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로
꼽히는 케이트 윈슬렛은 그럼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진화를 거듭하는 배우다. 그녀는 여전히 배우로서의
삶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어줄 작품을 찾고 있다.
“나는 열셋 혹은
열네 살 때부터 항상 실제보다 나이를 더 먹은 것처럼 느꼈다.” 영국 출신으로 11세 무렵부터 연기를 배운 케이트 윈슬렛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그녀의
연기 데뷔는 13세가 된 1991년 영국의 TV시리즈물을 통해서 이뤄졌다. 스크린 데뷔작도 10대가 지나기 전인 17세에 찾아왔다. 지금은 할리우드의 대가가 됐지만 한때 B급 장르물의 대가로서 악명이
자자했던 피터 잭슨의 <천상의 피조물>(1994)이
바로 그것이었다. 끔찍한 실화를 밑그림으로 삼고 있지만 광기적인 판타지로 채색된 이 영화는 비현실적인
망상에 사로잡힌 두 소녀의 기괴한 우정이 끝내 한 소녀의 어머니를 살해하기까지의 내용을 그리고 있는데 여기서 친구의 엄마를 살해하는데 조력하는
폴린 역으로 등장하는 윈슬렛은 나이에 비해 조숙한 외모만큼이나 섬뜩한 연기력으로 눈길을 끌었고,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했다.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삼촌까지 극단에서 활동하는 배우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배우로서의 삶은 어쩌면 운명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에겐 확실히 타고난 유전자가 있었던 것 같다.
윈슬렛은 제인 오스틴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이안 감독의 <센스
앤 센서빌리티>(1995)에서 연기한 마리안 대시우드 역을 통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는
영예를 얻었다. 그러니까 10대가 지나가기도 전에 케이트
윈슬렛은 배우로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영광에 근접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윈슬렛에게 있어서
그건 이른 경험이라기 보단 시작에 가까웠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 이후로 윈슬렛은 시대극의 경력을 이어나갔고,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해냈다. 19세기 영국에서 대담한 주제를 소설로 담아냈던 토마스 하디가 남긴 마지막 소설을
영화화한 <쥬드>는 종교적인 관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19세기 영국을 배경에 둔 비극적인 러브스토리다. 자신의
사촌을 사랑하게 된 여인 수를 연기한 윈슬렛은 애절한 사랑을 가로막는 시대적 한계를 절감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여인의 가련하고도 강인한 표정을
완벽하게 체화해냈다. 한편 같은 해에 공개된 <햄릿>(1996)에서는 그 유명한 오필리어를 연기한다. 아버지를 잃고
미쳐버린 뒤 끝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오필리어의 광기에 압도적인 페이소스를 입히는데 성공했다. <타이타닉>(1997)에서도 비극과 대면하는 여인의 세계관은 거듭 이어졌다. 필연적인
비극을 향해 항해하는 배 위에서 자신이 꿈꾸는 삶과 사랑을 선택하는 열정적인 여인 로즈를 연기했다. 윈슬렛은
그렇게 비극적인 운명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여인으로서의 운명을 연기하는데 능했다. 혹은 능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윈슬렛이 연기한 여성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시대적 편견이나 관습을 견뎌내야 하거나 평범한 삶에 깃든 내밀한
욕망을 향해 손을 뻗는 경우가 많았고 그때마다 케이트 윈슬렛은 고요하면서도 강인하고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대혁명
이후로 도래한 삼엄한 공포정치 속에서 금기시된 음란소설에 탐닉하며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여인 마들렌으로 분한 <퀼스>(2000)와 무료한 삶에 찾아온 예기치 못한 불륜에 빠져드는 여성 사라를 연기한 <리틀 칠드런>(2006), 제2차 세계대전의 광풍 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독일의 첩자로 내몰리게 된 여인 한나를 연기한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8)
그리고 안온하게 위장된 권태로운 삶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듯 살아가는 여인 에이프릴로 등장한 <레볼루셔너리 로드>(2009)까지, 이 모든 작품에서 윈슬렛은 저마다 다른 환경에 놓인 각기 다른 여인을 연기하면서도 결국 ‘나’라는 존재 혹은 ‘나’라는 여성에 대한 자문을 거듭한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 혹은 자신이
알고자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시대적 금기의 담을 넘거나 위장된 삶 너머로 시선을 돌린다. 이는
근작인 <레이버 데이>(2013)에서 또한 마찬가지다. 공황장애로 인해 세상과 자신의 삶을 분리시키며 유일한 가족인 어린 아들에게 기대며 살아가는데 우연히 맞닥뜨린
탈옥수로 인해 기이한 방식으로 삶을 회복해 나간다. 불안하고 예민한 심리에 묶여 깊게 침전해있던 여성으로서의
욕망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올라 그녀에게 현실적인 의지를 부여한다. 금새 꺼져버릴지라도 가장 밝게 빛나는
한 순간을 위해 타오르는 성냥과도 같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의 가련한 슬픔과 강인한 의지가 동시에 전해진다. 윈슬렛은
바로 그런 배우였다.
