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캐처> 단평

cinemania 2015. 1. 27. 03:33

1. <폭스캐처>는 실화를 바탕에 둔 작품이다. 결국 <폭스캐처>는 정해진 결말로 가는 과정에 관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어느 미친 재벌 상속자의 살인사건이 복잡다단한 미스터리의 내면이 뒤엉켜 벌어진 필연적 비극이었음을 추론해 풀어헤친 뒤 개연성 있는 서사로서 나열해내는 과정이 상당히 흥미롭다.

 

2. 감정적인 온도를 동결시키는 서늘한 기조를 밀고 나가는데 그 덕분에 <폭스캐처>에선 감정의 온도보다도 밀도가 크게 와닿는 인상이다. 시종일관 팽창되는 감정의 밀도로 스크린이 꽉 차오르는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스산해 보이는 스크린 너머의 온도가 감지되기보다도 목까지 차오르는 불안감이 들썩이는 느낌을 연신 얻었다. 그만큼 심리적 인과를 세심하게 드러내는 내러티브의 개연성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는데 그에 걸맞게 시종일관 힘을 잃지 않으면서도 인과의 흐름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감상의 지표를 잘 세워나간다. 한편으론 이처럼 이성적인 내러티브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심리적 충돌을 추론해나가는 이 영화가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당연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3. 카메라는 인물에게 결박된 유령처럼 슬그머니 그 주변에 부유하듯 존재하는데 인물의 표정과 내면의 감정을 중계하는 카메라의 거리감이 변화하는 방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를 평행선처럼 이어나가는 이 영화에 미세한 긴장과 이완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인물과의 거리감을 통해 물리적인 풍광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차원을 넘어서 객석에서 지속적으로 감지할 수밖에 없는 불안감을 벌리고, 조이는 인상이랄까. 특히 인물의 얼굴을 초근접 촬영한 컷이 스크린을 장악할 때 정말 광활한 풍경이 된다고 느꼈는데 인물의 내면적 갈등이나 결핍이 순간적으로 감상의 여지를 확 벌리고 쓰나미처럼 쏟아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만큼 배우들의 표정 연기가 상당히 좋았다.

 

4. 대단히 빛나는 연기를 선보이는 마크 러팔로와 스티브 카렐의 연기를 위한 반사판 노릇을 하고 있지만, 채닝 테이텀의 연기 또한 상당히 좋았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를 차지하는 그의 연기는 시작부터 호기심을 끌어내고 견인하며 영화에 탁월하게 기여한다. 무엇보다도 스티브 카렐이 맡은 존 E. 듀폰이 채닝 테이텀이 연기하는 마크 슐츠를 만나며 처음 등장할 때의 신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괴팍하면서도 음침한 구석이 있어 보이는 백만장자가 여유를 부리며 불운한 금메달리스트를 대하며 권위적인 호흡으로 대화를 주도하고, 대화의 여백을 만들어 상대의 반응을 골똘히 살피다가도 쉭쉭거리며 숨을 가다듬을 수밖에 노쇠한 육체가 새어나오는 모습을 보고 스티브 카렐이 이 작품의 주도권을 쥐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당연히 그럴만한 연기를 한다는 건 또 다른 차원의 경지다. 코를 붙인 건 단지 외모를 따라가기 위해서였을지 모르겠지만 그가 살짝 고개를 들고 상대를 응시하며 침묵을 통해서 어떤 불만을 전하고 긴장감을 조성하는 신에선 그 코의 높이가 상당히 기능적인 역할을 해낸다는 인상이었다. 한편으로 감탄한 건 마크 러팔로와 채닝 테이텀이 연기하는 선수로서의 움직임이었는데 채닝 테이텀이 고릴라처럼 성큼성큼 걷는다면 마크 러팔로는 오랑우탄처럼 흐느적거리며 걷는다. 이런 행동묘사는 인물의 성격과도 완벽하게 부합돼서 행동과 심리에 대한 입체적인 감상 층위를 형성한다. 정말 좋은 배우들이다. 한편으론 최근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도 등장하는 시에나 밀러가 좋은 작품에서 거듭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론 그녀가 에이미 아담스 정도의 배우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에 반갑기도 했는데, 물론 어찌될진 두고 볼 일이다.

 

5. 베넷 밀러는 <카포티>, <머니볼>에 이어서 <폭스캐처>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실화 바탕 영화로 채웠는데 <폭스캐처>를 보고 나니 앞으로 어떤 경력을 얻게 될지 궁금해졌다. <카포티> <머니볼>이 어떤 인물의 내면에 관한 영화였다면 <폭스캐처>는 어떤 사건의 내면에 관한 영화에 가깝기 때문에 그의 전작들과 다른 지점이 존재한다. 인물의 관계 구도가 중요했고, 그 관계 구도로 뒤엉킨 심리가 파생시킨 사건이 중요했다는 점에서 베넷 밀러의 경력 안에선 새로운 지점이었던 것 같다. 그만큼 <폭스캐처>가 베넷 밀러라는 감독에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담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6. <폭스캐처>는 열등감의 지옥에 갇혀버린 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빈부의 대비가 아이러니할 정도로 혈연에게 인정 받고자 하는 결핍에 삶을 지배당하는 두 사람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어울리고, 필연적으로 어울릴 수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 불가분의 비극은 벌어지고 만다. 흥미로운 건 존 듀폰과 마크 슐츠가 자신의 열등감을 공허하게 채우는 방식인데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 복무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덧없이 팽창시켜서 자신이 원하는 대상에게 그 존재감을 전시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새어나가는 순간과 그의 노력에 사냥개처럼 복무하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되새기는 마크 슐츠의 환각이 흩어지는 순간 이후의 과정에선 일말의 페이소스가 느껴지는데 그 페이소스는 에필로그에 가까운 결말과 맞붙어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꿈꾸는 인간의 처연함 그 자체로 와닿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두 사람이 각기 인정받고자 했던 대상은 영화의 끝에 다다라 모두 다 세상으로부터 사라지고 지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결국 <폭스캐처>는 여우를 사냥하는 인간을 흠모하다 버림 받은 사냥개들의 영화처럼 보인다. 생각보다 슬프고 처절한 영화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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