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의 1960년작 <하녀>는 분명 독보적인 걸작이다. 중산층 가정의 가장으로서 부와 명예를 축적한 남성의 감춰진 욕망이 화근이 되어 또 다른 욕망의 포로가 된 채, 불순한 관계의 늪을 허우적거리고 이내 파국적인 운명을 맞이한다는 김기영의 <하녀>는 형식과 내용 면에서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작품이며 그 특성은 현재까지도 유효할만큼 대단한 에너지를 품은 작품이기도 하다. 관객에게 허락된 내외적인 시야, 즉 관찰과 추리라는 방식에 각각 맹점을 만들어 넣는 저택의 구조적 활용, 인물의 내면 심리 묘사는 압도적이면서도 탁월한 서스펜스를 발생시킨다. 무엇보다도 <하녀>는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물질주의가 싹트기 시작하는 당대 사회적 분위기, 즉 시대적 리얼리즘을 서스펜스의 태반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보다 비범하다. 자신의 육체를 담보로 신분의 상승을 꿈꾸는 하녀의 욕망이 부유한 중산층의 억눌린 욕망의 삽입을 유도하며 보다 거대한 괴물같은 욕망을 잉태하고 영화는 무시무시한 광기의 에너지로 장악된다.
임상수의 <하녀>는 바로 그 김기영의 <하녀>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걸작을 리메이크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나 무모하고 위험한 짓이다. 원작을 모사하듯 숏 바이 숏을 통해 껍데기를 재현하는 건 딱히 의미가 없으며 원작의 형태를 변주하거나 변형을 가했을 때, 그것이 어떤 대단한 성취에 다다르지 못하는 이상 본전의 의미도 얻어내지 못할 공산이 크다. 하지만 중요한 건 김기영의 <하녀>와 임상수의 <하녀>는 어떤 식으로든 전혀 다른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예측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김기영의 <하녀>가 당대 시대상을 영화에서 주요한 감정의 원천으로 활용했듯이 임상수의 <하녀>에서 김기영의 그것을 재활용한다는 건 딱히 의미가 없는 일이다. 물론 공간의 구조와 배우의 연기를 활용하는 연출적 방식에서는 유사한 선택이 가능하다. 하지만 임상수는 <하녀>를 김기영의 그것의 리메이크작으로서 완성하지 않았다.
임상수의 <하녀>는 리메이크라는 말 자체가 궤변적인 장식처럼 들리는 작품이다. 마치 원작을 희롱하듯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서스펜스가 완전히 탈색돼 버린 가운데 서구적인 인테리어로 채운 저택 내에서 과장된 연극적 제스처와 과잉된 표정을 짓는 배우들의 연기는 마치 무언가를 끊임없이 흉내내고 있는 듯한, 완벽하게 위장된 삶 자체를 표현한다. 임상수의 <하녀>에서 캐릭터들의 욕망이란 김기영의 그것처럼 뜨겁거나 강렬하지 않다. 단지 그저 위장과 흉내로서 화려한 겉멋에 도취된 껍데기들의 형태를 재현할 뿐이다. 그들은 무언가 대단한 욕망의 성취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할 뿐, 어떤 식으로도 그 욕망의 본질조차 깨닫지 못한다는 듯 어리석게 군다. 하녀의 존재는 김기영의 작품에서 서스펜스의 원천 그 자체나 다름없지만 임상수의 작품에서는 수단에 불과하다.
물론 임상수의 부정적인 시선은 영화가 묘사하는 부유층 가정의 가장인 훈(이정재)을 비롯해 그의 임신한 아내인 해라(서우), 그리고 그들의 장모(박지영)를 겨냥하고 있다. 그들은 부유층의 속물적 근성을 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은유적 상징의 수단으로서 영화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하녀인 은이(전도연)는 그들이 흉내내는 고상한 품위 내부에 자리한 속물적 근성 자체를 끌어내기 위한 도구적 존재이자 그 고상한 흉내를 우스꽝스럽게 망가뜨리기 위해 의도된 난장판을 격발하기 위한 방아쇠가 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염탐하고 관찰하는 늙은 하녀 병식(윤여정)은 궁극적으로 퇴화된 욕망의 흐름을 보여주는 인물로서 유효하다. 외모나 성격면에서 원작과 전혀 다른 캐릭터로 변주된 극속 인물들은 모호하고 막연하게 행동함으로서 의문을 증폭시키고 긴장감의 예열을 이루던 원작과 달리 직설적으로 말하고, 행동함으로서 긴장감이나 의문의 싹을 잘라내 버린다. 배우들은 저마다 자신의 역할 안에서 해야할 몫, 즉 수동적인 흉내에 가까운 연기를 펼침으로서 영화의 의도에 완벽하게 부합해낸다.
