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빛이 있었다. 빛은 이미지를 낳았다. 영화는 이미지의 예술이다. 영화는 빛이 낳은 예술이다. 그 빛을 통해 보다 밝게 영화를 밝힌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영화를 통해 세상은 빛난다.
이명세
이명세의 연출데뷔작 <개그맨>은 안성기의 대사로 시작된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한낱 꿈속의 꿈인가, 꿈속의 꿈처럼 보이는 것인가.” 이는 이명세가 추구하는 영화적 세계를 짐작하게 만드는 언어나 다름없다. 그는 마치 실재와 환상에 두 발을 걸친 것처럼 현실의 스크린에 자신의 꿈을 투영해왔다. 그는 자신의 작품 대부분이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는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단편적인 이미지로서 표현하는 수준을 넘어 고유한 창작적 세계관으로서 자리매김하는 비주얼리스트로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가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디테일하게 연출된 명암의 대비를 통해 시공간의 경계를 허문다. 특히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형사>, <M>과 같은 근작들의 인물들은 뚜렷한 빛과 그림자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실과 허구를 오가고 이를 통해 실재와 환상이 스크린에 투사된다. 영화는 이명세가 꾸는 꿈이다. 그는 영화를 통해 현실을 산다. 그래서 그는 현실에서 영화를 꿈꾼다. 선명한 빛이 내리고 그림자가 드리울 때 꿈이 시작된다.
이와이 슌지
<러브레터>나 <4월 이야기>와 같이, 사랑과 기억에 관한 애틋한 송시와 같은 멜로로 유명한 이와이 슌지는 사실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그의 영화적 표현이 이미지를 통한 감정의 전달에 놓일 수 있었던 것도 그 토대에 있다. 특히 ‘이와이 월드’라는 팬덤을 구축하게 만든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는 그가 단순히 로맨틱한 감성주의자에 불과하지 않은 감각적인 스타일리스트임을 증명하는 단초와 같은 작품이었다. 이와이 슌지가 연출한 대부분의 영화들은 창백할 정도로 극대화된 명도를 통해 영상을 밝히는데 이는 하나같이 그가 묘사하는 세계에 자리한 인물들의 순수한 내면을 보조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순수한 심성을 지닌 인물들로 구축된 백색의 도화지와 같은 세계를 묘사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때로 연필로 흑칠을 해내듯 어두운 단면들을 그려내기도 하지만 이내 지우개로 지워버리듯 인물들의 순수를 보존하고 감성을 정화시킨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감수성으로 자신의 세계를 향해 안부를 묻고 안녕을 빈다.
구스 반 산트
구스 반 산트는 <굿 월 헌팅>과 같이 드라마틱한 성장드라마를 연출하며 스토리텔러로서 먼저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그는 유려하고 심오한 영상미를 구사하는 시네아스트로서 확고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실화를 스크린에 재현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구스 반 산트는 미국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건을 소재로 <엘리펀트>를 완성했고 이를 통해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 구스 반 산트는 “추악하고 화창한” 그 날의 기억을 종용하고 근본을 추궁하는 대신, 풍요로운 광량을 바탕으로 여전히 생이 자리하던 그 곳의 공기를 묵묵하게 환기시킨다.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 <파라노이드 파크>를 관통하는 건 죽음이 내려앉기 직전까지 그곳에 생이 있었다는 흔적들이다. 그는 죽음을 되묻는 것보다도 그 죽음에 앞서 선행된 생의 시간을 먼저 살피고 죽음에 앞서 생의 의미를 짚는다. 죽음 앞에 삶은 무력하다. 하지만 죽음이 멈출 때 삶은 나아간다. 그래서 구스 반 산트는 언제나 추악한 죽음보다도 화창하게 삶을 응시한다.
왕가위
“나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영화에 드러내고 싶다.” 스스로의 말처럼 왕가위는 결코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감정을 풍경의 공기에 담아 관객의 기억 속에 뿌리내린다. 그의 시간 속에서 모든 이들은 사랑하고 또 아파하며 다시 그리며 살아간다. 몇 마디의 대사로도 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찰나의 풍경으로 번져 스크린을 채운다. 애틋한 그리움, 진한 갈망, 깊은 상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부터 아지랑이처럼 피어 오르는 갖은 심정들이 찰나를 메우다 영원으로 흘러간다. 서서히 달아올라 뜨겁게 달궈진 뒤, 차갑게 식어내리는 감정들은 왕가위의 시간 속에서 단단한 결정과 같은 컷의 연속으로서 물결처럼 흐른다. 오래된 사진처럼 퇴색되어 가는 지난 기억 가운데서도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아련한 로맨스의 추억들이 점멸하는 이미지가 되어 그의 영화 속에서 흐르고 또 흐른다. 사랑은 변한다. 그리고 왕가위는 기억한다. 지난 시간 속에 절경처럼 자리한 ‘화양연화’를, 기억 위에 내려 앉은 먼지마저도 애틋한 감정처럼 붙잡고 싶던 그 시절을.
