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를 보내주기 위해 김포로 가야 했다. 화장을 하기로 했다. 토요일에 떠난 하늘이를 보내주기 위한 일요일이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지막을 지켜줄 수 있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데 하늘이 너무 맑고 예뻤다. 하늘이 너무 맑고 예뻐서 마음이 미어졌다.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았다. 눈가를 불로 지져서 눈물샘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하늘이가 담긴 상자를 안고 탄 택시 앞좌석에서 바라보이는 하늘은 너무 맑고 예뻤다. 뒷좌석에 앉은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나는 어머니가 들을까 겁이나 소리를 죽이고 마음 속으로 흐느꼈다. 눈물을 닦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하늘은 계속 맑고 예뻤다. 군데군데 뭉게구름이 하얀 털 같아서 하늘이 생각이 많이 났다. 그래서 조금 울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하늘이는 기적 같은 아이였다. 하늘이는 태어나고 3개월이 지나 어미의 젖을 뗀 후 우리집으로 왔다. 그리고 몇 개월 뒤, 하늘이가 심장에 기형 증상이 있다는 걸 알았다. 어떤 수의사도 같은 말을 했다. 이 아이는 언제든 죽어도 이상할리 없는 아이라고. 그 말을 듣고 마음 한구석이 새까매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하늘이가 집에서 다다다 뛰어다닐 때면 뒤를 쫓아다녔다. 뛰지 못하게 잡기 위해서. 하늘이는 신나서 심장이 뛰었고, 나는 놀라서 심장이 뛰었다. 하지만 하늘이는 생각보다 씩씩하게 잘 자랐고, 생각보다 건강했다. 지난해 혈액암 선고를 받을 때는 세상이 원망스러웠지만 하늘이가 죽을 거란 선고 앞에서도 나는 내가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항암치료를 받으며 털이 빠지고, 지쳐가는 하늘이를 볼 땐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마음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지만 그 이후로 건강하게 잘 견뎌내는 하늘이를 보면서 나는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하늘이는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지 않았다. 어머니께선 잠이 든 하늘이가 당최 일어나지 않아 깨우다가 비로소 하늘이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았다며, 하늘이가 너무 착한 아이라고 우셨다. 어머니는 하늘이를 키우기 전까진 집에서 동물을 키울 생각을 해본 적도 없는 분이셨다. 하늘이는 기적이었다. 언제든 죽어도 상관 없을 것이라 했던 하늘이가 9년 동안 우리 가족의 곁을 지켰고, 어머니도, 나도, 겪을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을 전하고 떠났다. 정말 기적 같은 아이였다.
화장장에 도착했다. 상자에 갇혀 있던 하늘이를 다시 꺼내 눕혔다. 몸이 차가웠다. 온기가 없었다. 나는 울었다. 이 몸이 다시 따뜻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서글퍼서 울었다. 어머니는 마치 자식을 보내듯이 오열했다.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나도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그저 하늘이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흐느끼는 것밖에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았다. 슬펐다. 이렇게 슬플 수가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나는 너무 슬펐다. 하늘이를 화장하러 보내는 순간에 두 손을 쥐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가슴 한 구석이 타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내 마음 속에서도 하늘이를 태우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께서는 하늘이의 몸을 어루만지며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꼭 좋은 곳으로 가길 바란다고 비셨다. 처음엔 같이 화장터에 가는 것을 누나가 반대했다. 하지만 나는 같이 가야겠다고 말했다. 누나는 아마 어머니를 걱정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도 어머니를 걱정했다. 어머니께선 하루라도 더 하늘이와 있고 싶어하시는 것 같았다. 하루라도 빨리 잊는 것보다도 하루라도 더 있고 싶다는 마음이 더 중요한 일 같았다. 아니, 간절했다. 내가 그랬기 때문에. 실제로 하늘이가 화장되는 걸 보며 마음이 미어졌다. 그렇게 마음이 문드러져 사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보지 못했다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거라 생각했다. 하늘이 덕분에 나는 웃고, 이제는 운다. 그 기쁨과 슬픔을 함께한 하늘이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몸에 대한 기억을 마음으로 담았다.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너를 당장 볼 수 없게 됐다는 슬픔이 너무 짙어서 견딜 수 없지만 언젠가는 너는 다시 내게 기쁨으로 기억할 것이다. 나는 오늘 그걸 알았다.