이는 놀랍게도 임상수가 김기영이 연출한 서스펜스의 열기를 블랙코미디로 냉각시켜버렸다는 완벽한 증거나 다름없다. (현실적이라기 보단) 현대적인 형태의 탈을 쓴 상류층 사회에 대한 악의적 조롱으로 가득 채워진 임상수의 <하녀>는 말 그대로 그 악의적인 시선 자체를 전시한다는 목적과 일념으로 완성된 작품처럼 보인다. 시퀀스와 시퀀스를 단절시키듯 성급하게 신을 이어붙이는 컷은 개별적인 신의 의미를 보존하면서도 내러티브를 흐름으로서가 아닌, 조각의 모음처럼 엉겨붙인다. 어떤 유기적인 의미를 발생시키기 보다도 그 신 자체가 주는 정보의 수집과 전달에 치중하듯 시퀀스가 이어져 나간다. 특히 거리의 풍경을 날것처럼 살피다 담담하게 먼 발치에서 자살을 목격해내는 도입부의 자살신은 임상수의 <하녀>가 의도하는 본질 그 자체를 파악하게 만든다.
자본주의의 과도기에서 물질주의적 욕망에 눈을 뜬 인물들의 파국을 플롯의 인과를 통해 진전시키는 김기영의 <하녀>와 달리 임상수의 <하녀>는 말 그대로 결말부의 파국적 조롱에 다다르기 위해 의무적으로 신을 축적시켜나가는 작업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임상수의 <하녀>는 임상수가 의도한, 즉 일방적인 비웃음의 태도로서 상류층을 묘사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일 뿐이다. 이는 원작이 처한 시대적 공기와 다른 이 시대의 현실에 대한 임상수의 노골적인 독설이라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일갈이나 성찰이 아닌, 말 그대로 그 현실 자체에 대한 희롱을 이루는 블랙코미디적인 감각은 온전히 임상수의 아이덴티티 자체를 증명하는 방식 안에서 유효하다. 결과적으로 임상수의 <하녀>는 온전히 임상수의 손에서 놀아나듯 완성된 작품이다. 영화는 극속의 인물부터 실질적으로 영화의 내면까지 텅빈 채로 완성됐으며 그 텅빈 형태 자체가 이 영화의 의도 자체를 대변한다. 그저 행위를 전시하고, 실은 그 행위에 담긴 욕망의 본질이 무엇인지 가늠하지 못한 채 흉내만 내고 살아가는 껍데기와 같은 인간을 보고 조롱하고자 함이 이 영화의 존재 가치를 대변한다.
중요한 건 이에 동의할 수 있는가라는 사실이다. 리메이크라는 사실을 물고 늘어지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겠지만 과연 걸작을 이런 식으로 리메이크한다는 것이 과연 낭비인지, 실리인지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본질적으로 임상수의 <하녀>는 리메이크라는 의미 안에서는 낭비라 이해될만한 작품이다. 또한 궁극적으로 임상수가 연출한 난장판은 그 자체로서 인상적이지만 그것이 끝없는 장난이나 희롱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질 때, 그 태도의 불순함을 존중할 수 있는가, 라는 고민이 뒤따른다. 그 태도에 불쾌함을 느낀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임상수는 <하녀>를 완전히 껍데기만 남은 영화로 만들었다. 임상수의 의도 안에서 이는 성공한 결과물이며 그 자체가 거대한 조롱이다. 그것이 조금 불순하고, 불쾌하다. 문제는 완성도가 아니라 지지도인 셈이다. 그런 면에서 임상수의 <하녀>는 문제작이라 불릴 만한가치만큼은 확실히 거머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