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46세, 너무나 갑작스러운 비보였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죽음이 남긴 안타까움은 좀처럼 지워질 것 같지 않다.
그야말로 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설 연휴가 끝난 2월 3일 오전에 믿을 수 없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사망했다는 것. 자택인 뉴욕 웨스트 빌리지의 아파트 화장실에서 쓰러져 있는 것을 동료 시나리오 작가가 발견했지만 그 때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고 한다. 팔엔 주사기가 꽂혀 있었다고 했다. 현존하는 대배우를 쓰러트린 건 약물 중독이었다. 집안에선 다량의 헤로인이 발견됐다. 침통한 일이다. 단지 그가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여전히 적지 않다. 하지만 연기력만으로 작품 자체를 그 이상의 무언가로 끌어올리는 배우는 많지 않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침통하고, 또 침통하다. 게다가 향년 46세라니, 앞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더욱 많은 나이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1991년 TV시리즈로 연기를 시작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자신이 출연한 작품마다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유의 비만한 체구와 가쁜 호흡소리, 곧잘 홍조를 띠는 얼굴을 지닌 호프만이 전세계가 인정하는 배우로 거듭날 수 있었던 건 그가 진짜 배우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출연작에서 결코 단순한 캐릭터의 탈을 쓰고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대신 비중과 무관한 중량감을 선사하곤 했다. 둥글둥글한 외모와 달리 날카로운 서스펜스로 허를 찌르거나 깊은 페이소스로 심금을 울리는데 능했다. 대단히 복잡다단한 캐릭터의 광활한 심리를 드러내는데 능한 배우였다.
그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긴 <카포티>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진가를 드러내는 수작이다. 자신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서 살인범을 인터뷰하다 그를 사랑하게 되지만 자신의 소설을 보다 완벽하게 만들어줄 살인범의 사형을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중적인 심리가 예민하게 새어나온다. 특히 최근작인 <마스터>에선 특유의 메소드 연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심리학자 행세를 하며 스스로를 신격화시키는 남자 랭케스터의 외면으로 드러나는 자신감과 내면적인 불안을 한 몸에 담아 점차 폭포처럼 쏟아내듯 연기해내는 <마스터>의 와이드 스크린이란 흡사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란 배우의 경지를 전시하는 평원과도 같았다. 잔잔한 수면 위의 파문이 퍼져나가듯 세심한 심리적 진동을 보여주는 <다우트>와 욕망에 사로잡혀 허우적대다가 비극적인 파국을 목도하게 되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와 같은 작품에서의 연기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대체로 욕망과 불안이 뒤엉킨 인간의 내면을 폭풍처럼 쏟아내는 연기를 선보이곤 했다.
현재로서 우리가 목격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마지막 영화는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통해서 그의 마지막 흔적을 되새겨야 한다는 건 한편으로 대단히 기이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는 이 전형적인 상업영화에서도 배우로서 자신의 가치를 보존해낸다. 다소 과장되고 기괴한 세계관을 그린 이 작품에서 상대적으로 지극히 평범한 복장으로 등장하는 그는 자신의 진짜 얼굴을 가린 인물로 등장하는데 대단히 평면적으로 느껴질만한 캐릭터를 특유의 연기력으로 비범하게 해석하며 시리즈의 미래를 여는 포석으로서 자리했다. 일찍이 <미션 임파서블 3>에서도 극에 긴장감의 불을 붙이는 심지이자 뇌관처럼 자리했던 그였다. 배우의 역량이 영화의 완성도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데 이만큼 적절한 예시도 없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유작은 <헝거게임>의 마지막 속편이 될 것 같다. 그는 세 번째 속편의 촬영을 마쳤고,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네 번째 속편에서 7분 가량의 출연 분량을 남겨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지난해에 선댄스에 출품한 두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헝거게임>의 마지막 작품에 7일 가량의 촬영 분량을 남겨놓고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스파이물의 거장 존 르 카레의 원작을 안톤 코르빈이 영화화한 <모스트 원티드 맨>을 비롯한 두 작품이 그의 숨결을 보존하고 있다. 아마도 이 남은 작품들을 목도할 때마다 필경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란 배우의 빈 자리를 거듭 확인하게 될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쓸쓸하다. 혹자는 그가 약물 중독에 의존한 배우가 아니었냐고 비판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리 생각해도 허무한 죽음이다. 누구나 언젠가 죽음에 직면한다지만 그렇게 합리화하기엔 우린 너무나 거대한 하나의 세계를 잃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그가 남긴 그림자가 너무 짙어서 이 허망함을 당분간 달랠 길이 없을 것 같다.
경건한 미사 중 신부의 설교가 시작된다. “확신이 없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의미심장한 물음, 약간의 침묵. 항로를 잃어버린 어느 선장의 사연이 이어진다. 항로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선장이 별자리의 방향까지 의심하게 된다는 이야기. 이에 덧붙여지는 말. “의심은 확신만큼이나 강력하게 지속됩니다.”확신과 의심은 모두 다 마음에서 비롯된다. 의심과 확신은 배반적인 언어지만 그 태생의 기반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의심과 확신은 방향이 다를 뿐, 한 지점에서 출발한 믿음이다.
국내에서도 공연된 바 있는 유명한 동명희극원작을 영화화한 <다우트>는 그 불분명한 믿음의 갈래길에 선 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1964년, 뉴욕 브롱크스의 성 니콜라스 가톨릭 학교에 새로 부임한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는 강권적인 교회 분위기에 온화한 변화를 주도한다. 그러나 학교장 알리시아스 수녀(메릴 스트립)는 권위적이고 원칙적인 방식을 고수하려 하고 두 사람은 은밀한 대립관계로 거듭한다. <다우트>는 성향이 다른 두 인물의 심리적 대결 구도를 치밀하게 묘사하는 작품이다. 그 대립은 점차 갈등으로 발전하고 서로를 향한 험담과 비난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 계기로 작동하는 방아쇠가 바로 의심(doubt)이다.