어머니께선 하늘이의 유골이 이렇게 적다는 게 믿을 수 없다는 듯 속상해하셨다. 타고 남은 하늘이의 유골은 하얗고 작았다. 그 앙상해진 하늘이 앞에서 나는 강의 건너편에 선 하늘이를 생각했다. 화장장에선 추가 요금을 내면 유골을 돌로 만들어 준다고 했다. 어머니께서 받고 싶어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돌이 된 하늘이의 유골은 하얗고 투명했다. 어머니께선 하늘이가 착해서 이렇다고 하셨다. 평소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질색했을 테지만 오늘의 나는 그냥 그 말을 믿었다. 하늘이는 정말 착한 아이였으니까. 그랬다. 정말. 하늘이는 죽어서도 우리에게 기쁨을 남겼다. 모든 유골을 돌로 만들진 않았다. 나는 하늘이의 유골을 우리 집 가까이에 있는 공원에 뿌려주고 싶었다. 나는 항상 그 공원을 보면서 하늘이가 여기서 산책을 하면 정말 좋아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 집에 있는 하늘이를 우리 집까지 데려오진 못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됐다. 그래서 나는 하늘이의 유골을 일부나마 그 공원에 묻어주고 싶었다. 어머니께선 그러자고 하셨다. 우린 가루와 돌로 변한 하늘이를 안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하늘은 여전히 너무 맑고 예뻤다. 어머니는 어쩌면 이렇게 날씨도 좋을 수 있냐며 하늘이가 정말 착한 아이라고 하셨다. 나는 역시 그렇다고 믿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집 앞에서 어머니와 누나와 아내와 함께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 우린 끊임없이 하늘이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모여서 식사를 한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하늘이가 죽어서 우리 가족을 한 식탁에 앉혔다. 하늘이가 죽어서도 우리 가족을 위해 애쓴다고 생각했다. 우린 하늘이의 유골을 서울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공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전망 좋은 곳에 뿌렸다. 어머니께선 유골이 너무 적다고 속상해하셨다. 그러면서도 하늘이에게 마음껏 뛰어 놀라고, 잘 가라고 말씀하셨다. 나도 하늘이에게 비로소 잘 가라는 인사를 했다.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많이 생각날 것이다. 벌써 너무 그립다. 하지만 나는 하늘이를 생각하며 나의 행복했던 시절을 되뇔 수 있다는 걸 믿게 됐다. 네가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하늘아. 언젠가 너를 다시 보게 된다면 꼭 안아줄게. 하늘아. 안녕. 잘 지내. 하늘아. 건강하게.
여성을 특정한 폭력적 범죄를 두고 페미니즘 논쟁을 벌인다는 건 예비군 훈련 사격장에서 3사로에 누워 있던 격발자가 4사로 과녁의 한 가운데를 보기 좋게 관통하는 것과 같다. 페미니즘 논쟁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다. 다만 여성 범죄는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해석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제도적 예방을 요구하는 것이 보다 현명하고 옳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이미 여자는 남자보다 약자다. 그리고 어떤 사회든 당연히 약자를 보호하는 제도적 안전망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것이 옳다. 복지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하지만 여성 특정 범죄에 대한 해법에 페미니즘 논쟁으로 접근하면 너무나 당연한 공적 환기가 희한한 방식으로 붕괴된다. 여성과 남성의 대립 구도로서, 개인과 개인의 갈등으로 손쉽게 사유화시킴으로서 제도적 권태에 대한 지적을 자연스럽게 무마시켜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기엔 너무 심각한 일 아닌가. 심지어 세금도 더럽게 많이 내고 있는데.
동성애자에게 딱히 관심은 없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내가 옆집 아줌마의 삶에 관심이 없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내가 동성애자가 아니므로 나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물론 호기심을 느낄 수는 있겠다. 그 역시 내가 옆집 아줌마의 삶에 호기심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란 전제와 유사한 것이다.
