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7월 27일부터, 제30회 런던올림픽이자 3번째 ‘런던’올림픽이 개최된다. 영국의 문화적 저력이 총망라될 개폐막식은 이번 대회의 하이라이트. 그 빛나는 순간을 선사할 여덟 명의 대단한 재주꾼들을 소개한다.
대니 보일(Danny Boyle)/개막식 아트 디렉터
“두려워하지 말라. 영국이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 찰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의 한 구절은 런던올림픽 개막식의 주제 ‘경이로운 영국(Isles of Wonder)’으로 승화됐다. <트레인스포팅> <슬럼독 밀리어네어> 등의 영화로 스타일리시한 비주얼에 핏이 딱 떨어지는 사운드를 선사해온 영국 감독 대니 보일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쇼’를 약속했다. 현직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가 여왕의 명으로 스타디움에 날아들며 시작될 개막식은 이미 한 편의 영화를 예고한다.
언더 월드(Underworld)/개막식 음악 감독
대니 보일은 말했다. “올림픽 개막식 음악감독으로 임명된 언더월드는 개막식으로 옮길 영국적인 창작력의 마지막 조각이다.” 언더월드는 <트레인스포팅>의 엔딩 타이틀곡 ‘본 슬리피’의 주인공이다. 90년대 후반 빅비트 열풍을 이끈 언더월드는 여전히 최고의 사운드를 뽑아내는 일렉트로니카 듀오다. 엘보우가 주제가를 부르고, 뮤즈, 콜드플레이와 같은 실력파 영국 뮤지션들의 참여가 언급되는 개막식 사운드를 지휘한다니, 언더월드에 대해 어떤 설명이 더 필요할까.
스티븐 달드리(Stephen Daldry)/크리에이티브 총괄 프로듀서
개막식과 폐막식은 전세계인의 축제 올림픽의 입구와 출구다. 런던올림픽의 입구와 출구는 크리에이티브 총괄 프로듀서 스티븐 달드리를 통해 세워진다. 자신이 연출했던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엘튼 존과 함께 뮤지컬로 연출한 그는 토니상 10개 부문 수상으로 전방위적인 재능을 증명했다. 발레복을 입은 탄광촌 소년 빌리 엘리어트처럼, 새로운 시대를 사는 영국인들의 꿈이 환상적인 이미지로 투영된다.
마크 피셔(Mark Fisher)/디자인 총괄 프로듀서
U2의 360도 투어는 360도 개방형 무대에서 펼쳐졌다. 마크 피셔가 설계한 이 세트는 가히 괴물이다. 4개의 거대한 곡선 기둥, 생물처럼 변화하는 중앙의 LED, 객석 모두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이 무대는 우주의 쇼를 연출했다. 전설적인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 투어의 무대 역시 그의 손끝에서 완성됐다. REM, U2, 조지 마이클 등의 무대를 설계한 그가 이번 런던올림픽 개폐막식을 디자인했다 하니, 안 봐도 환상이다.
해미시 해밀턴(Hamish Hamilton)/방송 총괄 프로듀서
제30회 런던올림픽 개막식 전세계 시청자 수를 예상하길 무려 0이 아홉개, 10억 명이란다. 날이면 날마다 오지 않을 영국발 빅쇼를 전세계 안방으로 전파하는 건 바로 해미쉬 해밀턴. U2, 로비 윌리엄스,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 세계적인 스타 뮤지션들의 콘서트를 안방에서 플레이할 수 있는 DVD 기획자로 유명했던 그는 그래미 어워드에 노미네이트된 바 있으며 2010년에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연출하기도 했다.
캐서린 우그우(Catherine Ugwu)/프로덕션 총괄 프로듀서
2000년 1월 1일, 런던의 밀레니엄 돔이 개장했다. 스펙터클한 오프닝 행사를 제작한 건 캐서린 우그우였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공공 이벤트를 컨설팅하고 프로그래밍하는 한 사람이다. 2002년 맨체스터 영연방경기대회 폐막식과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개막식.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폐막식 제작자이기도 했던 그녀는 올해 런던올림픽 개폐막식을 통해서 또 한번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이벤트를 기획한다.
킴 개빈(Kim Gavin)/폐막식 아트 디렉터
“지난 50년 동안 음악은 영국의 가장 강력한 문화적 수출품이었다. 우리는 올림픽 폐막식을 위대한 영국 팝뮤직의 특별한 프로모션으로 기획할 작정이다.” 폐막식 아트 디렉터 킴 개빈의 포부는 주제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이름하여 ‘심포니 오브 브리티쉬 뮤직(A Symphony of British Music).’ 2009년 120만 파운드의 티켓 수익을 올린 테이크댓의 서커스 투어를 비롯해서 지난 해 회당 8만여 명에 달하는 관객을 동원한 테이크 댓의 프로그레시브 UK투어 29회를 전회 매진시킨 바 있는 그는 현재 영국에서 가장 창의적인 콘서트 기획자다.
