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슨 만델라는 소수 백인을 중심으로 다수의 흑인을 박대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격리정책,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에 맞섰다. 그가 처음부터 평화주의자의 노선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지독한 폭력을 행사하는 사회적 차별에 분노한 그는 피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 마오쩌둥에 감화되어 무장투쟁을 고려했다. 이는 남아공의 다수의 흑인들에게 지지를 얻었으나 결국 이런 활동은 당국의 감시 속에서 그를 정치범으로 체포하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했다. 종신형을 선고 받은 만델라는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로벤섬에 있는 감옥에서의 18년간의 수감세월을 포함해 27년 여의 세월을 옥중에서 인고했다. 그 세월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71세의 나이로 석방된 만델라가 선택한 건 무장투쟁이 아닌 정치적 접근이었다. 결국 인종문제에 관한 목소리를 높이며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던 만델라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뒤,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이 참여한 자유 선거에서 당선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고, 평화주의의 아이콘으로서 영원을 산다.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이하, <인빅터스>)는 바로 그 넬슨 만델라에 관한 영화다. 고로 <인빅터스>는 전기영화다. 하지만 어느 대단한 인물들을 묘사하는 전기영화들의 특성처럼 인물 자체에 모든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인빅터스>는 시대적 정황 속에서 인물의 선택이 이루는 합리를 살핀다. 말 그대로 인물의 대단한 결의보다도 그 결의가 지닌 확신이 무엇인가를 들춘다. 인물에 초점을 맞춘 접사보단, 인물을 둘러싼 환경의 인과관계를 두루 살피는 광각의 풍경을 연출한다.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직에 오르기까지의 풍경을 다큐적 질감의 영상으로 그려내는 <인빅터스>의 도입부만으로도 영화의 태도는 확고해진다. 실제적인 사실감을 끌어냄으로써 인물에 집중하기 보단 시대적 공기를 읽어내겠다는 노력이 읽힌다.
일촉즉발의 도화선이나 다름없는 인종갈등 사이에서 만델라가 추구한 건 평화였지만 그 평화를 이루는 방식은 실리적이었다. <인빅터스>가 조명하는 건 바로 그 실리에 있다. 그리고 그 실리를 실현시키는 방식, 즉 만델라의 정치적 행보가 어떠했는가에 대해서 탁월하게 읊는다. <인빅터스>는 만델라(넬슨 만델라)와 남아공의 럭비팀 주장이었던 프랑소와 피나르(맷 데이먼)의 관계를 통해 흑백의 갈등노선이 무마되는 드라마틱한 사연을 그려낸다. 엄밀히 말해서 사연의 골격은 빤한 공식처럼 전형적이다. 다만 그 전형적인 드라마의 외형을 엄연히 감동적인 것으로 승화해내는 비결이란 바로 연출적 자질을 넘어선 시선의 깊이에 있다. 그리고 그 시선의 깊이는 당연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통찰력을 의미한다.
최근 몇 년 사이, 대단한 드라마를 만들어내고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빅터스>는 어떤 의미에서 그의 지난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평작에 가까운 작품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인빅터스>는 그 형태의 평이함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실존적인 전기영화이자 스포츠 영화로 치장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론 야심이 깃든 정치영화에 가깝다. <인빅터스>는 만델라를 간디로 만들지 않는다. 비폭력주의의 화신으로 각인시키기 보단 그가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에 얼마나 영리하게 접근하는 사람이었는가에 대해서 설득시킨다. 물론 그 이전에 중요한 건 정치적 올바름이다. 올바르고 영리한 지도자가 수많은 이들의 삶을 책임질 때 세상이 얼마나 이치에 맞게 변화하는가를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빅터스>는 이상을 추구하는 실리적 방식에 대해서 웅변하는 정치적 지론서이자, 그 정치를 지지해야 할 이들의 의무가 어느 방향에 동조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지침서나 다름없다.
스포츠 영화로서의 박진감이나 속도감보다는 육중한 무게감과 거친 중량감이 드러나는 <인빅터스>의 럭비 경기 장면은 그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짊어져야 했을 일종의 책임감을 대변한다. 물론 이를 의무적 압박처럼 이해시키기 보단 일종의 자아실현적 의무로서 받아들이는 선수들의 표정은 <인빅터스>가 주장하려는 교훈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외압적 강박이라기 보단 자발적 지지에서 비롯된 선수들의 의지는 스포티한 쾌감보다 내면적 의지를 강건하게 드러낸다. 이를 통해 <인빅터스>는 전형성의 한계에서 벗어나 보다 숭고한 드라마의 본질을 획득한다. 중요한 건 <인빅터스>가 만델라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마는 전기적 헌사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랜 토리노>에서 가치 있는 희생과 지혜로운 유산을 증명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인빅터스>를 통해 통합과 화해의 가치를 설득한다. 더 이상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영화적으로 해석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게 만들 만큼 그는 이미 하나의 경지를 이뤘다. <인빅터스>가 그의 평작처럼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살아있는 신화로서 반열에 올려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