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주고 싶었다. 읽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출판사는 팟캐스트를 열었다. 거기 독자가 있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진행하는 <이동진의 빨간 책방>은 영화가 아니라 책에 관한 팟캐스트다. 소설가 김중혁 작가가 항상 고정 게스트로서 옆자리를 지킨다. 평론가와
작가가 진행하는 책에 관한 방송이라고 하니 진지하고 엄숙할 것만 같지만 유쾌하고 엉뚱한 만담이 귀를 잡아 끈다.
본질적으론 책에 대한 성실한 탐구와 지적인 관점과 뚜렷한 성찰이 마음을 붙잡는다. 2년
전에 시작된 <이동진의 빨간 책방>은 스타 평론가와
인기 작가가 진행하는 팟캐스트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고, 2년 동안 전체 팟캐스트 순위에서 상위권을
지켜왔다. 인기를 모으는 대부분의 팟캐스트가 시사나 정치, 섹스에
대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을 상기했을 땐 놀라운 선전이다. 더욱 흥미로운 건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 출판사 ‘위즈덤하우스’에서 운영하는 팟캐스트라는 사실이다.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출판사는 위즈덤하우스뿐만이 아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진행하는 ‘문학동네’의 <문학이야기>, 소설가 황정은과 김두식 교수가 진행하는
‘창작과 비평’의 <라디오
책다방>이 대표적이다. 출판사가 팟캐스트를 기획하는
상황을 보도하는 다수의 언론에선 출판 시장의 불황으로 인한 현상과 연관해서 설명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단지 그것 때문일까. 만약 출판 시장의 불황을 타파하기 위한
의도를 앞장세운 기획이었다면 어떻게든 해당 출판사의 도서를 홍보하는 마케팅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이 보다 중요해졌어야 하지 않을까.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선 언젠가부터 자사 출판사의 도서를
홍보하는 광고성 코너를 짧게 삽입하긴 했지만 그 이전까진 출판사와의 연관성에 대한 어떠한 암시조차 없었기 때문에 출판사가 운영하는 팟캐스트임을
모르고 듣는 청취자도 많았다. 게다가 90회 이상을 업로드한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위즈덤하우스의 도서를 집중적으로
소개한 건 윤태호 작가의 <미생>뿐이다. 그렇다면 위즈덤하우스에선 대체 왜 팟캐스트를 운영한 것일까.
“출판시장이
많이 축소됐지만 아직도 독서에 관심 있는 분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양질의 책을 가이드해줄 수 있는 경로에 대한 관심은 늘 있었다. 사실 방송을 비롯한 기존의 매체가 지닌 영향력이 줄어들고 책에 대한 집중도도 떨어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독자와의
접촉면을 넓히는 것도 중요했다. 그런데 팟캐스트 청취자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서 새로운 형태의 매체에서
책을 이야기해보면 어떨까라는 호기심도 있었다. 아마 다른 출판사들도 비슷한 의도에서 팟캐스트를 기획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기획한
위즈덤하우스의 김은주 분사장의 말이다. 한 달에 두 번 업로드되는
<이동진의 빨간 책방>은 매주마다 나름의 주제를 정해서 그 주제에 어울리는 책을
소개한다. 신작보다도 구작이 대부분이다. 진행자인 이동진이
선정하는 도서들이 그 대상이 된다. 위즈덤하우스는 그저 멍석만 깔았다.
완벽하게 진행자의 역량에 모든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다.
이는 앞에서 소개한 다른 팟캐스트도
마찬가지다. 신형철이 진행하는 <문학이야기>는 문학에 대한 진지한 해설과 철학적 접근에 집중하고자 하는 진행자의 의도를 완벽하게 존중한다. 어지간한 농담이나 유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성을 염두에
둔 기획이라고 말할 여지조차 없다. <이동진의 빨간 책방>
역시 대단한 야심에서 출발한 기획이 아니었다. 하지만 ‘양질의
정보’를 생산해내겠다는 의도는 존재했다. 그래서 믿을 만한
진행자의 섭외가 관건이었다. 그 자체로 브랜드일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다. 인지도 있는 평론가와 작가가 팟캐스트를 통해 책을 말하게 된 건 그래서다. 이는
기성 미디어에선 시도하기 힘든 기획이었다. 책이라는 컨텐츠에 대한 단편적인 소개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고, 그나마 책을 소재로 한 양질의 프로그램은 시청률이 저조한 야심한 시간에 편성되기 일수였다. 그런 의미에서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청취가 가능한 팟캐스트는
출판사 입장에선 매력적인 플랫폼일수밖에 없다.