데이비드 아놀드(David Arnold)/폐막식 음악 감독
8월 12일에 열릴 런던올림픽 폐막식은 그야말로 화룡점정이 아닐까. <007>시리즈의 근작 다섯 편을 비롯해서 수많은 영화음악을 만들어온 데이비드 아놀드는 런던올림픽 폐막식 음악감독으로서 말했다. “이 경이적인 이벤트를 위해서 황홀하고 열광할만한 사운드트랙을 준비할 것이다.” 락의 본고장 영국의 심장에서 열릴 폐막식은 어쩌면 21세기의 기념비적인 락 페스티벌이 될지도. 참고로 데이비드 아놀드는 아이리쉬 싱어 송 라이터 데미안 라이스와 사촌 지간이다.
가이 리치의 <셜록 홈즈>는 아서 코난 도일의 원작팬들에게는 이단에 가까운, 혹은 막연하게나마 지적인 영국 신사 이미지의 탐정 아이콘 셜록 홈즈를 연상하고 있을 대부분의 관객들에게도 낯선 인상이었을 것이다. 차분하면서도 치밀하게 정보를 수집해하가는 추리력의 대가라기 보단 호전적으로 주먹을 날리며 본능에 가까운 인지력을 통해서 사건을 예견해나가는 셜록 홈즈는 캐릭터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를 넘어서는 이질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영화화된 <셜록 홈즈>는 코난 도일의 소설을 빌린 스핀오프라고 이해했을 때 보다 쉽게 받아들여질 만한 결과물이다. 실질적으로 영화의 원안이 된 건 각본에 참여했던 리오넬 위그램의 코믹북이기도 했다.
<셜록 홈즈>는 원작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가상의 캐릭터 블랙우드(마크 스트롱)를 셜록 홈즈에 대적하는 악으로 설정하며 고전적인 추리물을 거대한 음모론의 세계로 확장해낸다. 사교 집단의 수장으로서 국가의 안위까지 위협한다는 블랙우드는 셜록 홈즈에게 액션 히어로로서의 활약상을 덧씌우기 위한 수단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가 구상한 세계관의 스케일에 비해서 그 대칭점에 놓인 블랙우드의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미약하여 그 세계관 자체가 낭비가 되는 맹점이 발견된다. 하지만 셜록 홈즈와 왓슨(주드 로)을 버디무비의 구도로 세워 넣으며 위트와 활기를 불어넣으며 캐릭터로서의 매력을 어필하는데 성공했다. <셜록 홈즈: 그림자 게임>은 전작에서 얻어낸 가능성, 즉 새롭게 재해석된 캐릭터의 활약상을 보다 구체화하는데 성공한 인상이다.
조커의 등장을 알리는 <배트맨 비긴스>의 엔딩처럼 <셜록 홈즈>에서도 코난 도일의 원작에서도 소개되는 셜록 홈즈의 숙적 모리아티(자레드 해리스)의 등장을 예고하며 엔딩 크레딧을 올린다. 이 속편에서 모리아티는 악의 위압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무턱대고 벌려 놓은 인상이 강했던 <셜록 홈즈>의 세계관에 비해서 보다 확장된 전세계적인 음모론을 메우고도 남을 만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괴짜 기질의 천재로 그려지는 셜록 홈즈가 종잡을 수 없는 활력을 구축하는 것과 반대로 차분한 카리스마로 극을 지배하는 모리아티의 존재감은 극 전반에 적절한 서스펜스를 새겨넣으며 영화의 음모론적 세계관을 보다 근사하게 정착시킨다. 셜록 홈즈와 왓슨은 모리아티가 설계한 체스판을 어지럽히고 분쇄하는 모종의 말처럼 움직이는데, 팽팽하게 맞붙는 셜록 홈즈와 모리아티의 대비가 흥미롭다. 자레드 해리스의 중후한 연기 또한 인상적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셜록 홈즈와 주드 로의 왓슨 듀오는 전작만큼이나 활력적인 버디무비의 위트를 자아내고, 가이 리치 특유의 스타일리시로 치장된 액션 시퀀스는 인상적인 순간을 포착해낸다. 특히 중후반부에 고속 촬영으로 묘사되는 숲 속 추격 시퀀스는 이번 속편에서 가장 유려하게 회자될만한 한 수다. 물론 셜록 홈즈라는 내피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외피가 선명하게 눈에 띄는 이 시리즈는 예측불가능한 배우의 가능성이라는 장점과 캐릭터 본연의 매력이 상실된 단점을 여전히 고스란히 끌어안고 있다. 다만 암묵적인 로맨스의 노스텔지어와 후반부의 반전적인 상황을 통해서 자기 희생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야생마와 같은 캐릭터의 성숙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발전적이다. 또한 이질적인 캐릭터의 형태도 두 편의 시리즈를 거듭하며 좀 더 익숙해지는 형세다.
이성적인 추리물의 세계관을 감각적인 액션과 활극적인 캐릭터의 구도로 팽창시킨 이 시리즈는 보다 공고해진 자기 논리를 통해서 본격적인 프랜차이즈로서의 진정한 동력을 얻어냈다. 캐릭터에 관한 프롤로그 같았던 전편에 비해서 <셜록 홈즈: 그림자 게임>은 진정한 출발점이라 불릴 만한 속편인 것이다.