<어 리틀 카오스>(2015)를
통해 오랜만에 시대극으로 돌아온
그녀는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의 분수 디자인을 맡기 위해 경쟁하는 정원사 사빈 역을 맡았다. “사빈느와 나 사이엔 닮은 점이 많다고 느꼈다. 그녀는 일생 동안
큰 슬픔과 어려움을 여러 번 이겨냈고, 내 삶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녀가 그 모든 슬픔과 어려움을 극복했다는 사실에 있어 존경심이 든다. 그녀는 슬픔을 질질
끌고 가지 않았으며, 세상이 그녀를 불쌍히 여길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단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매우 긍정적이고 흥이 많다. 시대극에서 이러한 캐릭터를 많이 만날 순 없지.” 사빈은 윈슬렛이 연기했던 시대극 속의 여자들과는 또 다른 목표를 제시했다. 한편 <타이타닉> 이후로
대작 출연을 고사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상업영화 출연 경력이 드물었던 그녀는 최근 SF시리즈물인 <다이버전트>(2014)와 <인서전트>(2015)에 연이어 출연하며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그녀 스스로 새로운 경력의 필요성을 느낀 것일까?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은 독립영화를 하겠다는 의식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절대 그렇지 않다. 모든
작품 이후에 항상 얼마나 다른 걸 보여줄 수 있을지를 고려한다. 내게 도전이 될 수 있는지, 영감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지금보다 내 직업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인지 말이다.” 그녀에게 상업적인 할리우드 대작이 도전이 되고, 영감을
줄만한 때가 된 것이다. “사실 나는 상당히 운이 좋다. 오직
나 자신을 위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불평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비범한 것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매우 흥미롭고, 도전적이며, 창조적인
자극을 주는 일을 끊임없이 해왔다.” 윈슬렛은
실패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경력을 좀처럼 쌓지 않았다. 이미 이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 중 하나로 꼽히지만
그녀의 전성기는 아직도 지나지 않은 것 같다. 아직도 그녀는 길을 찾고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배우로서의 삶을 더욱 사랑하게 만드는 도전과 영감의 길 위에서, 케이트 윈슬렛이라는 이름으로.
그러니까 1997년이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타이타닉>이 전세계 최고 흥행영화 순위의 첨탑에 오른 것이 말이다. 그런 <타이타닉>을 비로소 정상에서 끌어내린 건 <아바타>(2009)였다. 또 한번 제임스 카메론이었다. 하지만 그 흥행 이전부터 <아바타>는 도마 위에 있었다. 제임스 카메론의 복귀작,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소요된 3D영화 등, 기대와 의심을 가로질러 모든 언어가 <아바타> 앞에 정렬하듯 모여드는 것마냥 그랬다. 어쨌든 뚜껑이 열렸다.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은 거대한 가상의 세계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그건 완벽하게 3D영화라는 세계관에 복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맞춤형 세계였다. 광대한 대자연의 장관이 그 자체로 스케일 있는 원근감을 마련하고, 실사와 CG애니메이션 기법이 혼재된 캐릭터 전환으로 CG애니메이션에서 보다 탁월하게 구현되는 3D영상의 장점을 끌어올린다. 특히 LED에 가까운 높은 조도로 밝혀진 판도라의 야경은 장관의 레이져쇼다. <아바타>는 3D영화를 위해 마련한 총아였다.