“아마 책이 잘 팔리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만들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출판계의 위기를 고려한 돌파구일수도 있지만 대중과 소통하고 싶다는 심리가 작동했다고 본다.” 교보문고 콘텐츠 사업팀의 윤태진 PD의 말이다. 그는 올해 초 소설가 정이현과 문학평론가 허희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낭만서점>을 기획했다. 대형 서점인 교보문고에서 운영하는 팟캐스트라지만
역시 진행자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건 앞서 소개한 출판사의 팟캐스트와 유사하다. 다만 서점이라는 광장을
기반으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큰 메리트가 있다. 서점은 본래 독자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책의 광장이다. 북콘서트라던지, 낭독회 등의 도서 관련 행사가 서점에서 열리는 건
본래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명 작가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방송이란 형식성을 생각했을 때 교보문고라는 광장의
활용가치는 무궁무진하다.
타이틀 자체로 브랜드가 된 <이동진의
빨간 책방> 또한 광장을 얻었다. 상수동에 생긴 카페
‘빨간 책방’은 위즈덤하우스에서 운영하지만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위한 공간이다. 이동진이 팟캐스트에서 선정해 소개한 책들을 판매하기도 하고, 팟캐스트
녹음 혹은 공개방송을 위한 광장 노릇을 한다. 2주년을 기념하는 공개방송 당시엔 50개의 객석이 가득 채워졌다. 온라인에서 확인한 인지도를 오프라인을
통해서 확신하게 된다. 적극적인 출판사만큼이나 적극적인 독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지난 8월에 오픈한 웹사이트 ‘소설리스트’는 소설가 김중혁과 김연수, 서평가 금정연 등이 운영하는, 소설 전문 매체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신간에 묻혀 사라지는 좋은 소설을 발굴하자는 취지를 안고 문을 열었다. 영화에 별점을 매기듯 문학에 별점을 매긴다. 소설가가 직접 소설을
평한다. 새로운 시도다. 시기적절한 기획이다. 책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방법론을 통해서 기대 이상의 대중성을 확보한 팟캐스트의 성과는 분명 출판사뿐만 아니라
작가들에게도 고무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새로운 바람이다.
물론
‘불황’이란 단어를 날려버릴 만큼 강력한 기류를 형성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바람의 방향을 바꾸는 시도는 존재해야 한다. 팟캐스트는
출판계의 새로운 날개다. 디지털식 방법론이 아날로그 시장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이상적인 조합이다.
“왜 이런 영화를 만드세요? 왜 사람들이 이해도 못하는 영화를 계속 만드시려는 거죠?”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한 장면. 영화학도를 자처하는 학생은 감독인 구경남(김태우)에게 묻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이에 대해서 설명해보자면 마치 이 대사는 그냥 구경남을 위해 마련된 대사만은 아닌 것만 같다. 어쩌면 이 질문은 홍상수 감독 스스로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자승자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음에 나올 대답이 중요하다.
“이해가 안 가시면 안 가는 거죠. 제가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전 그냥 영화 만드는 거고, 그걸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좋은 거겠죠.”급격하게 높아진 언성이 격양된 분위기를 이룬다. 그 뒤로 구경남의 대답이 이어진다. “정말 몰라서 들어가야 하고 그 과정이 발견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수렴하는 겁니다. 체계적으로 미리 가지 않고, 매번 발견하는 겁니다.”누군가는 이 답변이 홍상수 감독의 입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단정할 순 없다. 그냥 관객은 그 상황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거나 나름대로의 입장과 시선을 견지한 채 해석을 시도할 뿐이다. 혹은 그냥 흘려 보내거나. 어쨌든 그 상황의 진심에 대해선 어느 누구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그냥 나름대로의 태도대로 상황을 분석하고 체감할 뿐이다.