알리시아스 수녀는 학교의 권위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인물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온화하고 자유주의적인 플린 신부는 요주의 인물이다. 같은 바람을 두고도 ‘바람이 변하고 있다’는 알리시아스 수녀와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는 플린 신부의 견해차는 은밀하되 강경한 대립구도를 암시한다. 제임스 수녀(에이미 아담스)의 증언은 두 사람의 관계에 갈등을 발화시키고 긴장을 가열시킨다. 제임스 수녀는 플린 신부와 학교의 유일한 흑인 입학생인 로널드 밀러 사이에 모종의 의혹이 있음을 의심하고 이에 대해 알리시아스 수녀에게 증언한다. 결국 알리시아스 수녀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모되고 이는 플린 신부와의 갈등을 가열시키는 강한 발화점이 된다.
영화는 두 사람의 심리적 대립 구도를 직설적인 방식보단 행위 등을 통한 간접적인 제스처로 묘사한다. 알리시아스 수녀의 방에 들어선 플린 신부가 알리시아스 수녀의 자리에 앉는 순간 경직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이윽고 차양을 올리는 알리시아스 수녀가 햇살에 눈을 찌푸리는 플린 신부를 모른 체 할 때, 그리고 차양을 내리기 위해 일어선 플린 신부의 자리를 다시 알리시아스 수녀가 탈환(?)하는 과정까지. 두 인물의 심리적 대립이 묵언적인 행위를 통해 일차적으로 묘사된다. 한편 심리적인 대립이 본격적인 격양으로 치닫는 순간, 그 주변부의 도구들이 감정의 온도를 높이는 촉매로 활용된다. 알리시아스 수녀가 플린 신부에게 자신의 의심을 처음으로 드러내고 이를 통해 두 사람의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 울려 퍼지는 전화벨은 팽팽한 감정의 대립을 더더욱 신경질적으로 보완한다. 인물을 하부에서 올려 비추거나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기울이는 카메라의 시선 역시 인물의 잠재된 불안을 적절하게 드러낸다. 저온에서 고온으로 끓어오르는 물처럼 감정적 충돌이 갈등의 파고로 출렁이기까지의 과정들이 세심하고도 견고하게 직조된다.
희곡을 기반으로 한 <다우트>는 다분히 연극적이다. 인물들을 둘러싼 환경을 무대적인 장치로 활용하는데 능숙하기도 하지만 그 중심에 선 배우들의 연기가 연극적인 연기를 가능케 하는 까닭이다. 직설적인 대사보다도 행간의 의미 사이를 읽게 만드는 제스처나 표정, 행위가 영화적 의미를 완성시킨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은 현악기의 떨림처럼 섬세하지만 날카롭게 감정의 고저를 다스리고, 그 사이에 놓인 에이미 아담스는 짓눌리지 않고 제 수준을 유지한다. 특히 짧은 분량임에도 바이올라 데이비스의 연기는 실로 인상적이다. 뛰어난 배우들은 <다우트>에 있어서 최고의 자산이자 일등 공신에 가깝다.
알리시아스 수녀는 플린 신부에 대한 의심 너머의 진실을 놓고 공방하지만 실상 그 대립각의 시작점은 서로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다. 긴 손톱과 설탕의 섭취를 혐오하는 알리시아스 수녀가 손톱을 기르고 설탕을 선호하는 플린 신부의 성향을 알게 됐을 때 이미 구도는 이뤄진다. 정치적 축출을 위해 작동한 의심이 진실에 대한 공방으로 번져나가고 그 지난한 갈등 속에서 승패가 정해졌을 때, 영화는 그 승패 너머의 진실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그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과연 진실은 드러났는가. 실상 그것은 중요한 물음이 아니다. 영화는 그래서 그 진실을 애써 조명하려 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긴 의심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건 진실을 위한 의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스로 자신의 신앙적 원칙을 깨버리면서까지 의심을 확신으로 밀고 나가는데 성공한 알리시아스 수녀는 끝내 눈물로서 자신의 통증을 내보인다. 교구를 떠난 플린 신부보다도 깊은 상처가 드러난다. 사실이 드러내는 순간, 진심이 부서진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진실을 드러낼 때 오히려 승자의 강박은 허위가 된다. 강박에서 튕겨나간 의심이 진실에 적중한다 해도 그로부터 비롯된 수많은 말은 허물을 만든다. 바람에 날린 깃털처럼 퍼져나가 주워담을 수 없게 된 말들이 양심을 자극한다. "이 모든 것이 다 내 의심에서 비롯됐어." 알리시아스의 눈물엔 자신의 의심을 통해 뿌리내린 고통에 대한 뒤늦은 자각이 담겼다. <다우트>는 그 속된 믿음이 낳는 책임과 의무를 지적하고 되짚는 현명한 물음이자 사려 깊은 대답이다. 진실을 위한 믿음은 숭고하지만 의도를 위한 믿음은 현명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고 만다. 그것이 비록 사실을 관통한다 해도 그 안에 담긴 진심은 배려하지 못한다. 승패를 위한 의심은 모든 것을 부순다. 그 끝에 남는 건 부끄럽게 선 황폐한 욕망뿐, 어떤 명예도 실리도 남아있지 않다. 믿음이란 이토록 강하고 지속적이라 위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