<아바타>의 성공 이후, 불과 2년여 만에 상영관의 풍경뿐만 아니라 영상 산업의 패러다임이 변했다. 3D안경을 끼고 눈의 수평을 조절하며 스크린을 응시하는 것이 어느 새 영화를 보는 하나의 방식이 됐다. 영상 디스플레이 시장에서는 3D제품 출시가 하나의 유행처럼 번졌다. <아바타>의 엄청난 성공은 3D라는 플랫폼에 대해서 반신반의하던 영화계뿐만 아니라 영상 디스플레이 업계를 위한 복음이 됐다. 21세기 대부분을 3D영화 제작에 매진해온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이런 급진적인 변화에 충격을 받고 알코올 중독자가 돼서 할리우드 길바닥을 뒹굴고 있다더라 한들 이상하지 않을 만한 혁신이었다.
<아바타>에 이은 드림웍스의 야심작 <드래곤 길들이기>(2010)가 큰 호평을 받을 때만 해도 3D영화는 기꺼이 지갑을 열만한 물건처럼 여겨졌다. 문제는 그 이후다. 그 성공에 고무되어 생산된 3D영화들이 대부분 그러한 기대감을 배반했기 때문이다. 3D영화는 두 눈을 지닌 사람처럼 두 개의 렌즈를 지닌 특수 카메라를 이용해서 촬영된다. 고가의 특수 장비와 정교한 촬영술이 요구되는 만큼 많은 시간과 대자본이 요구된다. 이런 수고와 투자를 덜고자 일반적인 카메라로 촬영한 뒤, 기계적인 방식으로 상을 분리시킨 3D 컨버팅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반상영관보다 비싼 티켓값을 치르고 안경까지 끼는 수고를 감안하면서 시각적 피로도를 견뎌냈음에도 ‘무늬만 3D영화’들은 배신감만 안겨줬다. 특히 2011년, <그린 호넷> <걸리버 여행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 등 3D영화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평면적인 블록버스터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하며 티켓가만 올려대고 있다는 비아냥을 얻었다. 카메론마저도 이 ‘짝퉁’들의 득세에 불만을 토로할 지경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3D영화에 주목하는 스티븐 스필버그나 마틴 스콜세지와 같은 할리우드의 장인 감독들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에르제의 고전 만화를 퍼포먼스 캡처 기술을 동원한 3D 애니메이션으로 완성한 스필버그의 <틴틴: 유니콘호의 모험>(2011)은 3D영화라는 플랫폼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킨 사례다. 영화의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롱테이크 추격신은 단연 백미다. 실사 촬영으로 따라잡기 힘든 동선을 인물의 표정까지 생생하게 포착하는 퍼포먼스 캡처의 디테일과 CG로 구현된 가상적인 스케일로 포착해내고, 3D를 통해 생생한 현장감을 입혔다. 스필버그는 말한다. “모든 영화가 3D일 필요는 없다. 3D로 촬영될 이유가 없는 이야기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3D 안에서 완벽해지는 영화들이 있다.” 브라이언 셀즈닉의 인기 동화 <위고 카브레>를 각색한 3D영화 <휴고>(2011)로 큰 호평을 얻은 스콜세지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스필버그에게 동의한다. 항상 나는 3D에 관심이 있었고, 그것이 <휴고>를 위한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할리우드의 두 거장의 말에는 뼈가 있다. 3D는 개척할만한 영화적 기법이라는 것, 하지만 3D가 모든 영화를 위한 대안은 아니라는 것. CG의 발달이 장르의 발전으로 통했듯이 3D영상의 발전 또한 새로운 표현력의 가능성을 여는 문이 될 수 있다. 그렇게 하나의 표현 기법으로서 정착될 때 보다 긴 생명력을 얻어낼 수 있다.