2008년 여름, 충청북도 제천에서 뜬금없이 시작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홍상수 감독의 이전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대구와 반복의 형태를 고수하는 영화다. 제천과 제주도라는 공간의 이동을 통해 전후 구조로 나뉘듯 명확히 나열되는 이야기는 때때로 뜬금없고 당황스럽지만 지극히 일상적이라 익숙하면서도 생소하게 인지된다. 기존의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그렇듯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카메라 앵글은 무심하게 던져놓은 시선을 중심인물에게 돌려놓고, 그렇게 상황을 주시하던 카메라는 결정적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인물을 향한 줌업을 반복한다. 그 시야 속에 놓인 인물들은 서로 뒤엉켜 술판을 벌이다 특별한 사연을 만들어내거나 어떤 비밀을 잉태하며 그 과정 속에서 서로의 감춰진 의중이 탐색되기도 한다. 결국 누군가는 흥분해 길길이 날뛰고 그 반대편에 놓인 누군가는 움츠리다 이내 그 자리에서 달아나듯 떠난다.
그 다단한 관계 속에서 유일하게 공존하는 건 구경남이다. 그는 제천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내려간 제천과 제주영상위원회의 초청으로 특강을 내려간 제주도의 대칭을 이루는 한 점이다. 그는 영화 속의 모든 현장에 위치함으로서 상황에 개입하기도 하지만 수없이 모이고 흩어지는 인물들의 관계와 상황을 관찰하는 위치를 고수해 나간다. 두 시공간에서 등장하는 각기 다른 인물들은 다른 듯 닮은 풍경 속에서 변형된 닮음의 역할극을 펼쳐나간다. 바뀐 공간 속에서도 어떤 대사들은 동일하게 들려오고 이와 함께 펼쳐지는 상황은 변형된 형태 속에서도 구조적 평행과 대칭을 이룬다. 영화제 심사위원을 맡기 위해 내려간 제천과, 영화 특강을 위해 내려간 제주도는 목적만으로도 대구를 이루는 공간이 된다. 그 안에서 구경남의 영화를 둘러싼 성찬의 고백과 비판적 물음이 뒤바뀌고, 충동적으로 발생한 불미스런 관계가 은밀히 폭로되거나 조심스럽게 감지되며, 우연한 계기를 통해 조우한 절친과 은사를 통해 마주한 그들의 부인을 통해 예상치 못한 소동극을 한차례씩 건넌다.
시공간의 변화와 인물의 교체를 통해 전혀 다른 풍경과 표정들이 발견되지만 어떤 기시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그 공간을 채우는 인물들의 욕망과 허세가 동일하게 드러나는 까닭이다.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거나 잘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는 인물의 심리는 때때로 모호해서, 혹은 지나치게 명확해서 속물적이다. 가장 흥미로운 순간은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 자신과 타인의 이해차가 존재함을 발견했을 때 발생하는 인물의 표정이다. 자신의 영화로부터 ‘인간심리의 이해 기준을 얻었다’고 말하는 평론가의 고백으로 들뜨던 구경남이 ‘왜 사람들이 이해도 못하는 영화를 만드시는 거죠?’라고 당돌하게 묻는 학생의 질문에 달아오르듯 답변을 토해내는 순간, 인물의 표면과 내면의 온도차를 인식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구경남 이외의 다른 인물을 통해서도 발견된다. 스스로가 빛이 됐다고 말하는 유신(정유미)과 이를 두둔하는 부상용(공형진) 앞에서 빈정거리는 구경남에게 유신이 정색하고 부상용이 이런 태도를 뒤따를 때나 오랜만에 은사와 만난 구경남이 은사와 관련된 기억을 고백하던 중 그 기억에 대한 서로의 견해차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사소한 갈등에 직면할 때, 스스로가 충분히 알고 있다는 믿음에 대한 반발이나 이견에 대한 당혹스러움이 인물의 표정을 통해 드러난다.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믿음의 간격을 발견하거나 어떤 사실에 대한 이해차가 끼어들 때, 서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아는 척한다고 생각되는 상대를 경멸하면서도 멋쩍은 표정으로 순간을 견딘다. 그 상황의 부조리는 때때로 개인의 스트레스로 발전하기도 하며 종종 상대와의 갈등을 발화시키는 계기로 작동된다. 게다가 이는 단지 영화 내부의 인물들에게 국한된 체험이 아니다. 이런 이해차는 영화와 그 외부에 놓인 관객 사이의 체험으로 확장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는 상황에 대한 불확실성이 담보된 결과들이 묘사되곤 한다. 