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월버그의 10대는 심각한 비행의 나날이었다. 그의 듬직한 현재를 생각한다면 낯선 사실이다. 나락에 떨어졌던 오랜 경험은 단단한 현재의 기반이 됐다. 가족이라는 삶의 의지를 깨닫게 됐다.
“만약 내가 그 비행기에 아들과 함께 있었다면 그렇게 떨어지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다. 일등석 객실에서 피 터지게 싸우고 나서 이리 말했을 걸. ‘됐어요. 이제 안전한 곳으로 착륙합시다. 걱정 마세요.’” 9.11 테러에 관한 마크 월버그의 코멘트였다. 이 발언으로 그는 곧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영웅 의식에 젖은 경솔한 발언이었다는 성토가 곳곳에서 이어졌다. 월버그는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이 해프닝은 월버그가 가정적인 남자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켰다. ‘아들과 함께 있었다면’이라는 전제는 할리우드의 소문난 ‘딸바보’이자 4남매의 아버지인 그의 인생을 위한 전제이기 때문이다.
월버그는 보스턴 남부 교외의 도체스터에서 트럭 운전사였던 아버지와 간호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난한 이민자들이 주를 이룬 그곳에서 성장한 월버그는 열악한 경제적 사정 속에서 잦은 불화를 겪던 부모의 이혼을 11세 무렵에 경험했다. 월버그의 유년시절이 불구덩이 한가운데 놓인 폭탄처럼 위태로워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13세 무렵부터 코카인에 손을 댄 월버그는 뒷골목을 전전하며 점차 깊은 나락에 빠져들었다. 마약 판매, 절도, 폭행 등으로 경찰서를 들락거리던 그는 결국 한 술집에서 저지른 심각한 폭행으로 교도소에 수감됐다. 16세의 나이였다. 2년 동안의 교도소 생활은 그에게 일종의 전환점이 됐다. “후회할만한 짓을 많이 했다. 그 실수들에 대해서 분명 대가를 치러야 한다.”
어쩌면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다. 11세 무렵, 친형 도니 월버그와 함께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의 창단 멤버로 발탁됐던 기회를 저버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다만 늦은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분명 남다른 끼가 있었으니까. 다시 가정으로 돌아온 월버그는 형의 후원 속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했다. 스스로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 마키 마크라는 이름의 래퍼가 된 그의 활동은 성공적이었다. 첫 앨범의 타이틀곡 ‘Good Vibration’은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랐고, 싱글앨범은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를 드러내며 섹시한 이미지를 어필한 그는 캘빈클라인의 언더웨어 모델로 기용되며 더욱 큰 인지도를 얻었다. 이 모든 과정은 월버그가 진짜 인생에 다다르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했다.
“나는 스무 번 넘게 보스턴 경찰에게 체포됐고, 그 경험들을 기본적으로 활용했다. 이를 좋은 용도로 쓸 수 있었던 건 틀림없이 축복이었다.”마틴 스콜세지의 <디파티드>(2006)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월버그는 이와 같은 소감을 밝혔다. 결과론적이지만 그의 이른 일탈은 이른 성숙을 위한 여정이 됐다. 사실 월버그는 배우로서의 꿈을 지녀본 적이 없었다. 월버그를 이끈 건 그의 스크린 데뷔작 <르네상스 맨>(1994)의 감독 페니 마샬이었다. “내가 이미 연기하고 있으며 누구보다 어리석지 않으니 왜 카메라 서지 못할 이유가 있느냐고 하더라.” 그 이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함께 출연한 <바스켓볼 다이어리>(1995)에서 자전적인 경험이 투영된 캐릭터를 연기하며 주목을 얻었다.
월버그가 스스로 거물의 자질을 지닌 배우임을 증명한 건 폴 토마스 앤더슨이 연출한 <부기 나이트>(1997)를 통해서였다. 7~80년대 미국의 포르노 산업의 열풍과 몰락을 통해서 당시 미국식 가족주의의 허상을 파헤친 이 작품에서 당대의 포르노 스타로 등장하며 정상과 바닥의 위치를 오르내린 이의 허무를 포착한다. 특히 마틴 스콜세지의 <성난 황소>(1980)의 엔딩을 오마주한 라스트 신에서 거울을 응시하며 내뱉는 나직한 독백은 월버그의 자전적인 열망마저 오버랩되는 듯한 명장면이다. 조지 클루니와 함께 한 이라크전 배경의 코미디 <쓰리 킹즈>(1999)와 해양 재난 영화 <퍼펙트 스톰>(2000), 동명의 SF 고전을 팀 버튼이 리메이크한 <혹성탈출>(2001)과 전설적인 하드록 밴드의 보컬에 대한 전기인 드라마 <록스타>(2001)는 월버그의 입지를 수직상승시켰다.