최근 조지 루카스 감독의 <스타워즈 에피소드1: 보이지 않는 위협>이 3D영화로 재개봉됐다. 이 스페이스 오페라가 3D의 가면을 쓰고 부활하는 광경은 최근 3D영화를 둘러싼 어떤 경향을 대변한다. <타이타닉> <탑 건>과 같은 할리우드 고전 블록버스터나 <라이온 킹> <미녀와 야수>와 같은 디즈니 클래식 애니메이션들이 3D로 변환되어 개봉되는 중이다. 클래식의 입체적 발굴이라 할만한 이런 경향은 앞으로 3D영화의 향방을 가늠할만한 새로운 화두다. 현대적인 기술이 과거의 영광을 재조명한다니, 3D영화의 진로 개척은 여전히 진행 중인 것이다.
한국에서도 3D영화에 대한 관심은 뜨겁다. <아바타>의 흥행은 한국산 3D영화 제작이라는 열망을 부추겼다. 하지만 제작 의사를 밝힌 몇 편의 3D영화가 증발되거나 답보적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지난 해 국내 최초 3D 블록버스터라는 수사 아래 <7광구>가 공개됐다. 이는 뼈저린 교훈을 남겼다. 시행착오의 한 단면이라 이해할 수도 있지만 무모하게 전세계적인 유행에 편승한 악수는 산업적인 재앙으로 축적됐다. 중요한 건 결국 ‘3D영화’가 아니었다. 비싼 티켓을 결제하고 안경까지 걸치며 눈의 피로까지 감당해야 하는 관객들은 점차 ‘3D’가 아닌 ‘영화’를 주목하기 시작한다.
과거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 반짝했던 3D영화 붐과 달리 지금의 유행은 일시적인 현상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3D영화를 위한 디스플레이가 개발되고, 보다 진일보한 영상 기술이 그 진화를 뒷받침하고 있는 산업적 논의 안에서 3D영화는 더 이상 미래의 영화가 아닌 현재의 영화다. 심지어 3D라는 시각적 극치를 넘어서 오감을 자극하는 4D까지 등장한 지금, 영화는 단지 숨죽이고 봐야 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중요한 건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이다. 관객들은 영화가 보여줄 그 무엇을 기대하며 상영관에 들어선다.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달리는 기차 영상을 본 대중의 열광이 동력이 되어 여기까지 왔다. 영화의 역사란 결국 움직이는 영상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라는 고민을 연료처럼 태우며 달려온 것이다. 관객이 보고 싶어하는 혹은 열망할만한 것, 3D영화의 미래 역시 그 고민을 태우며 달려가야 한다.
네버랜드의 피터팬이 아니라면 깨달아야 한다. 젊음은 영원하지 않음을. 제임스 딘이나 리버 피닉스처럼, 죽음만이 젊음을 보존한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죽지 않았다. 그의 젊음도 저물어간다. 하지만그는 성장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남자로서 중후한 삶을 피워냈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신중하게 말했다. “올해는 내 스스로에게도 정말 조심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난 35살이 됐고 많은 것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가끔은 너무 심각하다 싶을 정도지. 내가 다음으로 하게 될 무엇이라도 확인해보고, 나를 위해 진짜 옳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다다른 곳을 보게 될 것이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어느 덧 30대 중반의 남자가 됐다. 디카프리오의 과거를 알지 못하는 젊은 관객들에게 그의 현재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오래 전부터 그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디카프리오의 현재란 분명 놀랄만한 변화임에 틀림없다.
1974년생인 디카프리오는 1990년대의 출발과 함께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아역배우들의 그것처럼 디카프리오의 경력의 시작도 두드러진 편은 아니었다. 몇 편의 TV시리즈나 시트콤 등에 출연한 디카프리오는 번번히 영화 오디션에서 탈락하고 있었다. 당시 비슷한 경험을 반복해 나가던 토비 맥과이어와의 인연을 맺게 됐다는 것 정도가 뒤늦게 의미있는 일이었다고 할까. 게다가 첫 스크린 출연작이었던 B급 호러영화 <크리터스3>(1991)는 주목을 얻지 못한 채, 비디오 시장으로 직행했다. 디카프리오에게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경력은 1993년에 찾아왔다. 수많은 경쟁자들이 참여한 오디션을 통과한 디카프리오는 <디스 보이스 라이프>에서 로버트 드니로와 알란 버킨과 같은 대배우들과 한 공간에서 연기하는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같은 해, <길버트 그레이프>에 출연했다. <디스 보이스 라이프>가 디카프리오에게 있어서 자양분과 같은 작품이라면 <길버트 그레이프>는 디카프리오의 가능성을 짐작하게 만든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니 뎁과 형제로 출연한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디카프리오는 정신질환이 있는 동생을 연기하며 인상적인 평가를 얻어냈고,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불과 열 아홉 살의 나이였다.
