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의 지휘 아래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4대 사고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작업이 계획된다. 전주시청 한지과로 발령을 받게 된 7급 공무원 한필용(박중훈)이 실록 복본화 프로젝트를 일임하게 된다. 그 가운데 유명 다큐멘터리 감독 민지원(강수연)은 전주시청에 한지 다큐멘터리 제작 협조를 요청하고 전주시장은 그것이 복본화 작업에 시너지를 부여할 것이란 판단에서 이를 수락한다. 그것이 달갑지 않은 한필용은 이로 인해 그녀와 반목하게 되지만 점차 한지의 매력에 빠져드는 것처럼 그녀에게도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그리고 필용은 뛰어난 지공예가였으나 뇌경색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아내 이효경(예지원)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녀의 고향을 찾고자 노력을 기울인다.
<달빛 길어올리기>, 시적인 제목을 지닌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작품은 영화의 스토리와 같은 맥락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작업을 진행하는 전주시장 송하진은 전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민병록 교수에게 한지를 소재로 한 영화 제작을 의뢰했고, 이는 임권택 감독에게 전달됐다. 판소리와 민속화라는 <서편제>나 <취화선>, <천년학>이 그러했던 것처럼 <달빛 길어올리기> 역시 민족적인 정서를 발굴하는 극영화라는 점에서 임권택의 세계와 동떨어지지 않은 세계다. 다만 그 전례가 자발적인 움직임이었다는 것과 달리 <달빛 길어올리기>가 관영적인 의뢰를 통해서 제작된 작품이란 점에서 출발점이 다르다. 물론 <달빛 길어올리기>가 관영적인 홍보에 충실한 기능적인 영화라는 지적이 아니다.
의외로 <달빛 길어올리기>는 작품의 제작 동기와 무관하게 임권택 감독의 개인적인 소망이 간절하게 투영된 한지 영화로 완성됐다. 특히 <달빛 길어올리기>는 그의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보다 차별적인 형식의 시도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극영화의 형식을 표방하고 있지만 <달빛 길어올리기>는 다큐적인 면모가 보다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실상 전주시청의 실록 복본화 작업에 참여했던 7급 공무원의 실화가 바탕이 된 드라마투르기 속의 인물들은 한지라는 주인공을 수식하기 위한 장치처럼 삽입된 것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한필용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영화의 서사에 몰입하던 관객은 시점숏으로 관찰되던 한지 수공예품들이 갑작스럽게 정직한 인서트 숏으로 대체되는 광경 앞에서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극영화로서의 요소와 다큐멘터리적인 요소가 공존하는 작품이지만 동시에 두 요소가 밀착하지 않고 분리된,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보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방식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형식성의 실패처럼 보이지만 다시 한번 되짚어보면 그 무리수를 감안하고 밀어붙인 창작자의 의도 안에서는 성공한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실에서 점차 그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가는 한지를 조명하고자 한 임권택 감독은 그 소재 자체를 조명하는 것이 극영화적인 형식성의 완성보다도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임권택의 세계관에 익숙한 이들에게 굉장히 낯선 형식의 영화가 될 것이며 반대로 그런 형식성을 기대하지 않았을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당혹스러운 감상을 부여하는 영화가 될 것이다. 어쩌면 임권택 감독은 한지라는 전통적 가치가 현실 속에 놓인 처지를 자신의 입장으로 이해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추측을 배제하고 한지 자체의 소재를 조명하는 이 영화의 방식을 고려했을 때, <달빛 길어올리기>는 감독 자신이 한지라는 소재 자체의 조명에 자신의 세계관이 함몰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형식적인 실패를 밀어붙인, 의도적인 성공의 결과물에 가깝다.
그런 형식성의 차이와 무관하게 이 영화는 역시 임권택 감독만이 보여줄 수 있는 내공의 시선을 견지한 작품이다. 종종 임권택 감독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단지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감동적인 선경은 이 영화에서도 두루 발견된다. 한필용과 민지원이 오롯이 빛나는 달 아래서 차를 타고 가는 나이트신이 담긴 원경은 고요하고 그윽하다. 달밤 아래 깊은 계곡 속에서 전통적인 한지 제조에 전념하는 이들의 풍경으로 갈무리되는 결말 역시 숭고하고 애잔한 정서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 모든 풍경들은 물리적인 기능성으로 대변될 수 없는, 장인의 내공을 통해 살아있는 풍경 속에서 길어 올린 한 폭의 그림과 같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임권택 감독이 <창>(1997)을 연출한 이후로 15년 만에 현대극을 완성했다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이는 어쩌면 <천년학>에 걸린 100번째 영화라는 수식어의 무게를 뒤로 한 채, 자신 스스로도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었다는 임권택 감독의 집념을 보다 강력하게 반영한 또 하나의 시도일지도 모른다. 그 모든 대외적 의미를 배제하고 단순히 이 영화가 지닌 현대극적인 완성도를 본다면 적절한 수준의 성과를 지니고 있다고 평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내러티브의 흐름과 달리 플롯과 플롯을 잇는 과정에서 기이한 단절이 발견된다. 인과적으로 플롯을 마무리지어야 할 대사들이 종종 삭제되거나 시퀀스를 정리할 마지막 숏이 증발된 느낌이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일종의 과업처럼 완성된 작품이지만 그 의무에 짓눌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존중받아도 좋을 작품이다. 하지만 그 의도에서 벗어나 냉정한 시선으로 이 영화를 정리한다면 임권택 감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전달을 넘어서는, 한 영화의 완전한 잉태에는 다다르지 못한 미완의 야심처럼 보인다.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길어 올린 한지와 같지만 그 정성스러운 낱장의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까지는 다다르지 못한 듯하여 일말의 아쉬움을 떨치기가 어렵다. 깊게 배어든 정성을 쉽게 펼쳐내기가 쉽지만은 않았던 것일까.