“아버지가 되면 더 나은 인생에 들어선다.” 월버그는 아버지가 된 뒤, 자신의 삶을 더욱 긍정하게 됐다. 사실 월버그의 캐릭터 대부분은 어두운 성장사와 가족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지니고 있다. <쓰리 킹즈>와 <퍼펙트 스톰>에서의 캐릭터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가족을 향한 절실한 감정이 감지되는 캐릭터였으며 무명 미식축구 선수의 성공실화를 영화화한 <인빈서블>(2006) 또한 가난과 이혼의 아픔을 딛고 일어난 한 남자의 열정과 로맨스가 큰 축을 이루고 있다. M. 나이트 샤말란과 피터 잭슨이 각각 연출한 <해프닝>(2008)과 <러블리 본즈>(2009)에서도 붕괴와 상실의 위기 속에 놓인 가족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장으로 등장한다. 물론 지적이고 터프한 리더의 이미지를 어필한 <이탈리안 잡>(2003)이나 <4 브라더스>(2005)와 같은 작품도 있지만 이들 역시 기본적으로 든든하고 헌신적인 가장의 리더십이 느껴지는 캐릭터들이다. 또한 대통령 암살의 음모 속으로 내던져진 한 남자의 통쾌한 복수를 그린 <더블 타겟>(2007) 역시 그의 진지함과 성실함을 대변하고 있다.
월버그의 최신작 <콘트라밴드>(2012)는 이러한 특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아이슬란드 영화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에서 월버그는 전직 밀수업자를 연기한다. 손을 씻고 새로운 인생을 살지만 가족의 안위를 위해서 위험한 밀수업에 다시 뛰어드는 남자로 등장한다. 복서 미키 워드의 실화를 다룬 전기적인 작품 <파이터>(2010)에서 주연을 맡았던 그는 역시 가난하고 불운한 가정 속에서도 건실하고 우직하게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는 인물을 그려낸다. 무엇보다도 월버그가 직접 제작까지 도맡은 두 작품이니만큼 그의 철학과 잘 부합되는 작품이리라는 건 확실하다.
보스턴 교외의 빈곤한 도시에서 암담한 10대를 관통한 월버그가 할리우드를 주름잡는 배우이자 제작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가족에 대한 믿음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결코 상상할 수 없는 현재를 살고 있다. 월버그가 아들과 함께 ‘그 비행기’에 존재했었다 해도 그 역사적 비극을 막아냈을 가능성은 여전히 희박하게 느껴지지만 그가 지닌 가족적인 애정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진다. “성공과 결혼으로 인해서 우리가 더 나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한 여자의 아내로서, 네 아이의 아버지로서, 마크 월버그는 그렇게 오늘을 산다.
2008년,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의 여우조연상 부문 후보로 오른 시얼샤 로넌은 불과 13살의 나이였다. 최연소 노미네이트 기록이었다. 배우로 활동한 아버지를 따라 촬영장을 구경하곤 했던 어린 소녀는 조 라이트의 <어톤먼트>(2007)와 함께 매우 빠르게 전세계로 전파됐다. 피터 잭슨이 연출한 <러블리 본즈>(2009)에서 주인공 소녀 수지를 연기하며 또 한번 무르익는 가능성을 입증했다. 대부분의 아역배우들처럼, 푸른 에메랄드 바닷빛의 눈과 고운 금발을 지닌 로넌 역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설원과 사막 속에서 고된 강행군을 거듭했던 <웨이 백>(2010)의 촬영장에서 로넌은 더 이상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액션 스릴러물 <한나>(2011)에서 그녀가 펼친 연기적 도전의 결과물을 예상하긴 어렵지만 한 가지는 장담할 수 있다. 점차 성숙해지는 로넌이 장차 할리우드의 여신 자리를 꿰찰 것이라는 것. 지금 그녀에게서 여신의 징후가 보인다.
일찍이 <데드 얼라이브>나 <고무인간의 최후>와 같은 작품을 통해 B급 유희와 특수분장에 일가견을 보인 피터 잭슨은 <반지의 제왕>과 <킹콩>과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이런 재능을 유감없이 확장하며 자신의 위치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러블리 본즈>는 피터 잭슨의 또 다른 장기를 제시하는 영화다. 순수와 불안이 중첩된 소녀의 감수성을 영적인 판타지 세계관과 연동시키며 스릴러적인 서스펜스로 방점을 찍는 <러블리 본즈>는 피터 잭슨의 <천상의 피조물>을 연상시킨다. 동성애의 감정을 공유한 소녀들이 자신들의 애정관을 비이성적인 행위로서 극단으로 밀고 나갈 때 이성적인 이해를 무력화시키는 질환적인 긴장감이 조성된다. <천상의 피조물>이 연출한 서스펜스의 형태는 전형적인 기승전결의 형태보다도 그 기질의 불완전함과 그 형태의 불안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러블리 본즈>도 마찬가지다. <러블리 본즈>는 불안정한 선형의 서사 속에 매복된 서스펜스가 불쑥 고개를 내밀며 관객을 위협하는 작품이다.