어쨌든 예전에도 몇 번 말한 적 있지만 동성애를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슈퍼에 가서 장을 보는 것에 대해서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 묻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왜 내가 남의 사생활에 대해서 지지하고, 반대하고, 이런 의견을 내야 하느냐는 말이다. 정말 지겨운 일이다. 결국 이런 불필요한 질문이 던져지는 배경엔 그런 타인의 삶을 겁박하고, 제한하는 존재들의 사상이 주류로 자리잡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내가 동성애자들에게 관심이 없음에도 동성애자들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는 건 그들이 오랫동안 차별의 대상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별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통해 나를 포함한 그 누군가 또한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모든 차별에 반대해야 하는 건 결국 내게 가해질 수 있는 차별에 대항하기 위함이고 그런 의식의 연대를 원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부조리에 관해 관심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관심이다. 당연한 관심이어야 한다.
어제 시청과 그 부근에서 퀴어 퍼레이드가 열렸다는데 정작 그 자리에서 더욱 주목을 받은 것은 퀴어 퍼레이드를 반대하는 종교 단체의 행사였다고 들었다. 퀴어 퍼레이드보다도 이를 반대한다고 시청에 나와서 북도 두들기고, 발레도 하고, 부채춤도 췄다는 이들의 보기 드문 꼴불견을 구경하지 못해서 뒤늦게 아쉽다. 어쨌든 나는 그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종교명에 대해서 적고 싶지 않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그들이 흔히 말하는 이단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몸소 실천하기 때문에 그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종교가 설득하고자 하는 사랑과 이타심의 교리를 잘 이행하는 이들에게 줄 불쾌감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그럴 자격도 없다.
어쨌든 수면 아래에 놓여 있던 차별의 증거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는 건 정말 건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행하던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 북소리와 발레와 부채춤이 어우러진 꼴불견과도 같은 것이었다는 걸 그들 스스로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은 수면 위로 드러나야 그 형체가 보다 명확해지기 마련이다. 혹시라도 내가 소설을 쓰게 된다거나 그 세계관에 흥미를 느낀다면 모를까, 나는 앞으로도 동성애자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질 생각이 없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랬으면 좋겠다. 차별이 희미해진 세상이 된다면 그렇게 될 것이므로. 어쨌든 변화의 조짐은 보이고, 변할 것이다. 세계는, 우리는.
잔혹동시의 문제는 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읽을 대상의 미성숙함을 고려하지 않은 채 게재됐다는 것이 문제의 본체다. 성인이 읽었을 땐 괜찮다. 성인에겐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문장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그건 폭력이다. 그것을 '아이가 쓴' 동시라고 이해할 순 있으나 '아이가 읽을' 동시라고 인정하는 건 곤란하다. 그렇다면 '19금'이란 기준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게 아니라면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만인을 위해 공중파에서 포르노를 틀어도 되겠지. 어른이라면 아이가 어떠한 것도 감당해낼 수 있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나이가 되기까지 눈높이를 맞춰서 지혜를 전하고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줘야 한다. 문제가 된 잔혹동시란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대로에서 벌거벗은 채 앞에 선 바바리맨을 만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글을 쓴 아이가 아니라 읽을 대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출판사의 태도를 지탄해야 한다. 그리고 그 동시를 쓴 아이를 손가락질하는 어른들이 있다면 스스로의 글러먹음을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이가 쓴' 동시엔 죄가 없다. 그 동시는 바로 그런 어른들의,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는 얕은 분노 같은 것으로부터 잉태된 것일 수 있으므로, 그 시의 모티프가 된 아이의 분노에 자궁 역할을 한 어른들의 반성이 절실하다. 그리고 '아이가 읽으라고' 그런 시를 출판한 출판사는 진짜 좆 잡고 반성할 필요가 있겠다. 정말 뭔 생각이었던 거냐.
코에 점이 있어서 점순이라 불렀던 어미랑 닮은 무늬를 지니고 있던 주먹만한 아이는 점점 어미에 가깝게 자랐다. 하지만 어미와 달리 언덕에서 올려다 보이는 좁은 난간으로 뛰어 오르지 못해 항상 난간 아래 조그마한 돌바닥에서 위를 올려다 보며 울곤 했다. 난간으로 올라와 밥을 먹지 못하는 새끼를 위해 생각해낸 것은 캔을 까서 포크로 잘라 투척하는 일이었다. 가끔씩 조준을 잘못해서 머리에 맞기도 하고 떼굴떼굴 굴러 떨어져서 새끼가 언덕 아래로 쫓아 내려갈 때마다 '아이고' 신음이 터져 나왔다. 캔만 먹을 수 있는 이 아이를 보고 깐돌이라 불렀다.