진 해크만을 비롯해 샤론 스톤, 러셀 크로우가 출연한 서부극 <퀵 앤 데드>(1995)는 디카프리오에게 하이틴 스타로서의 운명을 제시한 작품이다. <퀵 앤 데드>에서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소년은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맞서지만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반쪽 짜리 오이디푸스나 다름없었다. 소년의 여린 얼굴 위로 우수에 찬 눈동자가 덧씌워질 때, 캐릭터의 비극적인 운명은 보다 낭만이란 수식어를 얻는다. 그 뒤로 디카프리오는 혈기왕성한 청년의 비극적인 무용담과 로맨스를 본격적으로 활보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에 출연했던 <토탈 이클립스>에서 아더 랭보 역할에 내정된 건 리버 피닉스였다. 하지만 리버 피닉스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해 그 빈자리는 디카프리오의 것이 됐다. 이는 리버 피닉스의 적자로서 디카프리오가 선택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바스켓볼 다이어리>(1995)는 하이틴 스타로서 디카프리오의 운명을 온전히 다지는 작품이었다. 뉴욕 출신의 뮤지션이자 시인이기도 한 짐 캐롤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바스켓볼 다이어리>는 가난과 폭력에 갇힌 10대 소년들의 비극적인 무용담을 담아낸 수기다. 이 작품에서 디카프리오는 특유의 반항아적인 기질과 예민한 감수성을 마음껏 분출시킨다.
하이틴 스타로서 디카프리오의 절정을 이룬 작품은 <로미오와 줄리엣>(1996)과 <타이타닉>(1997)이었다. 특히 21세기까지도 유효한 <타이타닉>의 기록적인 흥행은 곧 ‘레오 매니아(Leo-mania)’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킬 정도로 전세계적인 신드롬을 불렀다. “<타이타닉>은 완전히 내 인생을 바꿔놨다.” 디카프리오의 말처럼 <타이타닉>은 그의 인생을 풍랑으로 밀어넣었다. “운전하거나 걸어다니는 모든 일상의 공간에서 갑자기 너댓명의 파파라치들에게 뒤쫓기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 됐다. 내가 갔던 어떤 공간에서, 누군가는 나에 관한 이야기가 새어내보내고 있었다.” 인기는 기회라는 백지수표와 같다. 한없이 누릴 수 있지만 그 끝을 예감하기란 어렵다. 디카프리오는 그 순간에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20대 중반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무엇이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삶에서 다른 경험을 얻을 것이다. 나는 어떤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나에게 확실히 배울만한 경험이었다. 그 경험은 내가 배우가 되는 결정에 보다 집중하게 만들었다.”
<타이타닉> 이후, 알렉상드로 뒤마의 고전 <삼총사>에 바탕을 둔 <아이언 마스크>(1998)에서 출연했던 디카프리오는 뉴 밀레니엄을 맞아 모험을 감행한다. 대니 보일의 <비치>(2000)를 선택한 것. 심지어 디카프리오의 자발적인 지원으로 당초 캐스팅에 내정됐던 이완 맥그리거가 밀려났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2000년의 시작과 함께 디카프리오는 엄청난 혹평을 감당해야 했다. 심지어 태국의 환경단체로부터 생태계 파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며 영화사는 막대한 배상금까지 물어야 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떠나 디카프리오의 선택은 그의 내면에서 자라나는 어떤 욕망을 짐작하게 했다. 그 욕망을 해소해줄 수 있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조력자가 등장했다. 마틴 스콜세지였다.
