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리는 이렇다. '필요 이상의 돈이나 물건을 쓰거나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함.' 그런 의미에서 재벌가의 딸이 기백만원, 기천만원짜리 옷을 입고 다니는 건 물질적인 개념에서 사치가 아닐 수 있다. 돈이 이마에서 튀는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뭔들 못하겠어. 세상을 멸망시키는데 돈지랄하는 게 아니라면야 있는 이들의 소비수준을 사치라고 말하는 입은 결국 무색해지기 마련이다. 쓸 수 있어서 쓰는 건 죄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재벌 2세가 누리는 화려한 생활이 마땅한 소비이고 정당한 권리인가라는 물음에 닿았을 때 문제의식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상그룹이라는 재벌가의 딸인 임세령이 몸에 걸친 의류의 가격대를 듣고 혀를 찰 것이다. 관련 기사를 써대는 찌라시들이 즐비한 것도 그런 반응을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임세령이라는 사람이 대체 누구이길래, 저런 자격을 갖추고 있단 말인가'라는 의문은 '그의 아버지가 그룹 회장이기 때문에'라는 '은수저 물고 태어난 아이'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임세령의 소비는 정당하다. 하지만 그 소비를 손가락질하는 손의 심정도 이해한다. 돈이 있는 사람의 정당한 소비를 옹호하면서 그에 대한 질시의 여론을 무작정 비판하는 건 그저 손쉬운 일이다. 빈부 격차가 극대화되고, 부의 재분배가 가로막힌 사회에서 '재벌가의 손녀가 몇천만원 짜리 코트를 입는 게 잘못이야?'라고 일갈하는 건 그저 속편한 비판이다. 문제의 본질은 정당한 소비가 아니라 정당한 소비 이면에 자리한 부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에 있기 때문이다.

 

조현아의 땅콩 회항 사태가 생각 이상의 파장을 몰고 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평범한 사회 구성원이 돈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생각 이상으로 공격적이다. 재벌가라는 호화로운 장벽이 위태롭게 흔들리자 필사적으로 성문을 두들기고 고함을 지른다. 한국의 부자들은 대부분 부의 축재에 있어서 윤리적 의심을 피해갈 수 없다. 대부분이 부동산 투기와 원자재의 독점 매입을 통한 이윤 창출을 통해서 지금의 부를 축적했고, 독재 정권의 슬하에서 노동의 착취를 보장 받으며 더욱 비대해졌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는 건 일찌감치 짓눌렸고, 여전히 신음하고 있다. 게다가 나날이 상승하는 사회적 비용을 방관하는 정치적 세력들은 빈부 격차에 계급성을 부여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임세령을 향한 손가락의 저변엔 비윤리적 축재의 역사가 존재한다. 부자가 의심 받는 사회라니, 얼마나 불행한가.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열광하는 사회의 저변엔 가난한 다수의 불만이 도화선처럼 깔려 있다. 게다가 임세령과 같은 재벌가의 후예들을 손가락질하는 대상들은 가진 것 없이 증오까지 끌어안고 있다. 결국 그 손가락들은 정작 자신들이 손가락질하는 대상보다 가까운 주변의 손가락들과 부딪혀 싸우거나 기형적인 집단 논리로 번져나갈 것이다. 사회적인 갈등을 야기시키는 건 결국 부의 대물림을 손쉽게 허하고, 빈부 격차의 확대를 방관하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에서 비롯된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으면 억울해지는 사회란 얼마나 불행한가. 그 불행이 개개인의 무지 탓이라고 몰아가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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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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