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옮겼다. 20대 직원이 많은 회사였다. 낯설었다. 한편으론 흥미로웠다. 하지만
확실한 각오는 필요했다. 나잇값을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배 나온 아저씨도 되지 말자는 것.
지금까지 9년 동안 기자라는 직업으로 밥벌이를 해왔다. 기자들은 타업종에 비해 이직률이 높은 직업이다. 한달 전에 이직한
지금의 회사는 네 번째 직장이다. 여전히 기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누군가는 나를 팀장이라고 부른다. 기존에 다녔던 회사와는 분위기도 사뭇 다르다. 물론 회사마다 환경이
다르고 문화도 다른 것이 당연하겠지만 사실 이런 회사는 처음이다. 사원 모두에게 동등한 존중심을 당부하는데
이를 테면 지위를 막론하고 모든 직원이 마주쳤을 때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나누고 이름 끝에 ‘님’이라는 호칭을 붙이길 권한다. 아무래도 굉장히 젊은 직원이 많아서인지 기존에 몸담았던 회사들과 정서적인 온도차가 존재한다. 회사 구성원의 과반수 이상이 20대다. 확실히 젊고 발랄하다. 20대 구성원의 수가 많은 만큼 그들의 정서가
사무실의 분위기를 지배한다. 모바일 앱 기반의 플랫폼에서 콘텐츠를 제작하고 기획하는 회사인데, 기술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스마트폰에 보다 친밀한 20대가 자연스럽게
주된 역할을 하고 있다.
사무실에 앉아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틀어놓은 노동요를 듣게 된다. 대부분
아이돌 노래부터 힙합, EDM 등 요즘 유행하는 음악들이다. 주도하는
이가 누군지는 몰라도 누군가가 틀면 다들 자연스럽게 듣게 되는 분위기다. 사무실의 그 누구도 이런 분위기를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조용한 분위기를 선호하는 편이지만 딱히 거부감을 느낀 건 아니다. 단지 필연적으로 생소했을 뿐이다.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니까. 이전까지 근무했던 회사들의 사무실 분위기가 경직된 수준까진 아니었다 해도 이렇게까지 자유분방한 건 아니었으니까. 물론 이것이 20대가 많아서라고 정의할 수 있는 기준이라 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누군가의 눈치를 본다기보단 전체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젊은 세대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확연히 살아난다는 건 확실하다. 다만 내 입장에선 어쩔
수 없이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생소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불편함보단 낯섦에 가까운.
극복할 수 없는 세대차가 두드러지는 순간도 적지 않다. 한번은 회의
중에 “여자친구가 인기가 많아요”는 말을 들었다. 의아한 마음으로 “여자친구 인기가 대체 누구에게 많다는 거죠?”라고 물었다. 다들 ‘까르르’ 웃었다. 정말, 까르르. 요즘 인기 몰이 중인 걸그룹 이름이라고 했다. 여자친구가. 하하하. 학창시절에 젝키가 홍콩사람이냐고 물었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그렇게 또 하루 멀어져 간다는 것이 명확히 느껴질 날이 적지 않다. 상대적으로
어린 20대 팀원들과 직장 동료들이 즐비한 사무실에선 말조심할 필요가 있다. 노땅 취급 받지 않으려면. 물론 내게 요즘 잘 나가는 아이돌 그룹의
이름을 숙지할만한 열정은 식은지 오래다. 그리고 그것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는 것 같다. 나잇값을 제대로 하는 일이다.
최근 이직 후 처음으로 몇몇 직원들이 주최한 술자리에 초빙(?)됐다. 그 자리에서 10살 가까이 혹은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20대 직원 몇 사람과 차례로 대화를 나눴는데 그들은 내가 해왔던 일에 대한 궁금증을 묻기도 했고, 나에 대한 모종의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들 중엔 일반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른 나이에 무언가를 구상해서 사회로 진입한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의미에선 내가 이루지
못한, 앞으로도 결코 이룰 수 없는 무언가를 이룬 셈이었다. 하지만
경험이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인지라 그들에겐 나이와 비례하게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많았다. 10살 이상
차이가 나는 어린 회사 동료에게 나는 팀장이라는 직책을 넘어서 어른이었다. 팀장이란 지위보단 나이가, 경험이 더 많은 형이자 선배였다. 그래서 ‘어떤 상사가 될 것인가’라는 고민보다도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라는 고민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졌다.