조 라이트
제인 오스틴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오만과 편견>으로 스크린에 입문한 조 라이트는 문체 속에 담긴 우아한 기품과 감정의 체온을 이미지로 승화시키며 성공적인 데뷔를 이뤘다. 그리고 이언 매큐언의 <어톤먼트>를 영화화하며 또 한번 자신의 재능을 입증한다. 사실적인 시대상을 묘사하는 동시에 시대적 공기를 담아내고, 인물의 내면적 심리와 감정의 흐름을 섬세하게 어루만지며 텍스트에 담긴 의미를 넘어 그 감정 자체를 완벽하게 스크린에 구현해내는데 성공했다. 근작인 <솔로이스트>는 내용면에서 주춤하지만 인물 간의 심리적인 조율을 묘사해내는 그의 능력은 유효하다. 그는 풍부한 자연광을 통해 영화 속에 감정의 결을 새겨 넣는다. 서로 사랑을 속삭이고 영원을 다짐하는 남녀가 마주한 저택의 정원 잔디 위로, 해변 위를 걷는 남녀의 발등 위를 적시는 푸른 바닷물 위로, 도심 한 곳에서 새어 나오는 연주음을 좇아간 신문기자 앞에 모습이 드러난 노숙자가 키는 바이올린 위로, 빛이 떨어진다. 저마다 다른 감정의 결정체가 되어 빛을 발한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은 근원보다는 현상에 시선을 둔다. 사막을 헤매는 두 청년이 애초에 무엇을 향했는지(<게리>), 끔찍하게 총알을 난사한 소년들은 무엇을 겨눈 것인지(<엘리펀트>), 죽음에 대한 깊은 갈증을 느끼는 청년이 본래 지녔을 생의 의지는 어디로 증발한 것인지(<라스트 데이즈>), 그 모든 것은 중요치 않다. 그는 현실 뒤편의 어떤 근원 지점에 대해서 무신경하게 고개를 한번 돌렸다가 다시 제자리를 바라볼 뿐이다. 잠시 일그러지거나 부서지고, 사멸했던 존재의 형상들이 그 예감을 털어놓기가 무색하게 다시 형체를 안온하게 회복하는 순간의 형형한 찰나를 재생시킨다. 그 과정 속을 걸어가는 젊은 육체들은 그 심약한 영혼에 죽음을 새겨 넣는다.
구스 반 산트는 그렇게 사(死)의 영역을 향해 끊임없이 전진한다. 그것은 카메라의 동선을 따라 걷는 현실적인 족적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대기 속에서 어지럽게 흔들리는 구체음악(具體音樂)의 초현실적인 혼돈으로 울려퍼지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청춘은 죽음의 기억을 새겨 넣는 미완성 형태의 오브제(objet)로 영역화된다. <파라노이드 파크>는 구스 반 산트의 전진을 위한 탐미적 공간이자 재생의 연결고리다.
파라노이드 파크(paranois park)는 청년들의 육체적 기운이 넘실거림과 동시에 무질서한 폭력성이 잠재된 공간이다. 동시에 그곳은 젊은 시절의 규정될 수 없는 정체성의 혼란처럼 자리를 찾지 못하고 흔들리듯 활강과 하강을 거듭하는, 중력에 저항하지만 속박될 수 밖에 없는 대지다. 그곳은 저항할 수 없는 성장의 인과 관계를 거부하려는 역동적인 몸짓들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스케이드 보드에 실린 움직임은 지정된 시간의 흐름 안에서 가속화된 편입의 상일 뿐이다. 즉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짊어져야 할 성장의 고민은 <파라노이드 파크>의 벗어날 수 없는 이면의 진실이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성장의 서사처럼 소년들의 움직임은 가속화될수록 시간의 중력 앞에 무력할 뿐이다.
파라노이드 파크에 가자는 자레드(제이크 밀러)의 말에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알렉스(게이브 네빈스)에게 파라노이드 파크는 감히 발을 들일 수 없는 이상 낙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누구도 그곳에 갈 준비가 된 사람은 없다는 자레드의 대답은 표면적으로 파라노이드 파크는 어떤 자격을 요구하지 않은 평등한 땅이란 의미를 뜻하는 것 같지만 이는 거부할 수 없는 통과의례적 관례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결국 파라노이드 파크는 알렉스의 삶을 장악하게 될 끔찍한 기억에 도달하기 위해 피할 수 없이 밟고 지나야 하는 운명의 문턱인 셈이다.