“나는 14살에 살해당했다.” 애틋한의미의제목-갑작스런 시련으로부터 자라나는 유대감-처럼 <러블리 본즈>는 극 초반부터파국적인 상황을 제시하고 그 비극적 상황으로부터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해프닝과 같은 작은 갈등을 건너며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던 가족은 그 평화를 난도질하듯 갑작스럽게 침입한 비극을 맞이하며 자신들이 누리던 평온한 일상의 가치에 대해서 뒤늦게 깨닫는다. 전반적으로 스릴러적인 색채감이 깃든 사연의 본질은 사실상 가족드라마로서의 감동에 무게중심을 둔 채 진전된다. 날카로운 서스펜스로 방점을 찍는 부분적인 신을 제외하면 <러블리 본즈>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얻은 가족의 분노와 연민을 응시하고 그것이 결국 치유와 회합으로 갈무리된다는 서사의 골격이 주를 이루는 작품이다.
피터 잭슨은 앨리스 세볼드의 동명 원작 베스트셀러의 텍스트를 이미지화함에 있어서 원작의 틀을 고스란히 차용한다. 원작에서 화자 역할을 하는 수지 새먼(시얼샤 로넌)은 <러블리 본즈>에서도 극을 설명하는 시점의 중심에 선다. 동시에 서사적 기승전결도 원작의 판본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러블리 본즈>는 분명 원작과 다른 작품이다. 피터 잭슨은 원작의 재현보다도 자신이 추구하는 이미지의 창조에 방점을 찍고자 한 것처럼 보인다. 수지 새먼을 전지적 관찰자 시점에 두고 서사를 밀고 나가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시점과 직접적인 내레이션을 통해 극적 전개를 꾀하는 <러블리 본즈>는 분명 서사적 표현 방식이 다를 뿐, 본질은 유사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피터 잭슨은 원작과 달리 수지 새먼이 내려다 보는 이승보다도 그녀가 자리한 저승의 이미지들을 표현하는데 많은 공을 들인다. 덕분에 종종 <러블리 본즈>는 그녀가 바라보는 외세의 현실이 묘사되는 시퀀스와 그녀가 자리한 내세의 풍경이 묘사되는 시퀀스 사이에 어떤 구획이 자리하는 것과 같은 구별을 느끼게 만든다. 이는 단지 이미지의 격차가 만들어내는, 단순한 시각적 감상의 특이점이 아니다. 이는 전반적인 영화의 리듬에도 결과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이질적인 이미지는 영화의 전반적인 리듬감을 훼손한다. (그것이 본래 피터 잭슨이 의도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 마치 윈도우 바탕화면을 스크린에 펼쳐놓은 듯 인공적인 색감이 즐비한 내세의 이미지들은 때때로 환상적이기 보단 식상하다. 이질적인 공간을 접합시키듯 연결하는 이미지의 구현은 때로 효과적이다. 하지만 그 너른 풍경에 담긴 인공적인 색채감은 신비하다기 보단 지나친 창작적 강박을 느끼게 만든다. 동시에 그 내세적인 풍경에 담겨진 철학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언어의 무게에 비해 무력하게 느껴진다. 실제적인 생에서 비극을 체감하며 삶을 마감한 소녀가 내세의 평온 속에서 그 나이에 걸맞은 호기심을 안고 자신의 죽음 이후의 외세를 관찰한다는 소설의 설정에는 적당한 설득력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러블리 본즈>는 생과 사를 가로지르는 소녀의 감수성에 대한 설득 이전에 그 세계관을 전시해내는데 여념이 없다.
물론 이런 불균질한 공간의 전이는 영화에서 예측할 수 없는 정서적 이상 기후를 연출하며 잠재된 서스펜스와 페이소스를 극대화시키는 장치적 도구로서 효과적인 빛을 발하는 순간을 연출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과용된 이미지는 서사의 균형감각을 훼손하는 동시에 영화가 고스란히 끌고 온 원작의 교훈극적인 성격마저도 본질적 의미를 퇴색시킨다. 그 모든 상황을 관통하는 소녀의 성찰은 이미지의 과시 속에서 헐겁게 형태적 유지만을 거듭하고, 그 끝에 걸리는 운명적인 징벌마저도 사족과 같은 의무적 첨부처럼 보일 뿐이다. 본래 영화에 깃들어 있던 잠재적 의미들은 이미지의 과시 속에서 온전히 제 빛을 잃었다.
결과적으로 <러블리 본즈>는 피터 잭슨의 취향이영화를 관장해버린개인적 만취이거나 일말의 시행착오처럼 보인다. 현재 그의 감각을 지배하는 영감의 원천을 추측한다거나 시각적흥미를 자아낼 만한 편린적인 이미지는찰나적으로존재하지만 그 모든 조합은 지극히보는 이를불편하게 만들정도로 형태적으로 불완전하다. 이는 단순히 전형적인 완전함을 이야기한다기 보단 말 그대로 기본적인 형태적 완성도를 의미한다. 배우들의 열연도그런 결과물 속에서온전히 잠식된 탓에 특별한 의미를 자아내지 못한 채사장될 운명에 처하는 것만 같다. 그런 의미에서 <러블리 본즈>는 피터 잭슨의 대표작이 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분명 그의 어떤 야심을 드러내는, 혹은 피터 잭슨이라는 창작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관객에겐 분명 관통할만한 소품으로선 유용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그에 대한 이해가 동반될 때나 가능한 일이 될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