내가 회사에서 보낸 20대 시절이 있었듯이 지금의 회사엔 20대 시절을 보내고 있는 직원들이 있다. 그들을 대면할 때면 종종
‘나의 20대는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내가 결코 닮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몇몇 얼굴을 떠올린다. ‘지금 나는 이들에게 어떤 30대일까? 어떤 선배일까?’ 그렇다. 누군가를
이끌고 동기부여를 줘야 하는 입장에 섰다는 건 당연하면서도 때론 당혹스러운 일이 된다. 누군가를 존중하는
것만큼이나 누군가에게 존중 받는 게 중요하다는 건 그 입장이 돼봐야 안다. 나이를 허투루 먹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권위만 내세우면
되레 권위는 손쉽게 허물어진다. 그저 회식 1차 자리에서
당장 꺼져줬으면 하는 꼰대로 전락할 뿐이다. 지혜와 품위가 있는 어른으로서 튼튼한 권위를 건축해야 한다.
그 비결이 아이돌 이름을 외우는 것은 아닐 게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인정하면 된다. 그리고 대화에, 그들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섣불리 조언하고 충고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 그들이
내게 조언을 구하고, 충고를 원할 때가 아니라면 말이다. 대화를
주도해야 하는 입장이라 착각해서도 안 된다. 내가 그들에게 느끼는 이질감만큼이나 그들 또한 내게 이질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그만큼 동등한 호기심을 품기 마련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며칠 전에 가졌던 술자리에서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한 20대 직원은 내게 셔츠핏이 좋다며 칭찬을 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더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배 나온 아저씨가 되지 말자’는 다짐을 추가했다. ‘최선을
다해서 꼰대가 되지 말자’는 다짐 옆에.
(GRAZIA KOREA SEPTEMBER FIRST ISSUE 2015 'GRAZIA COLUMN')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정말 그것이 어찌할 수 없어서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찌할 수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말이기도 하다. 다수의 편견과 고정관념은 때때로 전체적인 관습처럼 오용되어 개인의 특수한 취향을 제한하고 보편적 권리마저 포기하게 만드는 강압으로 작동한다. <날아라 펭귄>은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폭력들을 드라마투르기로 엮어낸 작품이다. 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4번째 영화 <날아라 펭귄>은 다양한 감독들의 옴니버스로 구성된 시선 시리즈들과 달리 임순례 감독에게 전권을 위임한 첫 번째 장편 인권위 영화이기도 하다.
교육열이 대단한 엄마(문소리)덕분에 과도한 스케줄에 시달리는 아들 승윤이(안도규)는 자상한 아빠(박원상)를 통해 종종 출구를 찾는다. 구청에서 일하는 엄마의 직장에선 고기도 먹지 않고 술도 못 마시는 신입사원 이주훈(최규환)이 들어와 상사들의 공분을 산다. 그런 부하직원들을 아래에 둔 권과장(손병호)은 외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난 자식들과 이를 돌보기 위해 함께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기러기 아빠다. 그리고 황혼에 접어든 권과장의 아버지 권선생(박인환)은 뒤늦게 제 삶을 찾겠다는 아내 송여사(정혜선)의 선언에 분개한다.
<날아라 펭귄>은 가정에서 사회까지, 대한민국이라는 지정학 내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크고 작은 가치관의 불협화음을 전시하는 동시에 개인적 범위의 삶을 옥죄면서도 무분별하게 방치된 부조리를 들춘다. 영어교육열풍 속에서 지나친 학습량을 요구당하는 초등학생 아이와 이를 강요할 수 밖에 없는 엄마의 고단함, 자녀의 교육 때문에 아내마저 외국에 보내고 홀로 국내에 남아 뒷바라지를 하는 아빠의 고독은 이 땅에서 무분별하게 방치되는 개인들의 비극이나 다름없다. 삼겹살과 소주 회식에 어울리지 못하는 신입사원의 식성을 다수의 취향에 반한다며 비정상적 존재라 치부하거나 반평생을 순종하는 아내로서 살아오길 강요했던 남편이 뒤늦게 제 삶을 즐기겠다는 아내의 변화에 발끈하는 풍경 역시 부조리한 관습 안에서 주도권을 차지했던 이들의 폭력적 관성이다.
