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인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끔찍한 행위다. 전쟁은 이념이나 명분을 통해 시작되지만 정작 전장 한가운데서 그 모든 언어는 파기된다. 단지 살아남기 위한 살육과 파괴가 거듭될 뿐이다. 시간의 인력 안에서 기억들은 끌려나가듯 지워지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들이 있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을 기억하게 만든다. 다만 명심하라. 우리가 보는 전쟁은 우리의 현실에서 결코 추억이 될 수 없음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전쟁은 가치관의 대립으로 시작되나 그 끝은 가치관의 증명과 무관하다. 그저 남겨지는 건 파괴된 풍경과 심정에 대한 각인 뿐.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시대적 광풍에 스러져가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어느 개인들을 조명한다. 영국의 침략으로 얼룩진 아일랜드 근대사 속에 놓인 두 형제는 총을 들고 외세에 맞서지만 그들에게 남겨지는 건 독립의 영광 대신 예기치 못한 불화와 갈등의 흔적이다. 바람에 스러져 눕는 보리이삭처럼 세계의 광풍에 흩날리듯 살아가야 했던 형제는 밀알을 꿈꾸며 세월을 견딘다. 공정한 정치관에 뿌리를 둔 켄 로치의 사실주의적인 시선은 역사를 관통하며 심중한 답변을 남긴다. “무엇에 반대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쉽지만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다.” 전쟁은 세계를 흔들고, 이념 앞에서 인간은 덧없이 흔들리지만 끝내 다시 일어나 이 세계를 채운다.
<피아니스트>
자,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피아노 연주가다. 그는 지금 건반 앞에 앉아있다. 하지만 건반 위에 놓인 손가락에는 연주자의 품위가 뻗어내린 대신 절박한 생의 갈망이 흘러내린다. 그는 유대인이다. 그를 지켜보는 건 한 단어로 그의 생사를 가로지를 독일군 장교다. 동료도, 친구도, 모두 한줌의 재가 됐다. 하지만 그는 살아서 연주한다. 살아남아서 연주하길 원한다. 그는 마치 벼랑에 매달리듯 열 개의 손가락을 들어 건반을 누르고 흐느끼듯 선율을 울려낸다. 인류 역사상 야만의 계절이었다 말해도 좋을 홀로코스트 한가운데서 살아남은 어느 피아니스트의 자전적 삶을 스크린에 옮긴 로만 폴란스키는 눈물의 위로 대신 냉정한 눈빛으로 시대를 응시한다. 유대인들은 죽었지만 피아니스트는 살아남았다. 인간 자체로서 생을 존중 받을 수 없었던 시절에 대한, 참혹하고도 슬픈 기억을 선율로 기록한다.
<지상최대의 작전>
“적이 상륙하면 우리에게나 적에게나 그 날이 가장 긴 하루가 될 것이다.” ‘사막의 여우’라 불리던 독일의 백전노장 롬멜의 예언처럼 그 날은 길고도 길었다. 나치의 수하에 들어간 유럽을 탈환하기 위해 북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작전을 펼친 연합군과 독일군 사이에 벌어진 만 하루 동안의 전투를 스크린에 옮겨 담은 <지상최대의 작전>은 기록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흑백필름을 통한 사실적인 고증과 전투 자체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통해 전쟁영화로서 한 획을 그은 고전이다. 전쟁 블록버스터의 아버지라 불려도 좋을 만큼 당시로서는 대단한 자본력을 동원해 완성된 작품이자 시네마스코프로 촬영된 상륙신은 전투신의 교과서적 연출로서 지금도 회자될만큼 유효한 장면이다. 물론 체험적 쾌감보다는 전투를 앞둔 병사들이 향수에 젖은 표정으로 되뇌는 추억이 아픈 시절을 대변하고 있음을 간과하거나 망각하지 말 것.
<작은 연못>
하늘은 푸르렀고, 태양은 빛났지만, 땅은 피로 물들었다. 작은 마을에 모여 평화롭게 살아가던 대문바위골 사람들은 미군들의 강압적인 요구에 짐을 싸서 남으로 피난을 떠난다. 그리고 노근리에서 그들은 지옥보다도 끔찍한 현실에 대면하게 된다. 빗발치는 총알과 거대한 포탄이 선한 양처럼 끔뻑거리던 양민들의 몸에 떨어지고 박힐 때,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바라볼 때, 죽은 역사는 다시 한번 살아서 꿈틀댄다. 적층되는 시간 속에서 매몰되지 않도록 끝없이 환기시켜야 할 역사가 있다. <작은 연못>은 격동적인 한국의 근대사 가운데 덧없이 회자되다 희미해진 ‘노근리 사건’에 대한 기록적 재현이다. 8년간의 끈질긴 제작기간을 통해 60년 만에 빛을 본 진실을 마주 한 당신의 가슴이 뜨거워진다면 아마 당신의 피도 붉은 색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그 붉은 진실을 가슴으로 기억하라.
<아버지의 깃발> &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전쟁은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가, 가 아닌 무엇에 의해서 싸우는가, 의 아비규환.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친’ 젊은 용사들의 피는 과연 오늘날 어떤 의미로서 전해지는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바로 그 전장에서 마주 보며 서로를 겨누던 양진영의 젊은이들을 나란히 비추며 그들의 심상을 묵묵히 예우한다.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거울과 같은 영화다. 이오지마에 상륙한 미군과 이를 저지하는 일본군을 제각각의 위치에서 바라본 두 영화는 전쟁이란 것이 인간을 얼마나 혹독하게 몰아세우는지 적나라하게 들춘다. 생애 처음으로 마주 선 양국의 젊은이는 서로를 향해 총을 겨냥하고 칼을 휘두르며 짧은 인연을 나눈다. 그렇게 젊은 영혼이 저물 때 헛된 명예만이 드높게 펄럭인다. 거짓 같은 명예를 두르고 죽어간 청년들을 위한 진심 어린 추도란 이런 것이다.
<허트로커>
올해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석권하며 명실공히 최고의 영화로 등극한 <허트로커>는 ‘포스트 9.11’의 최전선에 놓인 작품이다. ‘9.11 테러’로부터 8년, ‘이라크 전쟁’으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과 중동의 대립각은 여전히 뾰족하게 날을 세우고 있다. 이라크 현지에서 폭발물을 제거하는 EOD대원들의 활약을 비추는 카메라는 거친 핸드헬드 영상을 통해 도처에 웅크린 의심스런 징후들을 스크린에 수집하며 당장이라도 터져나갈 듯한 긴장감을 응축해낸다. <허트로커>의 현장감은 생생한 체험의 쾌감을 넘어서 그 현장의 중심에 내던져진 것과 같은 통증을 야기시킨다. 끝없는 자기 암시를 통해 매일 같이 직면하는 죽음에 맞서며 공포를 망각하는 이들은 결국 그 생존게임에 중독되어 살아있는 시체처럼 화약고와 같은 대지를 전전한다. <허트로커>가 재현하는 것은 전쟁이라는 통증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