깐돌이가 보이지 않은 건 이제 그 흔적이 겨우내 밀려간 지난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나는 깐돌이에게 주기 위해 사놓은 캔이 겨울 내내 그 자리에 고스란히 쌓여 있는 것을 보며 종종 근심했다. 괜찮을까. 끊임 없이 찾아오는 깐돌이의 어미인 점순이를 보며 가끔 물었다. 네 아이 어디있니. 그 겨울이 지나는 동안 서서히 걱정도 묻혀 갔다. 가끔씩 더해가는 일상의 지층 어느 단면쯤에 있는 그 걱정을 더듬어 보기도 했지만 대부분 망각했고 떠올리지 않았지만 고양이밥을 줄 때마다 나는 아주 희미하게나마 그 아이를 생각했다. 잘 있으려나.
난간으로 뛰어올라온 아이를 보며 나는 별스럽지 않게 창가로 다가가 밥이 있나 확인했고 창을 열었다. 봄이네. 봄이 왔다. 그리고 점순이라 생각했던 그 아이를 빤히 보았다. 점순이가 아니었다. 미묘하게 다른 얼굴을 한참 보며 기억 아래 가라앉아 있던 이름 하나를 건져 올렸다. 너 깐돌이니? 나름 2년 정도 밥을 챙겨주다 보니 눈썰미가 생겼다. 그래도 실험을 하기로 했다. 점순이는 캔을 먹지 않는다. 그래서 캔을 까주기로 했다. 녀석은 주저하지 않고 캔을 먹었다. 창문 안으로 들어와 기웃거리기까지 했다. 물론 내가 어느 정도 안전한 거리를 보존해주는 한에서. 어쨌든 맞았다. 깐돌이였다.
녀석이 허겁지겁 밥을 먹는 사이 팔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거리쯤에 쪼그리고 앉아 이것저것을 물었다. 뭐했어? 더 줄까? 밥도 줄까? 그렇게 신이 났다가 난데 없이 눈물이 나서 흐느꼈다. 나는 어쩌다 보니 광장에 서있었다. 그 광장에서 자식을 잃은 채 돌아올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해 절규하는 어떤 어미 아비들을 떠올렸다. 눈물이 그치니 밑바닥에 쌓여 있던 화가 조금이나마 씻긴 기분이었다. 마치 나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아이였던 것마냥 고마웠다. 돌아와 줘서. 제법 잘 자라줘서.
깐돌이는 까준 캔을 잘 먹고 난간을 서성이다 창문 안을 잠시 기웃거린 뒤 사라졌다. 가끔은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는 위로를 자연으로부터 얻는다. 위로가 됐다. 4월의 봄은 다시 찾아왔고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다시 하게 됐다. 살아갈 것이다. 고양이캔도 주문할 것이다.
예전에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한 언론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을 때 이를 둘러싼 총체적인 매커니즘에 관해 취재해서 긴 기사를 썼던 적이 있다. 그때 당시 뒤늦게 마지막으로 강호순의 얼굴 공개에 탑승한 MBC 보도국 관계자로부터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언론 입장에서는 위법성보다도 기사로서의 의미가 관건이 될 수 있다. 불법적인 보도가 면책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법률적 판단과 무관하게 언론 입장에서 기사적 가치를 판단하고 보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JTBC <뉴스룸>이 성완종 회장의 발언이 담긴 녹음 파일을 공개한 것도 이런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결국 방송의 보도윤리란 일반적인 사회적 윤리와 완벽하게 동일한 궤에 놓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그것이 정보원의 엠바고를 무시할 수 있는 완벽한 논리일 순 없겠지만 알 권리를 바탕에 둔 보도윤리를 중점에 두고 보도방침을 해석하고, 결정하는 뉴스 관계자의 기류를 판단할 때 참고할만한 사항은 되겠다.