<날아라 펭귄>은 에피소드로 분절된 시선 시리즈와 달리 장편으로 제작됐지만 사실상 4개의 단편 에피소드를 유기적으로 이어 붙이듯 구성됐다는 점에서 전작들과 유사한 형태를 감지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일관된 관점을 유지시키며 에피소드를 나열함으로써 주제의식을 진전시킨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이루는 기본적인 조직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관행들을 열거하고 문제의식을 축적해나간다. 하지만 <날아라 펭귄>은 날을 세운 주장보단 유연한 드라마로서 문제의식을 아우른다.
가정과 직장의 형태를 그대로 반영한 영화의 풍경은 일차원적인 실생활의 단면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분히 현실적이다. 동시에 그 풍경 속에서 발견되는 사건들은 평면적으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직설적인 화법으로 문제의식을 관통하되 유연한 드라마로 극적 흥미를 돋운다. 다만 지나치게 현실성을 반영한 플롯을 나열하는 <날아라 펭귄>이 기존의 시선 시리즈에 비해 창의성이 떨어지는 평면적 기획이라 이해된다는 점은 아쉬움을 부르는 측면이다. 하지만 보다 선명한 현실적 문제의식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날아라 펭귄>의 성과는 분명하다.
사실 <날아라 펭귄>을 통해 드러나는 모든 문제들은 사회가 개인들의 불행을 방치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엄마가 아들의 영어교육에 고단할 정도로 관심을 쏟아야 하고 자식들과 아내를 외국으로 보내며 홀로 고독한 생활을 감당하는 아빠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사회가 개인들에게 그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요구하는 까닭이다. 영어교육을 우선시할 수 밖에 없는 엄마의 입장과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빠의 반목은 개개인의 문제에서 비롯된 결과적 불행이라기 보단 사회적 시스템이 이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해주지 않고 개인의 몫으로 방치하는 데서 비롯되는 문제다.
암묵적인 규율처럼 굳어진 집단적 논리는 개인의 권리와 취향을 손쉽게 무시하고 억압한다. 이런 부조리한 조직적 풍토는 사회 전반적인 조직 문화를 장악하고 개개인의 스트레스를 축적한다. 전체라는 이름으로 의무화된 조직적 강압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발언권을 축소시킨다. 소주 한잔 못하거나 2차 회식에 동참하지 않는 이를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몰락시킨다. 개인의 선택권을 전체라는 이름 아래 무시하는 풍토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풍경이다. 하위 일방적인 명령체계로 위계질서를 강화하고 업무적인 창의성마저 떨어뜨린다. 결국 이는 잠재적인 충돌과 갈등 자체를 무마시키고 조직의 부조리를 더욱 강권하게 다져나간다는 점에서 보다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사회 전반적인 스트레스를 심화시키면서 개개인의 행복을 억압한다.
비극으로부터 개개인을 구출하는 방법이란 개개인들의 성찰과 변화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시스템의 변화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개별적인 숙성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작은 변화들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사회적 풍토의 변화를 통해 큰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날아라 펭귄>은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불행이 무엇에서 야기되는가를 드러내는 영화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에피소드의 형태들은 문제의식을 떨어뜨리지 않는 동시에 그 현상들을 목격할 수 있는 끈기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날아라 펭귄>은 분명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다. 개개인을 불행한 일상에 방치하는 사회적 부조리를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자포자기한 채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보다 나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아주 작은 변화를 통해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 그리고 <날아라 펭귄>은 그 작은 행복을 위해 가능한 변화들을 말하는 영화다. 지금 우리가 꼭 인지해야 할 가능한 변화들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