“그는 강요당하는 것처럼 매우 이상한 통과의례를 관통해냈다.” 디카프리오와 함께 <갱스 오브 뉴욕>(2002)에 출연한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말처럼 디카프리오에게 <갱스 오브 뉴욕>은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나는 대단한 너비와 디테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경험이었지.” 디카프리오의 말처럼 <갱스 오브 뉴욕>은 디카프리오의 욕망을 발현시키는 관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갱스 오브 뉴욕>은 디카프리오에게 스릴러의 거장이자 세계 영화사의 산증인 마틴 스콜세지와의 만남을 주선한 작품이란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낳았다. “그와 함께 일한다면 이걸 알아야 한다. 그저 모든 시간 동안 끝장을 보기 위해서라는 것을. 하지만 하루의 끝에 다다르면 그의 언어는 금처럼 귀중해진다. 그가 당신의 캐릭터를 위해 지켜본다는 것이 영화를 보다 완벽하게 만들기 위한 것임을 신뢰해야 한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는 디카프리오에게 있어서 온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소년의 고독을 벗어나 진짜 생존을 위한 혈투로 내던져진, 일종의 피비린내나는 성인식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디카프리오가 로버트 드니로를 잇는 스콜세지의 적자가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에비에이터>(2004)와 <디파티드>(2006), 그리고 최근작인 <셔터 아일랜드>(2010)까지, 디카프리오는 스콜세지의 남자에서 스콜세지의 조력자로 성장해 나갔다.
스콜세지는 디카프리오에게 배우로서의 삶에 거대한 이정표가 된 인물이나 다름없다. <갱스 오브 뉴욕> 이후, 디카프리오의 행보는 심상찮은 것이었다. 스콜세지의 네 작품을 비롯해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캐치 미 이프 유 캔>(2002)과 에드워드 즈웍의 <블러드 다이아몬드>(2006), 리들리 스콧의 <바디 오브 라이즈>(2007), 그리고 샘 멘데스의 <레볼루셔너리 로드>(2009), 그리고 현재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인셉션>(2010)까지, 그는 지금 할리우드의 감독들이 선망하는 최전선에 선 배우다. 동시에 최근 그의 행보는 과거 하이틴 스타로서의 경력을 온전히 지워버리는 과정에 가깝다. 특히 현재의 디카프리오를 보여주는 <셔터 아일랜드>에서 그는 스콜세지의 세계를 채우는 구성원이 아닌, 그 세계를 장악하는 표정을 구축해내고 있다. 폐쇄적인 인간의 내면을 심도 깊은 서스펜스와 너른 페이소스로 버무리는 <셔터 아일랜드>에서 디카프리오는 스콜세지가 창조한 혼돈의 세계관을 융용시키는 발화점이자 최고의 연기적 화력을 구사한다. 또한 스콜세지의 새로운 신작으로 예정된 루스벨트에 관한 영화에서도 디카프리오를 보게 될 가능성은 적지 않다고 한다. 스콜세지 역시 디카프리오를 통해 새로운 영화적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곳은 어디나 가난하고 깨끗한 물이 충분하지 않지만 그들은 믿을 수 없을만큼 놀랍게도 이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곳에 서구세계가 가능한 한 원조를 계속해 나가는 건 값어치 있는 일이다.그것이 내가 말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 2004년부터 영화 제작에 참여해온 디카프리오는 2007년, 다큐멘터리 <11번째 시간>을 제작하고 직접 나레이션까지 도맡았다. 지구의 파괴와 환경의 오염에 관한 진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그의 관심사가 보다 넓은 세계를 향해 있음을 알렸다. 시에라리온에서 벌어지는 서구 회사의 착취적인 다이아몬드 채굴 횡포를 고발하는 <블러드 다이아몬드>에 출연한 이후, “다이아몬드에 얽힌 갈등과 그 사건들에 관해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는 그의 진심도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는 최근 아이티섬의 구호를 위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2002년 USA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디카프리오는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10년이 지나도 나는 내가 영화에서 연기한 다양한 캐릭터들을 돌아보며 여전히 이에 관해 말할 수 있길 바란다.” 2년을 더 기다릴 것도 없다. 그는 이미 그 꿈에 도달했다. 우수에 젖은 눈빛과 맨주먹을 쥐고 세상에 부딪혀 쓰러지던 소년의 사춘기는 지난지 오래다. 세월을 지나 소년을 벗고 남자를 입은 디카프리오는 지금,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현명한 배우로서 삶을 전진시키며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