전작 <폭력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라미스>는 관객을 폭력의 현장에 무덤덤하게 노출시키며 이야기를 꺼내 든다. 날이 선 면도칼은 사람의 목을 갈라 피를 쏟아내고, 약국에 들어와 도움을 청하던 임산부는 발 아래로 하혈하다 쓰러진다. 시작부터 피가 흥건하다. 그 거리엔 피가 흐른다. 포도주를 따르듯 피를 부르는 무리들이 조용히 살아간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피의 거래로 거리를 장악한 이들의 살벌한 언약에 발을 담게 된 자의 이야기다. 폭력에 가담한 그 손아귀에서 달아날 수 없다. 더 이상 헤어날 수 없는 침전된 삶에 발목을 잡힌다.
니콜라이(비고 모텐슨)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내다. 니콜라이는 국제적 범죄조직 ‘보리V자콘’의 보스 세미온(아민 뮬러-스탈)의 아들 키릴(뱅상 카셀)을 돕고 그의 신임을 얻었다. 앞뒤 분간 못하는 키릴과 달리 니콜라이는 냉정하면서도 속이 깊다. 거친 인상과 달리 난폭하지도 않다. 명확하게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직감하기 어렵다. 실질적으로 런던 거리를 암묵적으로 지배하는 ‘보리V자콘’의 패밀리들은 거리의 이방인이다. 그들은 폭력을 유입하며 그 거리의 일부로 편입된다. 니콜라이는 그들이 장악한 거리에 편입하기 위해 폭력을 전시한다. 신임을 얻고 그들의 일부로 거듭나려 한다. 결국 세례식이 거행되듯 그는 조직의 일부로 문신을 새긴다.
폭력을 계승하려는 아비는 직계의 무능함을 질시하면서도 보호하려 든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인을 주문하고, 가문의 이름으로 후계를 보호한다. 그러나 아들들은 하나같이 어리석거나 무력하다. 아비들이 자식들로 전전긍긍할 때 새롭게 유입된 이방인이 눈에 들어온다. 니콜라이는 키릴로 인한 조직의 손실을 보석하기 좋은 대상이다. 세미온은 니콜라이에게 의식을 통해 조직을 세례한다. 그는 조직의 신임을 얻고 중책을 맡게 된다. 자식으로부터 비롯된 조직의 부채를 갚기 위한 제물로 삼는다. 사투가 벌어진다. 조직의 일원으로 거듭되는 순간 조직을 위한 죽음에 내몰림마저 불사해야 한다.
이 모든 사건에 대한 관찰이 시작되는 건 일기장 덕분이다. 사람이 죽는 동시에 생명이 태어난다. 폭력에 노출된 어미는 죽어서 새로운 자식을 남긴다. 동시에 그녀가 남긴 기록은 그녀에게 가해진 폭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조산원 안나(나오미 왓츠)는 그 실체로 접근하지만 실상 그녀조차도 은밀하게 다가오는 폭력의 위협을 감수해야 할 따름이다. 니콜라이는 조직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서 은밀히 흔들린다. 조직의 수하로서 충성을 맹세하고 명령을 이행하지만 그는 폭력을 맹신하는 무리와 다르다. 궁극적으로 다른 목적을 위해 조직에 잠입하면서도 조직의 수하로서의 역할극에 충실하다. 폭력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폭력에 온전히 노출된다. 또한 조직에 충성하는 동시에 안나와 아이를 보호하려 한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폭력의 역사> 이전의 사연처럼 보인다. 두 영화가 하나의 맥락을 두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정서적인 진화의 측면에서 <이스턴 프라미스>는 <폭력의 역사>보다 뒤가 아닌 앞에 놓인 이야기 같다. <폭력의 역사>가 폭력의 인과율을 운명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이스턴 프라미스>는 폭력의 양면성을 저울질하듯 관찰하는 이야기다. 전자가 어떤 결과에 대한 후일담이라면 후자는 결과를 가늠하는 전사의 추적에 가깝다. 갱스터 무비의 외피를 입고 중후한 방식으로 구술되는 영화는 흥건하고 질퍽거리는 이미지를 묘사한다. 관객은 그 폭력을 관찰하는 동시에 온전히 폭력에 노출된다. 아이를 입양한 안나의 가족이 스코틀랜드의 외딴 곳에서 평화를 누릴 때 니콜라이는 런던의 어두운 바에서 고독을 맞이한다.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사내는 구원을 약속할 뿐 정작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선의든 악의든, 폭력은 그 대상마저 철저하게 유린한다. 발가벗고 적을 맞이하더라도 살아남기 위해선 악마가 되야 한다. 폭력과 계약한 사내는 그 속에서 계속 가라앉을 따름이다. 죽여야 할 적도, 살려야 할 가족도 모두 다 잃은 채 홀로 아득한 폭력에 갇혀 살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