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파이어>는 혁명이나 테러라는 단어를 연상할 수밖에 없는 영화지만 혁명에 관한 영화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어떤 시절이나 인물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가깝다. 여성의 인권이 길바닥의 깡통 같았던 19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둔 이 영화는 페미니즘적인 가치관으로 무장한 소녀들이 혈기를 발판으로 한데 뭉쳐 조직으로 거듭나고 점차 세를 규합하다 파국으로 닿는 과정을 그린다. 소녀들의 반시대적인 연대가 공격적인 행위로 나아가는 과정은 장악력 있는 교주 아래 모인 신도들의 맹신처럼 자라고, 근본주의적인 집단의 폭력적 특성과 유사하게 닮아간다.
결과적으로 그건 혁명이라기 보단 실패한 혁명이란 이름으로 뭉뚱그려지는 집단적 과격함과 닮아있다. 연대하고 규합하다 분열하고 해체되는, 뜨거운 혈기가 식고 난 이후 남겨진 치기가 분열하는 흔한 과정. 그 끝에 다다르면 그 과정의 입구를 만들었던 결기나 의미는 변질되고 퇴색된지 오래일 뿐. 그리고 <폭스파이어>는 변화와 지속의 틈새에서도 살아남는 기억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 분열과 해체의 끝에서 그 기억과 경험을 공유한 이들은 그 시절을 여운처럼 간직하거나 치부처럼 밀어낸다. 그리고 그 중 누군가는 놀랍도록 일관성을 유지하며 자신의 삶을 더욱 거대한 담론처럼 키운 존재의 흔적을 드러내고 발견하게 만들며 기억을 되짚도록 요구한다.
일찍이 <클래스>로 교실 안에서 벌어지는 선생과 아이들의 논쟁을 통해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통제와 억압을 훈육하려는 교육의 속살을 들춘 감독 로랑 캉테는 보다 폭력적인 시대적 풍경을 제시하고 그 안에 놓인 소녀들의 저항을 유쾌하게 길어 올린 뒤 아찔하게 떨어뜨린다. 그리고 <폭스파이어>는 그것이 허무했다거나 어리석었다고 회고하는 대신 그럼에도 결국 남겨진 삶을 비춘다. 강렬했던 기억이 머물렀던 시간 이후, 그들이 기억하는 것을 살피고 함께 지켜보게 만든다. 당신의 치기나 혈기는 그 시절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어쩌면 격려한다. 그 모든 과정 이후로 어찌됐건 살아가고 있음에 대한, 그리고 누군가는 일관된 삶의 태도로 그 시절에 품었던 가치관을 그대로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살아남는다는 건 결국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의 시대를 보존하는 길이다. 누군가의 기억이란 시대에 대한 증명이니까. 책임도, 의무도 아닌, 그냥 삶이 그렇다. 그래서 그 삶의 끝은 결국 시대의 끝이다. <폭스파이어>는 한 시대의 끝은 결국 당신의 삶에 달려있다고 말하는 그런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