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촌스럽다. 웃기고 울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찰나가 그런 정황 속으로 끼어들어가도 될 거라 판단한 연출적 감이 기가 막힌다. 말 그대로 그냥 웃기고 울리는 순간을 나열하면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촌스러움이 <타워>를 붕괴시키는 한방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와 완성도 높은 CG가 이런 단점을 상쇄시킨다. 거대한 주상복합주택의 화재 안전성은 현재에도 여러 차례 제기되고 있는 문제라 CG의 완성도로 인해서 보다 현실적인 공포로 치환된다. 고의적인 악역의 설정도 눈에 빤하지만 우리네 일상에서 마주치는 파렴치한들의 수준이 그만한 것이라 딱히 뭐라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어쨌든 인재에서 비롯된 거대한 재난의 수순은 인정할만하다. 재난의 이미지는 완벽하고 그 안의 끔찍한 그림도 여럿이라 붕괴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결말부까지의 참혹함은 진짜처럼 와 닿는다. 다만 한강 너머에서 바라보이는 여의도의 타워 스카이는 사실 누가 봐도 9.11의 유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같아서 남의 비극을 상업의 도구로 활용한 것 같다는 일말의 거부감도 든다. 그 이미지를 권유할 마음도 없지만 말릴 마음도 없다.
3음절의 경쾌한 제목처럼 홍상수의 <하하하>는 경쾌한 영화다. 언제나 그렇듯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잰 체하는 예술인과 지식인들의 속물적 근성을 벗겨내는 ‘생활의 발견’을 그려내는 홍상수의 ‘극장전’은 <하하하>에서도 거듭된다. 홍상수 영화에 등장하는 영화평론가, 감독, 작가들은 평론이나 연출, 창작을 한다고 할뿐, 그에 어울리는 행위를 보여준 적이 없다. 언제나 술을 마시고, 여자를 탐하며, 제 삶을 변명하거나 위장하기에 바쁘다. 그럼에도 그들을 미워할 수 없는 건 그들이 보여주는 소소한 일탈적 행위가 하나 같이 인간적이란 변명으로 통용될 수 있는 까닭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함께 홍상수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대중적 호응도가 높을 것으로 기대되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하하하>는 그의 영화 가운데서 가장 유쾌한 맺음새를 지닌 영화라고 해도 될 것 같다. 홍상수의 영화는 일상성을 고스란히 노출하면서도 그 일상성을 완전히 탈색시켜버리는 듯한 체험적 기질을 품고 있다. 그건 홍상수 특유의 ‘대구의 힘’에서 비롯된다. 공간성이나 인물을 축으로 캐릭터를 대칭의 구도에 내려놓고 이를 통해 대비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해나가는 홍상수의 영화는 관대하듯 치밀하며, 유연하듯 첨예하다.
무엇보다도 매일 아침 당일의 시나리오를 탈고해 배우들에게 전달한다는 홍상수식 드라마투르기의 비결이야말로 그의 영화에서 발견되는 의외성의 뿌리일 것이다.-이를 드라마 현장의 쪽대본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무엇보다도 (그의 영화를 본 관객의 짐작 안에서는 의외처럼 들리겠지만) 치밀하게 테이크를 반복하는 홍상수의 현장에서 배우들의 비연기적인 ‘연기’가 가능한 것도 바로 그 즉흥적 자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무엇보다도 근작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함께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기획한 디지털 삼인삼색 옴니버스 <어떤 방문>에 포함된 <첩첩산중>은 홍상수라는 감독의 변화를 발견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하하하>는 그 변화를 가장 뚜렷하게 증명하는 또 하나의 진행형 작품처럼 보인다. 그 변화라는 건 세계관이 보다 유연해졌다는 것. 그리고 그 유연함이란 홍상수의 영화가 발생시키던 웃음의 너비가 실소에서 진짜 코미디로 변모하고 있다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입봉작도 없는 감독 문경(김상경)은 영화평론가 선배 중식(유준상)을 만나 낮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중, 두 사람은 최근 동시간대에 통영에 머무르면서도 마주친 적조차 없음을 아게 된다. 그리고 사연 하나에 술 한잔을 청하며 각자 통영에서의 경험담을 주고 받는다.
이 소소한 이야기가 비범할 수 있는 건 같은 시간대에 한 공간 속을 활보했던 두 인물의 경험담이 이루는 일상성의 너비가 이루는 진귀함 덕분이다.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술잔을 부딪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입담을 겨루듯 경쟁적이지만 과장되기 보단 솔직하며 고백적이다. 이는 지금까지 타인의 삶을 염탐하듯 들이미는 홍상수의 줌인과 달리 직접적인 화자의 고백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이 독백이 아닌 대화의 형식으로서 사연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보다 적극적이다. 최소한 홍상수의 영화의 내레이션이 지금까지 관객을 향한 방백의 형태로서 활용됐던 것과 달리 <하하하>는 대화의 형태로서 관객을 참여시킨다는 점에서 영화가 묘사하는 사연의 형태는 수치스러운 것이라기 보단 긍정적인 이야기거리로서의 감상을 부른다.
문경과 중식은 동시간대에 같은 공간을 경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동선 속에서 같은 인물들을 만나고 헤어지며 두 가지 줄기의 플롯을 만들어나간다. 미묘하게 엇갈리는 두 사람의 동선 속에서 평행처럼 나열된 두 사람의 사연은 공간성과 시간성을 초월하는 일상성의 신비를 염탐하게 만든다. 궁극적으로 <하하하>를 단순명쾌하게 정리하자면 ‘재미있는 이야기’다. <하하하>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때때로 궤변을 늘어놓고 거짓말을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이기지 못하거나 눈치를 살핀다. 그 속물성은 밉기 보다 귀엽다. 평범한 욕망을 대단한 것인양 둔갑해 허세를 부리던 예술적 지식인들이 한순간 찌질한 속물적 근성을 드러내지만 <하하하>는 이를 고발이 아닌 발견의 태도로 다루며 이는 평범한 인간을 살피는 일상성의 풍경으로 승화된다. 그리고 그것이 홍상수를, <하하하>를 비범하게 수식한다. 잘 알지도 못하지만 <하하하>가 묘사하는 일상은 분명 귀엽다.
무엇보다도 <하하하>는 언제나 홍상수의 영화가 그러했듯이 배우들의 이색적인, 혹은 진짜 같은 연기를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유쾌한 작품이다. 특히 문소리는 <하하하>에서 압권의 연기를 펼치며 유준상의 이색적인 면모는 단연 발견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