이번 사안이 향후 <뉴스룸>의 행보에 어떤 타격을 입힐지는 모르겠으나 <뉴스룸>이, 본질적으로 손석희가 십자가를 짊어질 수밖에 없는 국면이 된 건 확실해 보인다. 아마도 이런 판단을 내린 손석희도 잘 알고 결정한 사항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정말 멍청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렇다. 그럴 리는 없지 않은가. 그만큼 손석희는 녹음 파일 공개가 언론으로서의 직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건 손석희의 직업정신에서 나온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향하는 활시위가 될 것임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결국 중요한 건 <뉴스룸> 보도국이, 손석희가, 사회적 윤리를 배반했다고 논할 이들을 정서적으로 얼마나 설득시킬 수 있느냐의 싸움이 될 것인데 그 국면에 대해서는 예측할 수 없겠다. 그리고 그만큼 막중한 사안이라 판단했을 손석희의 믿음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는 결국 아무도 모를 것이다. 손석희의 판단에 온전히 동의할 순 없지만 나는 언론인으로서 그가 내린 판단은 존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시선으로 그의 자리를 지켜볼 것이다.
아는 형이 조심스럽게 카톡을 보냈다. ‘페북으로 쌍용차 후원 릴레이를
하는데 다음 타자로 널 지목해서 태그해도 되겠니?’ 그러라고 했다.
1만원을 쌍용차 후원 계좌에 입금하고 응원의 메시지를 남긴 후 관심 있는 지인 두 사람 이상을 추천하면 된다고 했다. 어쩌다 보니 대략 한 달 가까이 시간이 지나서야 기억이 났다. 기억난
김에 입금하고자 했다.
하지만 1만원이 아니라 10만원을
입금하고, 다음 타자는 지목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내가 10명의 후원을 대신했다고 생각하련다. 괜히 누군가를 추천해서 부담을
안겨줄 수도 있고, 이미 다른 방식으로 후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만약 당신이 쌍용차 해고자들에 대한 후원에 관심이 있다면 동참해줬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추천하지 않았지만 이 글이 누군가 기꺼이 참여할 수 있는 계기의 창이 되었으면 좋겠다. 저 분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내가 혹은 나와 가까운 누군가의 처지가 될 수 있음을 공감하고 기꺼이 저 투쟁을 응원해줬으면 좋겠다.
방법은 어렵지 않다.
[농협 3510598588683 김정우] 계좌에 1만원을 후원하고 응원의 메시지를 남겨주면 된다. 응원의 메시지가 주는 힘도 대단할 것이다.
우리에겐 지금 거대한 정치적 패악을 뒤바꿀 동력도 필요하겠지만 당장 벼랑으로 내몰린 일상을 구제할 수 있는 온기
또한 절실하다. 그러니 그 온기를 전하고 누군가에게 폼 나게 자랑하시라. 이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전파하고 그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간지 나게.
현실에 만족하지 못할수록 과거를 그리워하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했다. 21세기의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보단 과거에 대한 낭만을 논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다. 그만큼 현실이 팍팍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90년대엔 새로운 시대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미래의 청사진에 대해서 그리곤 했다. 그만큼 풍요로운 꿈을 꾸던 시대였던 것이다. 1997년 IMF사태 발발 이후로도 그나마 뉴 밀레니엄이라는 허수 같은 단어에 열광했다. 하지만 2000년대를 넘어오며 점차 미래에 대한 꿈은 저물기 시작했고 팍팍해지는 현실이 가속화되면서 이젠 그나마 90년대에 경험했던 풍요로운 시대에 대한 낭만을 향해 틈나는 대로 응답하라 외친다. 팍팍한 현실을 견디기 위해 과거의 유산을 마약처럼 삼킨다. 90년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마냥 즐길 수 없는 건 그래서다. 곰팡이 핀 낭만에 열광한 뒤에 씹히는 현실이란 여전히 퍼석퍼석하다. 나아갈 길이 없다. 갈 길은 먼데 갈 곳이 어딘지 모르겠으니, 그저 그리움만 쌓이네.