남편의 죽음 이후로 살림에 어려움을 느끼던 연주(김혜수)는 자신의 2층집에 세입자를 구하지만 좀처럼 방을 구하는 이가 없다. 그런 속도 모르고 딸 성아(지우)는 엄마에게 성형수술을 해달라며 조르기만 하니 엄마 속은 더욱 타 들어가고 매일 같이 잠 못 이루는 밤의 연속이다. 어느 날, 방을 보고 싶다는 남자가 찾아오고 연주는 남자의 정체가 궁금하면서도 당장 집세를 지불하겠다는 그의 태도가 반갑기만 하다. 하지만 그 남자 창인(한석규)에게는 모종의 꿍꿍이가 있고, 그는 줄곧 연주를 통해 무언가를 알아내고자 안간힘을 쓴다.
<이층의 악당>은 ‘적과의 동침’이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발전하다 결국 ‘가족의 탄생’으로 종착하는 기이한 로맨스 코미디다. 제목만으로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이층의 악당>은 한석규와 김혜수의 조합만으로 눈길을 끌지만 그에 앞서서 <달콤, 살벌한 연인>이라는 재기발랄한 범죄 로맨스를 연출한 바 있는 손재곤 감독의 4년 만의 차기작이란 점에서 보다 선명한 물음표를 쥐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층’이라는 구조와 ‘악당’이라는 캐릭터가 부각된 제목처럼 <이층의 악당>은 공간의 활용범위가 탁월하고 캐릭터를 매만지는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마치 캐릭터를 방아쇠로 당겨 스토리의 곳곳에 매복시킨 뇌관을 폭발시키는 것과 같다. 1층과 2층을 경계로 한 지붕 아래서 거주하게 된 창인과 연주의 관계는 그 자체로부터 새어 나오는 긴장감은 서서히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고, 관계의 전환을 통해 흥미를 지속시키며 그 관계를 통해 불거지는 갈등이나 예기치 못한 감정의 발화를 통해 폭발적인 유머를 발생시킨다.
무엇보다도 <이층의 악당>은 창인과 연주의 심리적 거리가 서로 공유하게 되는 동선의 확대와 함께 점차 묘한 심리적 연대로 변모해나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감정적 설득력을 통해 감상을 지배해나간다. 특별한 목적을 지닌 채 연주에게 접근해 나가던 창인이 연주와 특별한 관계로 거듭나는 과정은 비슷한 부류의 로맨스물에서 곧잘 발견되는 특성이기는 하나 <이층의 악당>은 그런 관계의 변화를 물리적으로 묘사할 뿐, 화학적인 감정적 반응을 이야기 안에 구겨 넣지 않는다. 상황의 변화 속에서도 냉정하게 자신의 목적을 관철시키려는 인물과 다소 백치미스러운 오해를 동반하면서도 그의 목적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인물 간의 줄다리기는 효과적인 유머의 기반으로서 손색이 없다.
정말 웃긴데 뭐라 설명할 길이 없는 ‘지하실 시퀀스’와 같이 <이층의 악당>은 두 인물 사이에 놓인 비밀과 접근성을 통해 얻어지는 예측 밖의 상황들을 연출해냄으로써 폭발력 있는 서스펜스와 유머를 찰나에 묶어둔 채 관객이 얻을 수 있는 순수한 재미를 끊임없이 개발해 나간다. 시종일관 편차 없이 적정한 수준을 유지하는 스토리텔링은 시작과 끝이 깔끔하며 의뭉스럽게 시선을 잡아 끄는 캐릭터들은 예측 불허의 긴장과 유머를 들이밀지만 저마다 쓰임새가 적절하다. 물론 소모적인 캐릭터가 일부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층의 악당>은 전반적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안정적인 재미가 더부살이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올해의 물건이라 장담할만한 코미디의 발견이다. 한석규와 김혜수의 앙상블도 흥미롭지만 그에 앞서서 <이층의 악당>은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발견한 손재곤 감독의 검증을 이룬 작품이란 점에서 보다 확실한 의미를 짚게 만든다.
한석규와 김혜수의 조합만으로도 궁금증이 도질 것 같지만 <이층의 악당>은 <살콤, 살벌한 연인>이라는 제목만큼이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손재곤 감독의 4년만의 차기작이다. 빤한 듯 물음표를 잡아 끄는 스토리는 시작과 끝이 깔끔하고, 캐릭터들은 의뭉스러운 척 선명하게 시선을 잡아 끌며 가늠할 수 없는 지점에서 유머가 찌르고 들어오고 결과적으로 따뜻하다. 캐릭터의 쓰임새들은 저마다 적절하고, 공간의 활용이 탁월하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안정적인 재미가 더부살이하는, 단연 올해의 물건으로 꼽힐 만한 코미디가 등장했다. 손재곤이란 이름을 기억해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