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대전환점을 얻게 된 의료 과학 분야로 인해 인간의 불치병 치료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1967년, 인간의 평균 수명은 백 살을 넘게 된다. 이 놀라운 변화란 희생을 담보로 한 혁신이었다. 고장 난 부품을 갈아 끼우듯 급속도로 발전된 장기 이식술로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제공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타인의 갱생시키기 위한 일환으로서의 삶을 순순히 받아들인 채 살아야 했다. 1978년 헤일샴의 기숙사에서 성장했던 캐시(캐리 멀리건)와 토미(앤드류 가필드), 루스(키이라 나이틀리)도 그런 부류의 삶을 살아야 했다.
2005년, 일본계 영국인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집필한 SF소설 <나를 보내지 마(Never Let Me Go)>를 원제 그대로 영화화한 <네버 렛미고>는 누군가의 삶을 대체하기 위해서 부품처럼 길러진 어떤 이들의 삶을 비춘 SF픽션이다. 미래적인 소재를 지난 20세기의 풍경에 대입한, 이 시대착오적인 소설은 비사실적인 시대상을 배경으로 삼아 되레 현실적인 감정을 이식하고 진지한 감정선을 주입한다. 섬세한 문체로 사건의 흐름과 인물들의 심리를 회상하는 이 1인칭 시점의 소설은 서정적인 정서를 두른 채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비극적인 예감을 담담하고 쓸쓸하게 진술해낸다.
<네버 렛미고>는 이런 소설의 자질에 밑지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는 원작에 종속된 영화의 한계라기 보단 원작이 지닌 가장 탁월한 장점을 자신의 방식으로 소화할 수 밖에 없는 영화의 필연적 선택에 가깝다. 도입부부터 이야기에 잠재된 비극적 예감을 보다 직설적인 구술로서 명확하게 야기시키는 동시에 희미한 여운을 남기는 소설의 결말에 비해 보다 직접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서사의 전략적 변주를 제외하면 소설과 원작은 전반적으로 유사한 서사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 역시 원작과 마찬가지로 캐시의 담담한 1인칭 독백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수채화처럼 맑고 안온한 풍경을 입은 섬세한 분위기 속에서 서정적인 흐름을 유지한 채 서서히 흘러나간다.
다만 서사적인 사건의 흐름 속에서 인물들의 관계적 긴장과 심리적 상응이 예민하게 발견되는 원작에 비해서 인물의 심리적 이해와 시선의 깊이가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얕은 편이다. 덕분에 영화의 안온한 인상이 심심하고 밋밋하다는 인상으로 감지되기도 하지만 이는 큰 단점이라 지적될만한 사항은 아니다. 지난 과거를 회고하는 캐시의 나직한 독백은 낭만적인 추억에 가깝게 묘사되는 과거의 이미지 속에서 더욱 쓸쓸하게 비극적인 예감을 유지하며 결말에 다다라 간절함이 깃든 인물의 처연한 감정을 수려한 여운의 그림자로 드리우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또한 성장드라마로서의 흥미와 로맨스물로서의 긴장을 보다 도드라지는 형태로 발전시킴으로써 감정적인 온도차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긴 호흡을 지닌 소설을 축약된 이미지와 대사로 전달하는 이 영화는 변주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에 아기자기한 해석을 가미하며 영화만의 의미를 간직해낸다.
자신들이 처한 비극적인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채 아스러져 가는 젊은 청춘의 삶. 비사실적인 현실을 그린 이 영화가 되레 지극히 현실적인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건 어쩌면 젊은 배우들의 잠재력 덕분일 것이다. 캐리 멀리건, 키이라 나이틀리, 앤드류 가필드는 <네버 렛미고>에서 성장드라마와 로맨스물의 결을 이루는 좋은 원목과 같다. 특히 1인칭 독백으로 서사를 열고 닫는, 떨림이 깃든 담담한 어조로 감정의 수면에 고요한 파문을 일으키고, 정서적 가지에 가녀린 떨림을 만드는 캐리 멀리건의 연기는 그녀가 지닌 너른 가능성을 짐작하게 할만한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