 배드>가
내 인생을 바꿨다." 그렇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브라이언
크랜스톤이 <브레이킹 배드>에 출연하는 동안 그의
입지는 확실히 달라졌다. 지난 2013년 다섯 번째 시즌까지
종영된 TV시리즈 <브레이킹 배드>는 2014년 에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하고, 배우 부문에서도 여우주연상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개 부문까지 수상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브레이킹 배드>의 알파이자 오메가라 할 수 있는 월터
화이트를 연기한 브라이언 크랜스턴 역시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브레이킹 배드>에 출연하며 네 번째로 받는 에미상 남우주연상이었다. 이보다
좋은 결말이 없었다.
<브레이킹 배드>는
일개 고등학교 교사였던 월터 화이트가 마약 업계의 거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본래 월트
화이트를 연기할 후보로 물망에 올랐던 건 크랜스톤이 아니었다. 존 쿠삭과 매튜 브로데릭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캐스팅을 고사하면서 크랜스턴에게 기회가 넘어왔다. 제작사
입장에선 크랜스턴이 탐탁지 않았다. <브레이킹 배드> 이전에
크랜스턴은 <말콤네 좀 말려줘>라는 TV시트콤으로 익숙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7년간 악동 같은 네 아들의
장난질에 샌드백처럼 당하기만 하는 아버지 역할을 맡아온 크랜스턴이 선악의 경계를 치열하게 오가는 월터 화이트를 소화해낼 수 있을지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의 총괄프로듀서인 빈스 길리건은 크랜스턴을 믿었다. 빈스 길리건은 1998년에 연출한 <X파일>
시즌6의 한 에피소드에서 시속 50마일로 달리지
않으면 죽는 남자로 크랜스턴을 캐스팅했고, 그가 어두운 내면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임을 알고 있었다. 크랜스턴 역시 <말콤네 좀 말려줘> 이후로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낼 만한 캐릭터를 거듭 제안 받는 것에 대한 신물이 난 상태였고, 새로운 전환점을 찾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마약계의 대부가 될 남자일
것이라 예상하진 못했지만.
혹시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를
봤다면 크랜스턴이 출연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아마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라이언 가문의 4형제 중 막내를 제외한 모두가 전사했다는 보고를 받는 육군대령으로 잠시 등장할 뿐이니까. 심지어 엔딩 크레딧에도 '육군대령(War
Department Colonels)'이라는 역할로 표기되는, 이름도 없는 역할이었다. <브레이킹 배드> 이전까지의 크랜스턴의 경력을 보면 그가
할리우드에서도 특별히 언급될만한 배우로 꼽히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를 통해 그의 이름은 할리우드에서도 자주
오르내렸던 것이 틀림없다. 2011년부터 크랜스턴의 필모그래피에 지각변동이 생긴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컨테이젼>(2011)과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2011) 등
주목할만한 감독의 작품에서 연이어 모습을 드러냈고, 1990년도에 발표된 동명 SF고전을 리메이크한 <토탈리콜>(2012)과 벤 애플렉의 연출작이자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스릴러물
<아르고>(2012)에서는 시선을 끄는 역할로 자리하며 배우로서의 경력에 무게를
더했다. 심지어 범죄스릴러물인 <콜드 컴즈 나잇>(2013)에선 포스터에서부터 그에 대한 존재감이 달라졌음을 깨닫게 만든다. 동명 블록버스터를 리메이크한 <고질라>(2014)에서도 비중은 적지만 확실한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크랜스턴은 그의 인생에서 두고두고 중요하게 언급될 작품과 조우하게 된다.
전세계가 냉전으로 얼어붙은 1950년대에 매카시즘 광풍이 한창이던
미국을 배경에 둔 <트럼보>는 반공산주의를 표방하며
반자유적인 횡포를 일삼던 정부의 태도에 반기를 든,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에 관한 실화를
다룬 전기물이다. 할리우드의 인기작가였던 트럼보는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겠다는 명목으로
사회적 공포를 주입하는 반미활동위원회에 맞선 인물이다. 덕분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할리우드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된 그는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11개의 가명을 쓰고 B급 영화 시나리오를 대량생산하게 된다. 할리우드의 명품 작가라는
명예 대신 이야기를 만드는 기술자로서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가족을 위해 자신이 추구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된다는 과정이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를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또한 연신 시나리오를
써내며 얻은 스트레스를 가족에게 전이시키며 의도와 달리 가족의 불행을 조장하는 트럼보의 히스테릭한 면모는
<브레이킹 배드>에서 악인의 카리스마에 탐닉하며 가족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월터
화이트의 이중성과 닮아있다. 크랜스턴은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처음 노미네이트됐다.
브래드 퍼먼이 연출한 범죄 스릴러물 <링컨 차를 탄 변호사>(2011)에 출연한 바 있는 크랜스턴은 브래드 퍼먼의 차기연출작인 <인필트레이터: 잡입자들>(2016)에서 주연을 맡았다. <트럼보>와 마찬가지로 실화를 바탕에 둔 이 작품은 콜롬비아의
마약왕이었던 파블로 에스코바의 마약 거래 내역을 확보하고자 5년간 잠입 수사를 펼친 미국의 관세청 특수요원
로버트 마주르에 관한 작품이다.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가 하이젠버그라는 가명으로 신분 세탁을 하며 마약을 제조한 것처럼 <인필트레이터: 잠입자들>의 로버트 마주르는 밥 무셀라라는 가명으로 신분을
위장해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에 접근하고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무엇보다도 <브레이킹 배드>와
<트럼보> 그리고 <인필트레이터: 잠입자들>은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가장의 진심과 그 내면에
잠재된 캐릭터의 양면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브라이언 크랜스턴이라는 배우의 장기를 대변하는 공통분모의 사례처럼 보인다. 온화한 인상 뒤편에 잠재된 폭력성, 윤리적인 언어와 행동의 내면에
자리한 일탈적 본능, 안정을 추구하면서도 때론 쾌락을 탐닉하는 부조리함. 이 모든 이중성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재능이 그가 배우의 삶을 지속해올 수 있었던 비결이었을 것이다.
"캐릭터를 이해해야 한다.
진정으로 캐릭터를 이해하면, 삼투압 되듯이 캐릭터가 스며들 거다. 거기서부터 당신은 캐릭터를 필터 삼아 생각하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거기에 한 가지 방식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식으로 그걸 이뤄내든 그 방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크랜스턴은 지난 9월에 열린 에미상 시상식에서 다시 한번 남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된 바 있다. 존 F. 케네디의 암살 이후 국정을 이어받아
대통령직을 수행한 린든 존슨에 관한 실화를 극화한 TV영화 <올
더 웨이>에서의 호연을 인정받은 덕분이다.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크랜스턴이란 이름이 주는 신뢰감은 보다 명확해졌다. 이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나아갈 방향에 따라 걸어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