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스위프트의 동명 고전 소설을 현대적으로 리메이크한 <걸리버 여행기>는 어쩌면 그 원작과 유사한 평행우주라고 해도 좋은 작품이다. 다만 우연히도 과거 스위프트의 그 걸리버와 다른 시대를 사는, 현대의 또 다른 걸리버(잭 블랙)가 그와 다른 소인국으로 통할 수 있는 경로 안으로 휩쓸려 들어간 결과물이 바로 이 <걸리버 여행기>(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들은 일종의 사족이며 낭비다. 결코 심각해질 수도, 심각해질 필요도 없는 이 작품의 태도 앞에서는 말이다.
제목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원작과 마찬가지로 소인국으로 간 걸리버의 경험을 담은 것이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이 <걸리버 여행기>의 목표다. 물론 인간 세계에 관한 혐오적 풍자를 가득 담아낸 조나단 스위프트의 의도는 논외다. 단지 소인국으로 간 현실의 인간이 겪는 좌충우돌 그 자체를 전시하는 것이, 그리고 이를 통해 관객의 흥미를 돋우는 것이 이 영화의 확실한 목표지점인 셈이다. 물론 이 영화의 핵심적인 묘미는 거인 ‘잭 블랙’의 위트 있는 활약상을 지켜보는 것 그 자체일 것이다. 단지 그 익살스러운 표정만으로도 웃음을 자아내는 잭 블랙은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화의 러닝 타임은 87분, 이는 곧 이 영화가 딱히 많은 이야기를 할만한 여력이 없는 작품임을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단점이 아니다. 어떤 아이디어에서, 구체적으로 현대판 ‘걸리버 여행기’를 만들어보자는 발상에서 출발한 이 영화의 두 번째 스텝은 그 발상을 현실로 착상시키기 위해 기본적인 요소들을 채워 넣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자신의 번뜩이는 아이디어 이상의 탁월한 이야기를 설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인상적일 수 없는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가장 현명한 선택은 최대한 짧은 러닝 타임을 할애하는 것이니까.
그런 이해에도 불구하고 <걸리버 여행기>가 너무도 손쉽게 모든 상황들을 굴려 보내고 있다는 건 결코 간과하기 어렵다. 이르시니 행하노라, 라는 식이다. 소인국의 인물들은 말만 하면 무엇이든 이뤄내는 만능 재주꾼들이며 그들의 현실을 두르고 있는 모든 환경들을 고려할 때 결코 이뤄질 수 없을 것까지 완성하고 마는 놀라운 재주를 지닌 이들임에 틀림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유치한 지적이다. <걸리버 여행기>는 딱히 상식적인 상황을 마련하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영화다. 그냥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거듭 나열하면서 그 어이없음을 자신의 영화적 태도로 치장해내는, 장난스런 결과물에 가깝다. 마치 정색하면 지는 게임에 가깝다고 할까.
영화에서 등장하는 몇 가지 아이디어들은 어떤 영화의 기시감을 부르기도 하는데, 그건 바로 <걸리버 여행기>를 연출한 롭 레터맨의 전작인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몬스터 vs 에이리언>이다. 갑자기 거인이 된 탓에 괴물로 취급당하는 여성이 거대 로봇을 조종하며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을 막아선다는 이 애니메이션의 설정은 실사영화인 <걸리버 여행기>와 상당 부분 유사한 지점이 있다. 심지어 외계인이 조종하는 로봇의 디자인마저도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소인국의 로봇과 유사하다. 이런 기시감들은 이 영화가 그만큼 창의적이지 않은 결과물임을 증명하는 또 다른 단서들이다. 동일한 감독이 만든 두 작품은 애니메이션과 실사의 차이를 제외하면 일종의 동어반복에 가깝다.
그러니 거기까지, <걸리버 여행기>는 잘못 만든 영화가 아니라, 애초에 잘 만들 의도가 없었던 영화다. 좀 심한 말인가. 다시 말하자면 <걸리버 여행기>는 그럴 듯한 아이디어 하나를 살리기 위해 수많은 허풍들이 동원된 영화일 뿐이다. 이 영화에서 인물의 성장에 관한 교훈이나 감동은 그저 영화적 구색을 맞추기 위해 마련된 소품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소품이다. 이야기가 유치하다고, 스토리가 엉성하다고, 이 영화의 단점에 대해서 나열하는 것 자체가 쓸모 없는 짓이다. 거대한 잭 블랙이 펼치는 우스꽝스러운 몇몇 장면에 폭소하거나, 그의 애드립에 감탄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말 그대로 지금까지 당신이 읽은 이 리뷰 자체가 일종의 에너지 낭비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