곡선 위를 미끄러지듯 구르는 스케이드 보드의 뒤를 쫓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슈퍼8mm카메라의 열악한 화면을 통해 이질적인 현실감을 부여 받는다. 현실에 불결한 잔상을 새기듯 얼룩진 화질을 선사하는 8mm카메라는 곡선의 역동적 동선을 쫓아갈 수 있는 유일한 카메라라는 점에서 되려 사실적이다. 이는 동시에 그 비현실적인 사실감이 그 영역의 허구적인 생동감을 표현하고자 하는 기교적 순수함으로서 활용된다. 공간적 정서를 끌어내기 위해 활용된 기술력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은 역시나 완전히 성숙되지 못한 자의식의 흐름이 역동적 기운으로 표출되는 공간적 활기를 담아내기에 적절한 그릇이 된다. 또한 소년기의 충동적 본능과 욕구가 육체적인 움직임으로 소비되는 공간적 기운을 거칠게 담아낸 비쥬얼은 몽환적인 일렉트로니카 음악에 덧씌워져 비현실적 자의식으로 확장된다. 또한 소년의 사소한 움직임과 시선을 구현하는 슬로 모션에 음향 효과처럼 덧입혀지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은 잊혀지지 않는 소년의 경험에서 비롯된 심리적 혼란을 외부적으로 투영한 내면적 현상으로 관객을 유인한다. 관객이 바라보는 그 영화적 현상들은 결국 소년의 심리적 공황이 만들어내는 무의식적인 기질이자 자의식을 속박하는 고민을 통해 형성된 외부적 무관심이기도 하다. 소년의 세계는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어떤 기억에 의해 외부적인 현상에 결계를 쳐놓듯 무신경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돌아가는 세상의 풍경은 소년의 자의식 속에서 몽환적으로 흘러가기도 하고 자질구레한 소음에 노출되기도 한다.
<파라노이드 파크>는 그렇게 현실과 비현실에서 방황하는 자아의 상을 오가며 비춘다. 알렉스는 그곳에서 소년기의 현실적 기운을 탐미하고 관찰하지만 그 현실에 동참하지 않는다. 그는 파라노이드 파크에 넘치는 젊음의 기운에 쉽게 동참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관망하고 현실의 상을 잠시 뒤로 밀어낼 뿐이다. 그 까닭은 소년의 작문, 즉 소년이 글로서 고백하는 어떤 사적인 기억을 거슬러 쫓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 기억은 영화적으로 관객에게 공개된다는 점에서 이미 열려있으나 영화 내부적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소년 스스로가 기억 속에 소진시켜버리는 닫힌 공간이기도 하다. <파라노이드 파크>는 결국 소년에게 밀폐된 기억을 보관하고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불침범의 공간이자 관객을 방관의 영역으로 밀어넣어 공범으로서 동참하게 만드는 비선택적 동참의 영역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 기억은 죽음과 관련되어버린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이자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일탈의 경계선을 딛고 나아가려는 상흔의 반환점이다. 그 위에서 자가 분열되는 자기 위안의 변명처럼 소년의 혼란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안정을 되찾기도 하지만 그와 함께 순수했던 기질로부터 비롯된 혼돈과 이별을 고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파라노이드 파크>는 그 순수했던 시절과 이별을 고하는 소년들의 끊임없는 저항적 몸부림이자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어제가 될 오늘의 운명 위로 기억을 채워 넣는 분주한 발자취다. 그래서 파라노이드 파크를 비롯한 소년의 동선은 두 번에 걸쳐 각각 재현되고 재생되며 현실적 행동과 기록적 묘사로서 행위에 깃든 동선의 기억을 되짚어간다.
붕괴되는 가정의 기반 안에서 잠재된 슬픔을 떠안고, 성적 충만감을 갈구하는 이성과의 교제 속에서 덧없는 관계 지속의 의미를 되새기는 알렉스의 삶은 소년의 여린 감수성에 도피의 출구를 꿈꾸게 한다. 평등한 삶 밖에는 뭔가 있지 않을까? 내 사소한 고민과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지 않을까? 파라노이드 파크에 다다른 소년은 비로소 자신의 현실로부터 도피한다. 동시에 그 출구로 발을 디딘 소년은 평상시 부딪히던 일상적 고민을 과거로 밀어넣고 차원이 다른 끔찍한 죽음이 도사린 현실에 직면한다. <파라노이드 파크>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자 동시에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특별한 계기의 굴곡이다. 일상의 사소한 고민에서 탈출하고자 했던 소년의 출구는 동시에 만만하지 않은 또 다른 차원의 삶의 무게를 떠안아야 한다. 그래서 기억을 떠안은 공간의 반복적 재생은 같은 상황에 다른 중압감을 껴안고 되풀이된다.
물론 소년은 그 후에도 스케이드 보드를 타고 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거듭되는 기억으로부터 달아나듯 현실을 전전해야 할 것이다. 고뇌의 무게감은 줄어들지라도 소년은 그렇게 기억의 공명 안에서 삶을 지속해야 한다. 그것은 후회라는 단어로는 충족될 수 없는 삶의 무게감. 결국 소년이 꿈꾸던 파라노이드 파크의 이상은 현실의 무게감을 덧씌운 채 소년의 세계를 상실시킨다. 기억을 태워버리고 현실의 무게감에서 달아났지만 그 순간, 더 이상 소년은 자신의 현실이 예전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파라노이드 파크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소년은 자라나고 삶의 기억은 오늘에서 어제로 서서히 흘러간다.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우리는 어떤 시절로부터 서서히 떠밀려 여기까지 왔다. 파라노이드 파크로부터 우리 삶은 그렇게 멀어져 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