진보는 정의롭다는 말은 언제나 부도수표 같고, 보수가 정의롭지 않다는 말은 그저 편안한 도피일 뿐이다. 어느 쪽인가는 늘 중요하지 않다. 어느 쪽이든 맞는 얘기를 하느냐가 관건이지. 나는 진보이기 때문에, 나는 보수이기 때문에라는 행동강령 따위는 개똥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그건 그저 정치가들이 자기 편을 손쉽게 끌어모으기 위해 동원하는 말장난일 뿐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일상에서 진보라고 말하면서도 보수적으로 군다.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자신만 모를 뿐이다. 그저 '진보' 혹은 '보수'라는 신앙을 통해서 그 자리에 안주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러니 언제라도 그 프레임을 벗어던지고 최선을 다해서 옳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정의는 대부분 지고, 아주 가끔씩 이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그 확률을 높일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 중요한 건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오른손도, 왼손도, 두뇌의 명령을 따르고 있음을 잊어선 안된다.
사치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리는 이렇다. '필요 이상의 돈이나 물건을 쓰거나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함.' 그런 의미에서 재벌가의 딸이 기백만원, 기천만원짜리 옷을 입고 다니는 건 물질적인 개념에서 사치가 아닐 수 있다. 돈이 이마에서 튀는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뭔들 못하겠어. 세상을 멸망시키는데 돈지랄하는 게 아니라면야 있는 이들의 소비수준을 사치라고 말하는 입은 결국 무색해지기 마련이다. 쓸 수 있어서 쓰는 건 죄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재벌 2세가 누리는 화려한 생활이 마땅한 소비이고 정당한 권리인가라는 물음에 닿았을 때 문제의식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상그룹이라는 재벌가의 딸인 임세령이 몸에 걸친 의류의 가격대를 듣고 혀를 찰 것이다. 관련 기사를 써대는 찌라시들이 즐비한 것도 그런 반응을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임세령이라는 사람이 대체 누구이길래, 저런 자격을 갖추고 있단 말인가'라는 의문은 '그의 아버지가 그룹 회장이기 때문에'라는 '은수저 물고 태어난 아이'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임세령의 소비는 정당하다. 하지만 그 소비를 손가락질하는 손의 심정도 이해한다. 돈이 있는 사람의 정당한 소비를 옹호하면서 그에 대한 질시의 여론을 무작정 비판하는 건 그저 손쉬운 일이다. 빈부 격차가 극대화되고, 부의 재분배가 가로막힌 사회에서 '재벌가의 손녀가 몇천만원 짜리 코트를 입는 게 잘못이야?'라고 일갈하는 건 그저 속편한 비판이다. 문제의 본질은 정당한 소비가 아니라 정당한 소비 이면에 자리한 부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에 있기 때문이다.
조현아의 땅콩 회항 사태가 생각 이상의 파장을 몰고 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평범한 사회 구성원이 돈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생각 이상으로 공격적이다. 재벌가라는 호화로운 장벽이 위태롭게 흔들리자 필사적으로 성문을 두들기고 고함을 지른다. 한국의 부자들은 대부분 부의 축재에 있어서 윤리적 의심을 피해갈 수 없다. 대부분이 부동산 투기와 원자재의 독점 매입을 통한 이윤 창출을 통해서 지금의 부를 축적했고, 독재 정권의 슬하에서 노동의 착취를 보장 받으며 더욱 비대해졌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는 건 일찌감치 짓눌렸고, 여전히 신음하고 있다. 게다가 나날이 상승하는 사회적 비용을 방관하는 정치적 세력들은 빈부 격차에 계급성을 부여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임세령을 향한 손가락의 저변엔 비윤리적 축재의 역사가 존재한다. 부자가 의심 받는 사회라니, 얼마나 불행한가.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열광하는 사회의 저변엔 가난한 다수의 불만이 도화선처럼 깔려 있다. 게다가 임세령과 같은 재벌가의 후예들을 손가락질하는 대상들은 가진 것 없이 증오까지 끌어안고 있다. 결국 그 손가락들은 정작 자신들이 손가락질하는 대상보다 가까운 주변의 손가락들과 부딪혀 싸우거나 기형적인 집단 논리로 번져나갈 것이다. 사회적인 갈등을 야기시키는 건 결국 부의 대물림을 손쉽게 허하고, 빈부 격차의 확대를 방관하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에서 비롯된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으면 억울해지는 사회란 얼마나 불행한가. 그 불행이 개개인의 무지 탓이라고 몰아가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