유신과 부상용에게 파렴치한 인간으로 찍혀 달아나는 구경남의 모습에서 관객은 어떤 불미스런 원인을 예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예상은 영화적 상황이 어떤 원인을 통해 발생한 결과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잠정적으로 내려진 결론에 불과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양천수(문창길)의 불순한 동침을 간접적으로 인지한 관객들은 구경남과 고순(고현정)의 밀회를 발견한 조창우(하정우)가 그 사실을 양천수에게 폭로하는 상황 속에서 뻔한 결과를 예상한다면 의외의 대응을 목격해야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뜻밖의 상황 속에서 추출되지 않는 결과를 통해 관객의 오해를 도모하거나 관객의 입장에서 어떤 결과를 예상케 하다 이내 배반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어떤 상황의 단면을 통해 그 상황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결정하는 건 영화 속 캐릭터나 영화 밖 관객이나 매한가지다.
다채로운 인물들의 소동극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건 고순이다. 그녀는 제 욕망을 가장 충실히 드러내면서도 그 다양한 삶 속에서 가장 솔직한 내면을 드러내 보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방점도 그녀의 마지막 대사에 찍혀있다.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딱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해요.”스스로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타인에 대해서 잘 아는 듯 참견하고 주장하는 인물들의 난장판 속에서 고순은 유일하게 차분하고 담담하게 자신과 상대를 관통한다. 그리고 정곡을 찌르는 대사를 마친 인물이 화면에서 멀어져 갈 때, 카메라의 시선은 고개를 돌려 먼 바다를 차분히 응시하다 비로소 이야기를 멈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가운데 가장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유쾌한 작품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하나같이 이름값을 자랑하는 배우들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적 체험을 위해 헌신하는 광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놀랍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홍상수 감독은 때때로 자신을 겨냥하듯 자학적인 대사를 삽입하고 이를 밀쳐내듯 또 다른 반박을 맞은편에 세운다. 결과적으로 이런 태도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관객에겐 유쾌한 영화임에도 작가 스스로에겐 수없이 오가는 의심과 고민의 산물로 거듭난 작품임을 거듭 깨닫게 만든다.
홍상수 감독의 9번째 영화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낯익은 풍경을 새롭게 인식하는 그의 새로운 대구적 관찰을 통해서 더욱 여유로워진 시야와 한층 깊어진 관점을 인식하게 만든다. 새삼스럽게 홍상수 감독의 10번째 대구에 어떤 풍경이 놓여있을지 궁금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언제나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낯익은 풍경을 낯설게 전시하며 익숙하듯 새로운 관점을 펼쳐놓곤 했다. 그건 마치 매일 아침마다 정갈하게 당일 분량의 대본을 탈고한다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찍기가 그에게 있어서 ‘정말 몰라서 들어가야 하는 과정이자 그 과정의 발견으로 수렴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결국 홍상수 감독의 9번째 발견인 셈이다. 그리고 여전히 홍상수 감독은 10번째 발견으로 수렴해 나갈 것이다. 마치 꾸물꾸물 기어가는 애벌레처럼 느릿하지만 어디론가 나아가는 그 시선의 새로운 약진이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기대할 수 밖에 없는 건 바로 그런 소소하고 재미난 생활의 발견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